[교회사 숨은 이야기]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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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21
황사영 순교 이후 부인은 제주도, 두 살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2021.09.12발행 [1629호]
▲ 2018년 4월 15일, 우하하 성지순례단이 추자도 황경헌 묘소를 찾았을 때 묘소 위로 현현한 십자가 모양의 구름 형상. 횃불처럼 십자가를 손에 든 사람이 묘소를 굽어보는 신비한 형상이다. 사진=라용집 제공 |
뿔뿔이 흩어진 가족
1801년 11월 5일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2세 난 아들 황경한(黃景漢, 1800∼?)은 추자도로 각각 노비가 되어 떠났다. 숙부 황석필과 집안의 종들도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서 황사영의 아현동 식솔들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명련은 제주도 유배 길에 배가 추자도에 들렀을 때 두 살배기 어린 아들을 섬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것으로 모자는 이승에서 다시 얼굴을 맞대지 못했다. 「사학징의」의 기록에 따르면 황경한은 서울을 떠날 때부터 추자도에서 노비로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국가의 명령이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정명련이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것을 염려해서 황경한이 중도에 죽었다고 하고 뱃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추자도에 일부러 떨군 것이 아니다.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끌려간 상태에서, 젖도 떼지 않은 마지막 남은 일점혈육을 낯선 섬에 노비의 신분으로 떨구고 가는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다. 국법에 따라 추자도에 남겨진 아이는 추자도 별장(別將)의 지휘로 어느 민가에 맡겨져 길러졌을 것이다.
추자도에 남겨진 황경한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그의 무덤은 추자도 예초리에 잘 정돈되어 천주교 성지로 가꾸어져 있다. 정명련은 1801년에 제주도에 입도하여, 38년을 더 살다가 1838년 2월 1일에 세상을 떴다. 그녀의 사망 일시는 정명련이 부쳐 살던 주인집 아들 김상집(金相集)이 정명련의 사망 이듬해인 1839년 1월 23일 대정현 서성리(西城里)에서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보낸 부고 편지에 나온다. 편지는 현재 사본만 남아 전한다.
편지의 서두에서 김상집이 “지금까지 뵈온 적 없사오나 소식은 이따금 아옵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은 생전에 이따금 근황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듯하다. 하지만 만년에는 소식이 끊겼고, 정명련의 사망 후 부고 편지를 추자도로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상집은 추자도에 사는 이서방 편에 안부를 잇게 되어, 다시 부고를 알렸다. 일주일 뒤가 정명련의 1주기였으므로 마음이 더 급했을 것이다. “이곳 주인된 도리로 차마 박절하여 제삿날은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고, 회답은 지금 가는 인편에 바로 보내달라”는 내용으로 글을 맺었다.
정명련은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기품 있는 한양 할머니로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난주(蘭珠)로도 알려져 왔는데, 공식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정명련으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 정명련이 황경한을 놓고 갔다고 전하는 바위에 재현한 황경한 동자상. 사진=라용집 제공 |
추자도의 황경한과 그의 후손
완전히 잊혀졌던 황경한의 기억을 처음으로 환기시킨 것은 1900년 6월에 제주본당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라쿠르츠 마르셀(Marcel Lacrouts, 한국명 具瑪瑟, 1871∼1929) 신부에 의해서였다. 신부는 1908년 6월, 교구 사목 방문차 추자도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황사영의 손자와 증손자, 즉 두 살 때 추자도로 유배된 황경한의 아들과 손자를 다시 찾게 되었다.
황경한의 후손은 당시 추자도에서 말할 수 없이 곤궁한 상태로 살고 있었다. 라쿠르츠 신부는 1909년 10월 5일에 파리외방전교회 교수 신부로 귀국해 있던 샤르즈뵈프(Michel 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알렸다. 이에 샤르즈뵈프 신부가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잡지 「미션 가톨릭」에 이 사연을 소개해 모금한 480프랑을 보내주었다. 라쿠르츠 신부는 이 돈으로 황경한의 손자를 위해 집과 밭을 사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미션 가톨릭」에 소개된 라쿠르츠 신부의 서간 원문은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때 황사영의 손자는 제주로 귀양 갔던 자기 할머니가 아버지 황경한에게 쓴 편지를 신부에게 건네주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사본으로 전해지는 김상집의 부고 편지는 김구정 선생이 1973년 황경한의 4대손 황찬수씨에게서 제공 받아, 1973년 7월 15일 자 이후 가톨릭시보 5회에 걸쳐 연재한 글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해당 편지의 원본은 지금도 그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추자도의 황씨 집안에는 어머니 정명련이 황경한에게 의복을 보내면서 쓴 친필 편지가 있었다고 했으니, 라쿠르츠 신부에게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던 그 편지일 것이다. 이로 보아 2살 때 아들과 헤어진 어머니는 제주도와 추자도를 사이에 두고 이따금 연락를 취하고 옷가지를 보내며 왕래가 있었던 듯하다. 자료의 원본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제보를 요청한다.
창원황씨 족보와 황사영의 후손 계보의 난맥상
추자도에 정착한 황경한의 후손은 이제껏 이어져 왔다. 그들은 서울 쪽 후손과는 나중에라도 연이 닿을 수 있었을까? 노비의 신분이 된 황경한과 그의 후손은 라쿠르츠 신부와 만나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혀진 채 방치되었다.
창원황씨 족보는 1857년, 1914년, 그리고 1957년, 1979년, 1995년에 간행되었다. 그런데 부친 황석범과 황사영, 그리고 황사영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이 다섯 가지 족보의 기록이 다 달라 대단히 혼란스럽다. 1857년 「창원황씨족보」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기술 내용이 정확하고, 황사영 항목에는 “진사인데, 사학으로 복법(伏法) 되었다”는 짧은 내용만 나온다. 그러니까 황호에서 내려온 만랑공파의 계보는 황사영에게서 끊어졌다. 2살 때 추자도에 노비로 끌려간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족보에서 말소되었다.
57년 뒤인 1914년에 작성된 「창원황씨세보」 만랑공파의 계보는 황사영 앞에 엉뚱하게 황승연(黃升淵)을 적장자로 내세웠다. 족보상 그는 1801년 1월 6일생으로 나온다. 황사영보다 26살이나 어린 그가 돌연 황사영을 제치고 첫째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의 일계가 이어져 여러 대 동안 만랑공파 종손의 자리를 차지했다.
실제로 황승연은 황사영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는 황사영의 먼 일가인 황석행(黃錫行)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1857년 족보에서 황승연은 정확하게 황석행의 적장자로 대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1914년 족보에서 황승연을 돌연 황사영에 앞세운 것이다. 아마도 황사영 집안에 내려오던 토지 소유권 같은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1914년 족보의 황사영에 관한 정보 또한 엉망 그 자체다. 장인을 정약현이 아닌 정약종으로 적었고, 정약종의 조부와 부친의 순서를 바꿔놓았다. 이 족보에는 또 황사영의 아들로 추자도에 귀양 간 황경한(黃景漢)이 아닌, 황경헌(黃敬憲)이란 인물이 처음 등장한다. 생년도 없고, 기일만 1월 5일로 나온다. 묘소가 목천군 북면 성가산(聖加山)에 있고, 배우자는 전주 이씨라고 했다.
추자도 황경한의 직계 계보
친아들 황경한의 무덤은 지금도 추자도에 있고, 황경한의 아들 황상록(黃相錄)과 황보록(黃寶錄)의 묘소도 예초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황경한의 후손들은 이후 각지로 흩어졌다. 지금껏 섬에 살고 있는 후손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황사영에게 황경헌이란 아들이 있고, 그의 묘소가 목천에 있다는 정보가 1914년 족보에 추가된 것이다.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일까? 국법에 역적의 자식으로 노비가 되어 끌려간 죄인을 문중에서 마음대로 빼돌려 목천으로 데려오는 법이 가능할 리 없다. 두 사람은 결코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 문중의 상의로 양자를 들였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1957년에 새롭게 편찬된 「창원황씨세보」는 앞선 1914년 본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하지만 앞뒤 기술은 한층 더 허술하다.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소재 후손을 10세(世) 황호에서 흘러 내려온 계보로 나열하고, 17세 황사영을 소개하면서 또 한번 난맥상을 보여, 황사영의 아들에 돌연 황병직(黃秉直)을 내세웠다. 그 결과 이전 족보에서 황경헌으로 이어진 계보를 무시하고, 황사영에 이어 18세를 황병직으로 잇댔다. 그런데 황병직은 1914년 족보에 황사영의 삼촌인 황석필의 손자로 버젓이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다. 그 결과 1957년 족보에서는 18세 황병직 이하 22세 황인범까지가 황사영의 계보로 섞여 들고 말았다.
다만 이 족보에는 황사영 일계를 소개한 끝에 ‘별록(別錄)’이라 하여 정명련과 황경한, 그리고 그 아들과 손자에 이르는, 추자도에 살고 있는 황씨의 계보를 적어 놓았다. 황경한의 이름은 공란으로 비워놓았다. 족보에는 “아들은 이름이 없는데 경헌(敬憲)으로 추정된다(子無名, 以敬憲推之)”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최근에 간행된 1979년과 1995년 족보는 더 혼란스럽다. 1995년 「창원황씨 장무공파보」에는 1957년의 오류를 답습해 황사영의 아들이 황병직(黃秉直)으로 바뀌어 있다. 그마저도 오자가 나서 황병진(黃秉眞)이라고 했다. 황병직은 1914년 족보에 황사영의 삼촌 황석필의 손자로 나왔는데, 이것이 다시 황사영의 아들로 뒤바뀌었다. 앞서 1914년본 족보에 나온 황승연 일계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대신, 황경헌 일계는 한번 더 엉뚱하게 황병직의 동생으로 순위가 밀려났다.
이제껏 많은 족보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혼란스런 족보는 본 적이 없다. 후계 문제가 이토록 복잡해진 것은 황씨 집안에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 1459~1520)의 강화도 사패지(賜牌地)와 제전답(祭田沓)이 종손인 황사영의 적몰 재산에 포함되었으니, 이를 반환해달라는 청원 문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