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78. 이합규와 서소문 신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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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33
교리 가르치고 세례 베푼 ‘교주’… 「사학징의」 전체에 49회 등장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8. 이합규와 서소문 신앙공동체
2021.12.12발행 [1641호]
▲ 이합규는 황사영과 함께 당시 서울 교회를 대표하는 평민 지도자였고, 서소문 인근 사창동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수장이었다. 사진은 서소문 순교 성지 순교자 현양탑. 가톨릭평화신문DB |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준 걸출한 교주
「사학징의」 중 한신애 아가타의 공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자는 중인으로는 이용겸(李用謙: 이합규)과 김심원(金深遠)이고, 양반 중에서는 정광수와 황사영 진사입니다.” 정복혜는 또 “이합규(李逵, ?∼1801)는 교주라 불렸고, 밤중에 혹 불러오기도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서울의 남자 교우 중에 서열이 가장 높은 네 사람 중 중인 신분으로 이합규와 김심원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런데 막상 이합규는 교회사의 여러 기록에 누락되어 오늘날까지 실제 위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용겸은 이합규의 다른 이름이다. 「추안급국안」 속 황사영의 공초에서는 이동화(李東華)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이용겸, 이합규, 이동화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워낙 비중이 높고 노출된 인물이어서 검거될 때를 대비해 여러 이름을 썼던 것으로 본다.
이합규는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저는 본래 반민(泮民)으로 도리어 사술을 배워 부녀자를 모아 남몰래 가르쳐 꾀고, 도처에서 세례를 주고, 주문모를 높여 받들어 김이우와 강완숙의 집에 맞아들여 한 세상을 속여 미혹시킨 죄는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의금부의 「형추문목」에는, 이합규가 천주교도 중에서도 교초(翹楚), 즉 걸출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음을 말하면서, 붙잡힌 뒤에도 공초를 바칠 때 주문모 신부의 호칭을 다른 이들처럼 ‘주가(周哥)’나 ‘주한(周漢)’ 또는 ‘문모(文謨)’라 부르지 않고 깎듯이 ‘주교주(周敎主)’로 호칭한 일로 따로 추궁을 받았다. 그는 배교하지 않았고, 1801년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사학징의」 전체에 그의 이름이 49회 등장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교계에서 그의 비중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신부를 대신해서 곳곳을 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기까지 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수행한 교주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교주라고도 했지만, 교종(敎宗)이란 호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교주는 지도급 신자 중 신부를 대신해 세례를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을 두고 일컫던 표현인 듯하다.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신부의 행적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던 신자들에게 직접 세례를 줄 수가 없었다. 이에 가성직 제도 당시처럼 그 역할을 위임받은 이른바 교주들이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학징의」에서 실제 교주란 호칭으로 불린 사람은 주문모 외에 유항검, 김범우, 덕산 송복명(宋福明), 최창현, 이합규 등이 있다.
서소문의 사창동과 현방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4월 2일(양력 5월 14일) 증거자 6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정철상 가롤로, 최필제 베드로, 정인혁, 이합규, 운혜와 복혜라는 두 여자였다. 끝의 네 사람은 공문서로 보존된 결안을 통해서만 확인되는데 그들의 본명은 알 수가 없다”고 썼다. 다블뤼의 비망기나 약전 중에 정인혁과 이합규, 윤운혜와 정복혜에 대한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합규는 지금껏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합규는 서소문 인근 사창동(司倉洞)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사창동은 오늘의 서소문동으로 인근에 선혜청의 새 창고가 있어서 신창동(新倉洞) 또는 사창동으로 불렸다. 선혜청은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의 중구 남창동에 있었다.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 바로 선혜청 창고가 있던 자리다. 창동과 북창동, 남창동 같은 지명이 모두 이 창고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합규의 부친 이인찬(李仁燦)도 열심한 신자였다. 이인찬은 전복(典僕)이었다. 전복이라 함은 조선 시대 각사(各司)와 시(寺), 성균관(成均館)ㆍ사학(四學)ㆍ향교(鄕校) 등에 딸려 잡역을 맡아 하는 공노비(公奴婢)를 일컫는다. 「사학징의」에서 목수 이춘홍(李春弘)은 이인찬을 현방(懸房)으로 불렀다. 현방은 국왕이 허가하여 국가가 공인한 소고기를 살 수 있는 곳이다. 도살한 소를 매달아 팔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그를 현방이라 부른 것에서 이인찬이 성균관 반민(泮民)만의 특권인 도우(屠牛) 즉 소 도살과 소고기 판매 등의 일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혹 현방은 반민(泮民)과 같은 의미로 썼을 수도 있다. 반민들은 공노비의 특수 신분이었음에도 자신들의 한시집인 「반림영화(泮林英華)」를 펴낼 만큼 식견이 높고 자부심도 있었다.
이합규의 신분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복(典僕)’ 또는 ‘반복(泮僕)’으로 나온다. 그는 성균관에 소속된 공노비였다. 1782년 11월 2일 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반예(泮隷)는 생업이 없는 궁한 백성과는 조금 다르다. 대개 현방에 기대는 바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들은 현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이들 부자가 실제로 현방을 운영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반민의 현방 운영 특권을 활용해 사창동에서 생계를 꾸려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창동 인근의 신앙 공동체
「사학징의」 속 등장인물 중 이합규 일가가 특별히 많다. 아버지 이인찬과 어머니 김조이, 외숙 김득호(金得浩), 외숙모 정분이(鄭分伊), 누나인 동녀(童女) 이득임(李得任), 정분이의 6촌 언니인 동녀 박성염(朴成艶) 등이 모두 이합규의 집안이거나 가까운 인척이었다. 동녀가 둘이나 포함되었을 정도로 모두 열심한 신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사창동 인근에 모여 살며 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다. 외숙 김득호는 서소문 안에서 짚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박성염은 4촌 형부인 선혜청 사령의 집 행랑채에 살고 있었다. 여기에 이합규에게서 세례를 받은 간지대 정복혜와 그녀의 오빠 정명복(鄭命福), 이합규가 혈당(血黨)으로 지목한 최봉득(崔奉得)과 이름을 모르는 김가(金哥: 김계완?) 등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사창동 구역의 신자들은 오늘날 남대문시장 자리에 해당하는 선혜청(宣惠廳)에 속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혜청 서리 조신행(趙愼行), 선혜청 사고지기(私庫直) 김춘경(金春景)의 처 유덕이(柳德伊)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존재를 통해 평민들이 중심이 된 사창동 신앙 공동체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힌다. 다산의 서제 정약횡과 그의 아내인 진사 한영익의 여동생도 사창동에 살고 있었다.
인근에는 현계흠의 약방을 비롯해 천주교 약방 카르텔이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었고, 과부들의 공부 모임 등 단위 조직으로 운영되던 소규모 공동체도 적지 않았다. 사창동과 회현동 등 남대문과 서소문 일원은 당시 천주교 명도회 조직이 가장 활성화된 구역이었다. 그리고 이 구역을 책임진 평민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합규였다.
정약종의 책롱 사건으로 일제 검거령이 내렸을 때, 강완숙은 황사영과 이합규, 김계완 세 사람을 용호영의 김연이 집으로 긴급 대피시켰다. 이합규는 황사영과 나란히 교회를 위해 보호해야 할 인물 1순위에 들어 있었다. 이들이 검거될 경우, 조선 교회가 받을 타격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합규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교리 교육을 전담했다. 특별히 그는 여성들과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한 교리 교육을 맡았다. 그의 강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문으로 된 「삼본문답(三本問答)」 1권과 언문 1권, 「진도자증(眞道自證)」 2권, 한글본 「성교일과(聖敎日課)」 2권을 바탕으로 교리 교육을 진행했다. 그의 교리 지식수준이 상당했다는 뜻이다.
사학매파 3인방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 중 정복혜가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포교와 연락책의 역할을 맡았던 사학 매파 위에 이합규가 있었다. 한신애가 자기 집안의 노복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려고 굳이 이합규를 밤중에 청해온 것을 보면, 사학 매파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을 이합규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합규는 최필제를 통해 입교했다.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이합규가 자신의 혈당이라고 지목한 사람이 여럿 있다. 최필제, 김현우, 이국승, 정복혜, 한신애, 정광수, 현계완, 변득중, 이인채, 곽진우, 정명복의 관련 기록 속에 이합규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교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이합규는 2월 초에 형조와 포청의 검거령을 듣고 김이우의 집에서 은신할 일을 모의했고, 강완숙에게 편지로 상의하자, 강완숙은 황사영이 먼저 피신해간 용호영 김연이의 집으로 이들을 보냈다. 며칠 뒤 검거망이 바짝 죄어오자 이들은 최가의 집과 이인채, 곽진우의 집을 거쳐, 반촌으로 달아났다. 3월 1일에 외숙 김득호 내외가 상황을 알아보려 반촌으로 이합규를 찾아갔고, 이튿날 강완숙의 여종 소명이 합류했다. 이합규는 이때 기찰 포교들에게 부친 이인찬과 함께 검거되어 형조로 끌려갔고, 세 사람은 간신히 달아났다. 이합규는 한 달 뒤인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이합규는 황사영과 함께 당시 서울 교회를 대표하는 평민 지도자였고, 서소문 인근 사창동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수장이었다. 주문모 신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수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의 교리 교육을 맡아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만은 주교주(周敎主)로 깎듯이 예를 갖춰 대답했고, 끝내 배교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의 신분 때문이었을까? 여러 사람의 공초가 이합규의 교회 내 위상을 가지런히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의금부에서조차 그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함께 달아나 숨었던 황사영이 붙잡히지 않았음에도 그를 바로 죽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가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자료집’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은 너무 한 처사다. 당시 그의 위상이 결코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