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9. 김건순의 개종과 여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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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23
도가의 술법 익혔던 김건순의 사람들, 일제히 천주교로 전향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9. 김건순의 개종과 여주 교회
2021.10.03발행 [1631호]
▲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와 원경도는 1800년 3월 여주 정종호의 집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그림=탁희성 화백 |
천당 가는 법을 얻었소
김건순의 추종자였던 정원상은 1797년 10월에, 8월 중순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했던 김건순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중배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당시 김건순의 집에는 이중배, 원경도와 서양화가 이희영과 그의 조카 이현, 김치석, 김이백, 김익행, 성명순 등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진작부터 도가의 법술을 함께 익히고, 둔갑술과 장신술 공부를 같이 하며, 바다 섬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근 두 달 만에 이들과 만난 김건순은 새 소식을 기대하며 모인 그들 앞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 벽을 향해 앉더니, 알지 못할 주문을 한동안 외웠다. 차고 있던 칼을 풀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번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길에 서양국의 도인과 만났소, 그에게서 죽어 천당 가는 법을 얻었고, 약살법(若撒法,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소. 이제까지 익혔던 육임(六壬)의 법술과는 결별하고, 이제부터 그 도를 힘껏 배우려 하오. 이 자리에서 차고 있는 칼들을 풀고 정도를 함께 행합시다.” 이희영의 공초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표식으로 각자 작은 칼을 차고 있었다.
이후 김건순은 십자가를 그어 보이며 밤새도록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였다. 칼을 끌러 맹세하자거나, 벽을 향해 앉아 주문을 외우는 등의 행동에는 여전히 술법하는 부류들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들은 김건순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은 집단이었다. 이후 이들은 일제히 천주교 신자로 전향했다.
애초에 김건순과 주문모 신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주문모 신부는 1797년 가을, 김건순의 자자한 명성을 들었다. 그는 노론 최고 명문가의 적장자였다. 그런 그가 천주교에 입교할 경우 교회는 든든한 배경 하나를 더하고, 날개를 얻게 될 것이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의 비밀과 특별한 비방(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썼는데, 당시 자신들이 강이천(姜彛天, 1768~1801) 등과 계획하고 있던 해도거병(海島擧兵)의 일에 서학이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던 듯하다.
남곽선생(南郭先生) 주문모와 해상진인(海上眞人) 김건순
김건순이 서학에 관심이 높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주문모 신부는 1797년 8월 초에 같은 여주 출신인 벽동의 정광수 편에 서신을 주어 김건순에게 만남을 청했다. 편지를 받은 김건순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나왔다는 말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소. 한번 보고 싶었는데 먼저 문안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다행이오.” 김건순은 겉봉에 ‘주선생전답상서(周先生前答上書)’라고 쓴 답장을 보냈다. 주문모 신부는 답신을 받고 김건순의 높은 학식과 유려한 문장에 크게 놀랐다. 이 내용은 「사학징의」 중 정광수의 공초에 나온다.
얼마 뒤 김건순은 8월 21일에 열리는 감시(監試)의 응시를 구실로 8월 13일경 상경하였고, 상경 이틀 뒤인 8월 15일, 추석날 저녁에 그는 수각교(水閣橋) 인근 창동(倉洞) 강완숙의 집으로 주문모 신부를 찾아왔다. 수각교는 현 중구 남대문로4가 1번지에 있었던 다리다.
주 신부가 그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자, 그는 신부를 협객의 부류로 여겨, 도리어 천주교인 수십 가구를 모아 섬으로 함께 들어가 천주교를 포교하는 것은 어떠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 섬에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 배를 만들어 청나라로 쳐들어가 선대의 치욕을 씻겠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에 놀란 신부가, 자신이 조선에 건너와서 포교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려는데 있다며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건순은 그제서야 기뻐하며 새벽녘에 돌아갔다. 주 신부는 다시 장문의 설득 편지를 써서 정광수 편에 보냈고, 두 사람은 시험이 끝난 뒤인 8월 26일에 한 번 더 회동했다.
주문모 신부는 남쪽 성곽 즉 남대문 근처 창동 강완숙의 집에 머물렀으므로 이후 김건순과 강이천 등에게 남곽선생이란 은어로 불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김건순과 강이천 등이 해상진인(海上眞人), 서방의인(西方義人), 남곽선생 운운하면서 해랑적(海浪賊)의 변을 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11월 11일 정조는 진사 강이천을 붙잡아 들여 사학의 죄로 추국한 뒤 유언비어 유포죄를 물어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이때 김건순은 주모자였음에도 정국에 미칠 파장이 너무 클 것을 염려해 문제 삼지 않고 그저 덮어버렸다.
정조는 한 해 뒤인 1798년의 「일득록(日得錄)」에서 강이천의 무리를 유배형에 처한 까닭을 밝히면서 “김건순은 명현(名賢) 김상헌의 총손(孫)이니, 10대까지 용서한다는 뜻에서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았다. 이 또한 세신(世臣)을 온전하게 보전하려는 고심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로 김건순은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한 지 불과 석 달이 못 되어, 그의 천주교 개종 소식에 경악한 집안의 집중적인 감시와 관리 속에 놓이게 되었다.
김건순의 신앙생활
임금으로서는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주문모의 이름이 강이천 등의 공초에서 언급되는 데 긴장했지만, 김건순을 혐의 선상에서 아예 배제해버림으로써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남인들의 종교였던 천주교에 노론 최고 명문가의 종손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영세한 뒤 김건순 요사팟의 행동은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공로와 맞먹었다.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덕의 광채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의 희생자로 지목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부모 친척과 친구들이 그가 추적되지 않게 해줄 나약한 말 한마디를 얻어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썼다.
1797년 10월에 여주로 돌아온 자리에서 김건순은 좌중에게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시점은 이때가 아니라 두 해 뒤인 1799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추안급국안」의 1801년 3월 17일 자 이희영의 공초에 관련 증언이 남아 있다. 당시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때, 신부는 손에 작은 금 항아리를 들고, 그 속에 물을 채워 여러 번 김건순의 이마에 물을 찍어 바르면서 성경을 외우는 것을 이희영 자신이 직접 입회하며 목격했노라고 말한 것이다. 세례를 행한 장소는 송현(松峴) 홍익만의 집이었다.
달레는 정약종이 김건순 요사팟과 협력하여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순서 있고 체계 있게 설명하는 「성교전서(聖敎全書)」의 저술에 착수했다가, 책이 절반 정도 완성되었을 때 신유박해가 일어났다고 썼다. 이로 보아 김건순은 가문의 격렬한 반대와 차단에도 불구하고, 교계 핵심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뛰어난 문장과 식견을 바탕으로 정약종, 황사영과 함께 교회 내 최고의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주 교회의 부활절 부흥회
여주 교회의 성장도 대단했다. 특별히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 원경도, 정종호 등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중배는 이전까지 직선적 성격에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지녀 불의한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하던 협객이나 술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김건순을 따라 천주교인이 되어 마르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여주 읍내에 살던 원경도는 그의 사촌이었다. 이들은 모두 온 가족이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다.
1800년 3월 부활절 때 두 사람은 정종호의 집에 가서 함께 주님 부활 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이날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일종의 공개적인 부흥회를 열었던 셈인데, 전후로 달리 예를 찾기 힘들 만큼 참으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외교인의 신고로 이 소식을 접한 여주 목사 김희조(金熙朝)는 너무도 놀라 즉각 포졸을 보내 이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들은 결국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여주 감옥에 갇혔다. 이 일로 여주와 양근 일대에 검거 선풍이 불면서 양근의 정약종은 터전을 버리고 상경을 결심해야만 했다. 평소 이들의 기질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경도의 아우 원경신(元景信)과 원경도의 외종 김치석(金致錫), 처사촌 최재두(崔在斗), 최재두의 처삼촌, 그리고 윤유일의 부친 윤생원 등도 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후 이들은 10월까지 반년 넘게 감옥에 있으면서 보름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아, 일부 배교를 선언하고 풀려났지만, 대부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히 옥중에서 이중배가 행한 치유의 은사는 이제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병이 모두 나았으므로 그가 갇혀 있던 여주 감옥은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병자들의 행렬에 옥문이 무슨 장마당 같았다고 했다. 관속 중에서도 무거운 병을 나은 사람이 여럿 있었으므로 관장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놀란 옥졸들이 의술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독특한 처방은 없소, 천주를 섬기기만 하면 되오, 의술을 배우고 싶은가? 먼저 천주를 믿으시오.” 옥졸들이 책이 다 탔는데 어찌 배우는가 묻자, 이중배는 “내 마음속에 타지 않은 책들이 있다네. 얼마든지 가르쳐 주겠네.” 그의 이 같은 질병 치유 능력은 종교적 이적 외에 앞서 본 술사(術士)로서의 그의 역량과도 무관치만은 않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해가 바뀌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01년 3월 13일 다시 여주로 끌려와 읍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원경도가 28세, 이중배와 정종호는 50세가량이었다. 여주 교회는 김건순을 정점으로 한 상당히 조직적이고 충성도가 높은 신앙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