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74. 윤지헌과 주문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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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29
윤지헌, 주문모 신부의 비선 책임자이자 저구리 교회 지도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4. 윤지헌과 주문모 신부
2021.11.14발행 [1637호]
▲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북경에 보낸 청원서에 조선 신자 5인 대표로 이름을 얹었을 만큼 핵심 중의 핵심이었으며, 황심을 뽑아 보낸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황심 토마스- 북경에 보낼 백서’. |
주문모 신부와의 상시 채널
이존창은 저구리 깊은 산골에 주문모 신부를 모셔두고 이곳을 한국 교회의 총본부로 자리매김할 생각이었다. 신부가 한양에서 첫 미사를 올린 것은 음력으로 1795년 2월 16일이었고, 첫 지방 사목 방문 길에 오른 것이 4월이었다. 주 신부는 1월에 한양에 들어온 뒤 한 달 정도 준비 과정을 거쳐 주님 부활 대축일 첫 미사를 드렸고, 이후 한 달 반 남짓 사목 활동을 이어 가다가 지역 순방 길에 올랐던 셈이다.
1795년 4월 초순경 서울을 떠난 신부 일행이 호남 땅에 이르러 맨 처음 묵은 곳이 바로 저구리 이존창의 집이었다. 신부는 이곳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렀다. 윤지헌은 이때 주 신부 앞에 나아가 감격적인 세례를 받았다. 이후 신부가 이종사촌 유관검의 집으로 옮겨가자, 윤지헌은 그의 집으로 가서 다시 신부 곁에 머물렀다.
주 신부는 이존창과 유관검의 집에 근 1주일씩 머물며 세례와 성사를 주었다. 신부의 지방 체류가 예상외로 길어지고, 아예 보내지 않으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되자, 그새를 참지 못해 윤유일과 최인길이 서울에서 다시 내려와 신부를 모시고 상경했다. 고산 저구리로 신부를 모시려 했던 이존창과 전주에 붙들려 한 유관검, 그리고 서울로 다시 모셔 간 윤유일과 최인길의 움직임을 통해 당시 교회 수뇌부 안에서 주문모 신부를 모시는 주체를 두고 미묘한 줄다리기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이후로도 윤지헌은 매번 상경 때마다 그토록 비밀에 싸여 일반 신자들은 존재조차 알기 어려웠던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1801년 3월 28일의 공초에서 윤지헌은 서울 사람 현계온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난 적이 있고, 1800년 봄에는 강완숙의 집에서, 그해 11월에는 정약종의 집에서 신부를 각각 만났다고 진술했다. 그는 교회 일로 상경할 때마다 신부와 만났다. 그가 당시 교회 수뇌부의 핵심 그룹에 속해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진술 중에 윤지헌은 자신이 술을 끊지 못해 주 신부에게 십계명을 어겼다고 꾸지람 받았던 일과, 제사 지내는 일로 신부에게 꾸중 들은 일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그가 제사를 지냈고, 술 마시며 속인처럼 생활한 사정을 말해 자신의 죄를 경감해보려 한 뜻에서였지, 실제로 제사를 지내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795년 4월, 전주 체류 당시 주 신부는 윤지헌을 통해 유관검에게, 1793년 지황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 은자 400냥을 받아왔는데, 이것을 현금으로 바꾸지 못해 쓰지 못하고 있다면서 돈 200냥을 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 「사학징의」의 유관검의 진술에 나온다. 꺼내기 어려운 돈 문제를 굳이 윤지헌을 통해 전달한 것을 보면, 주문모 신부의 윤지헌에 대한 신뢰가 보인다. 「추안급국안」 속 유관검의 공초에는 집을 사기 위해 300냥을 빌리자 했다고 하여 조금 다르게 진술했다.
상경 직후 발생한 한영익의 밀고
주문모 신부가 유관검의 집을 떠나 상경한 것은 4월 하순 경이었다. 대개 20일 남짓한 여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 사목 방문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서울 계동 최인길의 집으로 돌아온 신부는 세례와 성사를 주며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과도한 의욕과 잠깐의 방심이 곧바로 큰 화를 불렀다. 귀경한 지 보름도 채 못된 5월 11일에 진사 한영익의 밀고 사건이 터졌다. 신부는 이때 정약용의 극적인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 신부를 모시고 있던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 세 사람은 당일 의금부로 비밀리에 끌려가 이튿날 새벽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조선의 엄격한 법 집행 절차상 이같은 처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당시 정부가 달아난 신부의 소재를 파악하려 했다면, 잡을 때까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매를 맞다 죽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입을 막으려고 죽인 것에 더 가까웠다. 당시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 이들의 죽음에 대해 철저히 함구한 것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이는 자칫 중국 정부와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극적으로 계동을 탈출한 주문모 신부는 남대문 안쪽 수각교 인근에 있던 강완숙의 집 뒤란 장작광 속에 숨어 목숨을 겨우 건졌다. 전후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필자의 앞선 책 「파란」에서 상세하게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제 막 서광이 비쳐들던 조선 교회는 이 일로 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주 신부는 강완숙의 장작광 속에서 석 달간 꽁꽁 숨어 지냈다.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쓴 내용이다.
신부의 손발이 완전히 묶인 채로 앞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든든한 후견인들도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 신부가 기댈 곳은 지방 교회의 지도자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연락은 원활치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주문모 신부는 전주 쪽에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7월에 강완숙이 시모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세례명 이로수(二老叟: 아녜스)를 설득해 안채로 신부의 거처를 옮긴 직후였을 것이다.
주문모 신부의 편지는 1795년 7월에 전주 유관검에게 도착했다. 편지를 들고 온 사람은 자를 운서(雲瑞)라 하는 송복명(宋福明)이었다. 당시 신부의 편지는 북경 천주당에 사람을 보내려 하는데, 편지 심부름을 보낼 믿을 만한 사람을 천거하고 비용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유중태는 즉각 윤지헌을 청해서 주 신부의 전갈을 알렸고, 윤지헌은 북경에 보낼 심부름꾼으로 황심을 천거했다. 유항검ㆍ유관검 형제와 당질 유중태가 다시 400냥의 돈을 마련해 신부에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1795년 겨울 동지사행에는 시일이 촉박했던 데다 강화된 감시망으로 인해 황심을 사행단에 합류시키지 못했던 듯하다. 다시 속절없는 한 해의 시간이 더 흘렀다.
대박청래 청원과 5인의 대표 서명
황심은 이듬해인 1796년 겨울에야 북경에 들어가 주교와 만났다. 당시 북경 교회에서는 1795년 조선 입국 직후 연락이 두절된 주문모 신부를 거의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미 붙잡혀서 순교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터에, 신부의 사목 보고와 조선 신자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해서 보낸 청원서를 받았다. 신자들의 청원서는 주문모 신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의 사목 현황 보고에 더해 신자 대표들의 청원서를 첨부함으로써 북경에서의 더 강력한 후속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박청래(大舶請來), 즉 서양의 큰 선박을 조선에 보내 종교탄압을 멈추고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압박을 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 형제와 윤지헌 등에게 이같은 탄원서를 작성해서 보낼 것을 반복해서 요청했다. 이들이 글쓰기에 어려움을 호소하자 답답해진 주 신부는 자신이 편지를 대필해서 초고를 보내왔다. 「추안급국안」에는 이들이 써보낸 청원서의 문장이 좋지 않다며 신부 자신이 직접 고쳤다고 조금 다르게 적혀있다. 신부는 대박청래를 자신이 아닌 조선 교회의 중의로 요청하는 모양새를 갖추려 했다. 유관검은 「사학징의」 속 공초에서 주문모 신부가 자신들에게 보내온 편지의 초고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신부를 모셔온 뒤로 나라에서 금함이 지극히 엄하여, 조그만 나라에서 편하게 지낼 길이 전혀 없는지라, 성교 또한 이 때문에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양의 큰 배가 나오기를 청하여 한바탕 결판을 낸 뒤라야 신부가 편안하고 성학을 행할 수 있겠습니다.(중략) 만약 큰 배를 맞이하여 온다면 나라에서 금지하는 것이 분명히 느슨해져서 우리의 도를 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국의 임금에게 부탁하여 원시경(遠視鏡) 같은 물건을 가져오고, 폐백을 후하게 마련하여 반드시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 ‘늘 귀국의 소문을 사모하였으나 성교가 없음이 유감스러우니, 우리나라의 성학에 독실한 자를 배에 태워 내보내면 틀림없이 성교가 크게 행해질 것입니다. 먼 곳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유항검 형제와 윤지헌 등은 신부의 지시에 따라 이 초고를 다시 옮겨 적어 유항검, 유관검, 유중태, 윤지헌, 최창현 등 5명이 연명하여 서명한 뒤 황심을 통해 1796년 겨울 북경에 보냈다. 「추안급국안」의 유관검 공초에는 황사영의 이름도 올랐던 듯이 써 놓았다. 뒤에 황사영 백서로까지 이어져 역모의 파장을 불러온 이른바 ‘일장판결(一場判決)’의 논의가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이같은 탄원이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이때까지 이들은 짐작할 수 없었다. 최창현 외 4인이 모두 전주와 고산 쪽 인물이었던 점은 당시 주문모 신부의 동력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1797년 봄 황심이 들고 온 주교의 답장은 이랬다. “큰 배가 나오기를 청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나, 다만 물길로 몇만 리나 되는 아득히 먼 곳의 일이라, 이는 이른바 어리석은 자는 행할 수가 없고, 지혜로운 자는 망령되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 임금이 비록 열심히 있더라도 어찌 준비해서 보낼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신부를 잘 지켜 보호하고 성교를 널리 행하기만 삼가 바라노라.” 한 마디로 대박을 청해오는 것은 턱도 없는 이야기니, 딴생각 말고 신부를 잘 보호해서 전교에 더 노력하라는 원론적인 지침이었다.
윤지헌은 당시의 공식 기록상에서 그 위치와 비중이 크게 높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교회가 북경에 보낸 청원서에 조선 신자 5인 대표로 이름을 얹었을 만큼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윤지헌은 황심을 뽑아 보낸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는 고산 저구리 지역 교회를 책임 맡은 지도자였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에 서신을 보내는 연락망을 관리하고 실무를 진두지휘한 비선 책임자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곁에서 220년 만에 팔다리가 잘린 채 발굴된 그의 유골이 당시 교계 내 그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