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83. ‘주님의 기도’ 어떻게 바쳤을까 - 뜻 모르고 한자음으로 외웠지만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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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38
뜻 모르고 한자음으로 외웠지만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3. ‘주님의 기도’ 어떻게 바쳤을까
2022.01.16발행 [1646호]
초기 교회의 기도 생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기도문을 어떤 방식으로 바쳤을까? 「사학징의」 끝에 수록된 「요화사서소화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압수품목 중에 기도 생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물품은 염주(念珠), 즉 묵주다. 십자패가 달린 묵주가 한신애의 집에서 4꿰미, 오석충의 집에서 3꿰미, 윤현의 방구들 밑에서는 8꿰미, 김희인의 집에서도 6꿰미나 쏟아져 나왔다. 정섭과 정광수, 김조이의 집 압수물품 목록에도 묵주가 어김없이 들어있다.
여주 김건순의 무리에 속했고, 원경도의 외종으로 포도청에 끌려온 김치석은 이렇게 진술했다. “1798년 정월에 원경도가 저에게 사학을 하라고 권유하면서 책 3권과 베껴 쓴 5, 6장의 첩책(帖冊) 1권, 염주 한 꿰미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와서 배워 익혔습니다.” 충청 감영의 공문 중 여사울 최구두쇠와 송윤중 관련 기록 속에도 묵주가 등장한다.
사학죄인의 압수품목 가운데 묵주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기도 생활에서 묵주기도가 대단한 비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천주경’과 ‘성모경’은 당시 모든 신자들이 일상으로 외워 암송한 가장 기본적인 기도문이었다.
앞서 김치석은 5, 6장 분량의 첩책 1권을 원경도에게서 묵주와 함께 받았다고 했다. 첩책이란 두꺼운 종이를 병풍처럼 접어서 펼쳐볼 수 있게 만든 휴대용 책자다. 옷소매 안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袖珍本) 크기로 만들면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어, 보관과 휴대가 간편했다. 첩책에는 ‘오배례(五拜禮)’와 ‘천주경’과 ‘성모경’이 첫머리에 나오고, 그밖에 ‘종도신경(宗徒信經)’과 아침 저녁 기도 등 주요 기도문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요화사서소화기」 속 압수 품목 중에는 유독 한글로 베껴 쓴 작은 첩책이나 낱장의 종이가 많았다. 특별히 윤현의 방구들 밑에서 나온 물품 중에 낱장의 종이에 베껴 쓴 것들이 더욱 많았다. 한글로 베껴 쓴 작은 종이가 300여 장에다가, 작은 종이에 사서를 베껴 쓴 것 300여 장, 그리고 보자기 세 개에 베껴 쓴 쪽지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중에는 책자로 만들려고 베껴 써놓고 미처 묶지 못한 것도 있고, ‘천주경’과 ‘성모경’ 같은 기도문을 낱장에 베껴 쓴 것도 있었다. 한신애의 집에서 나온 「제송초(諸誦初)」도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문을 베낀 것이었다.
‘천주경’과 ‘성모경’ 독송법
신유박해 이전 시기의 기도문은 한글이 아닌 한문 기도문을 음으로 독송하는 염경(念經) 기도 방식이었다. 대부분 의미를 모른 채 음만 따라 읽었다. 독송법은 오늘날 불교 신자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방식과 똑같았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과 같이 뜻을 모른 채 한자음으로만 읽는 것과 한가지다.
1798년 6월 12일에 충청도 정산 고을에서 체포된 순교 복자 이도기 바오로는 글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신문하는 관장에게 천주의 가르침을 끝까지 굽힘 없이 증언하다 순교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는 또한 초자연적인 지능을 받은 것 같아서 천주교 기도문의 아름다움을 아주 유식한 사람들보다도 더 잘 음미하였다”고 썼다. 이도기는 글을 몰랐지만 소리를 통해 기도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의미까지도 깊이 빨아들였다는 뜻으로, 이는 당시 이들의 독송이 아름다운 가락을 지닌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진술이기도 하다.
또 1800년 3월 여주에서 순교한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도 부활절을 맞아 “모두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외우고 나서,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하였다”고 썼다. 이들에게 기도문은 기쁘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였던 것이다.
윤민구 신부가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낸 한글본 ‘천주경’이 있다. 이 기도문은 1790년 윤유일이 북경에 갔을 때, 그곳 로(Raux) 신부의 요청에 따라 「수진일과(袖珍日課)」에 수록된 ‘천주경’에 조선에서 기도하던 방식대로 한글 독음을 달아서 써준 것이다. 로 신부는 한글 매 글자 옆에 한글음을 알파벳으로 받아 적었다. 그 정황은 사진 아래쪽에 적힌 메모에 자세하다. ‘천주경’ 원문을 일부 당시 표기를 반영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재천아등부쟈(在天我等父者) 아등원(我等願) 이명현성(爾名見聖) 이국임격(爾國臨格) 이지승행어지(爾旨承行於地) 여어천언(如於天焉) 아등망(我等望) 이금일여아아일용량(爾今日與我我日用糧) 이면아채(而免我債) 여아역면부아채자(如我亦免負我債者) 우불아허함어유감(又不我許陷於誘感) 내구아어흉악(乃救我於凶惡) 아믕(亞孟)
당시 신자들은 ‘천주경’ 즉 ‘주님의 기도’를 위 한문 독음 그대로 또는 한문에 한글 토를 붙여서 읽었다. 예를 들면 “재천아등부자자(아), 아등원, 이명현성(하시고), 이국임격(하시며), 이지승행어지(를) 여어천언(하나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독송하였다.
‘성모경’의 독송 또한 ‘천주경’처럼 한글 독음으로 읽었다. 「수진일과」의 한문 표기를 일부 당시의 발음을 반영해서 적으면 아래와 같다.
야우마리아(亞物瑪利亞) 만피에라지아쟈(滿被額辣濟亞者) 주여이해언(主與爾偕焉) 여중이위찬미(女中爾爲讚美) 이태자여수(爾胎子耶) 병위찬미(倂爲讚美) 천주성모마리아(天主聖母瑪利亞) 위아등죄인(爲我等罪人) 금기천주(今祈天主) 급아등사후(及我等死候) 아믄(亞孟)
「수진일과」의 기도문 중 처음 “야우마리아(亞物瑪利亞) 만피에라지아쟈(滿被額辣濟亞者)” 부분은 한문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중간에 끼어있는 라틴어 발음을 음차한 어휘들 때문이다. 원문은 “Ave Maria, gratia plena’이다. ‘아물(亞物)’은 ‘야우’로 읽는데, ‘아베(Ave)의 음차다. 또 ‘액랄제아(額辣濟亞)’는 ‘에라지아’로 읽으니, 라틴어의 은총 또는 성총의 의미인 ‘그라치아(gratia)’의 음역이다. 이 대목이 뒤에 「천주경과(天主經課)」에 실린 ‘정모경(貞母經)’에서는 “신이복마리아(申爾福瑪利亞), 만피성총자(滿被聖寵者)”로 바뀌었다. 위 ‘액랄제아(額辣濟亞)’가 ‘성총(聖寵)’으로 대체되었다. ‘신이복(申爾福)’은 ‘아베’ 즉 ‘기뻐하소서’를 풀이한 표현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가락에 맞춰 암송하는 이 같은 염경(念經) 기도 방식으로 초기 교인들은 묵주기도를 바쳤다. 뜻 모를 한자음의 조합이었지만, 몸을 앞뒤 또는 좌우로 흔들며 가락을 타고 외우는 ‘천주경’과 ‘성모경’의 리듬 속에는 거룩한 말씀의 아우라가 뭉클한 빛이 되어 소리를 타고 흘렀다.
한글 기도문의 출현
1838년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 로마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기도문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담겨 있다.
“천주교가 들어온 시초에 조선 신자들은 자기 재능에만 심취하여 조선말을 경시하는 생각으로 조선말이 천주께 기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그 뜻까지 번역하지는 않고 뜻은 전혀 모르는 채 발음만 조선식으로 하여 바쳤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도 책을 보지 않고 말만 들으면 전혀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조선말을 배우자마자 네 명의 통역을 데리고 공동 기도문들을 번역하여, 지금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유식하든 무식하든 모든 신자들이 열심히 배우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조선의 신자들은 중국의 「수진일과」와 「천주경과」 등에 실린 한문 기도문을 조선식 한자음으로 뜻도 모른 채 독송하는 방식으로 기도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번역된 한글 기도문을 현대어를 반영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 네 나라가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면하여 주심을 우리가 우리게 득죄한 자를 면하여 줌 같이 하시고, 우리를 유감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또한 우리를 흉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앞서 단음으로 된 한문 기도문을 염불하듯 염송하다가, 이처럼 한글로 번역된 기도문이 생기면서 독송 방식에도 변화가 왔을 것이 당연하다. 신자들은 비교적 긴 호흡의 글을 읽을 때 쓰던 가사창의 염송법을 끌어와 적용해, 예전 연도의 가락과 같은 낮고 그윽한 메나리토리의 가락을 얹었을 것으로 본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메기면서 화답하는 기도가 오랜 기간 가락을 타고 입에 익어 고저장단에 박자가 착착 맞게 되었을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당시 조선어로 된 ‘성모경’을 함께 염송하는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다. “주일날, 회원들이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들을 때의 나의 감격은 참으로 깊습니다. 나는 모든 국민의 이같은 협력, 즉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기 위해, 모든 나라 말로 부르는 이 노래를 생각합니다. 착하신 어머님이, 그렇게도 많은 나라에 널리 내려주신 수없는 은혜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에도 긴 역사가 숨 쉰다. 뜻 모르고 한자음만으로 외우면서도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하였다. 일자무식의 백성이 기도문의 염송을 통해 초월적인 지혜를 얻어 장강대하의 웅변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잔혹한 고문을 견뎌 기쁘게 순교했다. 그것은 은은하고 잔잔한 가락이다가 어느새 고조되어 높이 솟아 천상의 선율이 되곤 했다. 그 선율 속에 천주 강생의 신비가 아련히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