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7) 바치챠의 ‘예수 이름의 승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7) 바치챠의 ‘예수 이름의 승리’
예수님이 비추는 찬란한 황금빛이 모두에게
- 바치챠, ‘예수 이름의 승리’(1685년), 예수 성당 내 중앙 본당 천장, 이탈리아 로마.
트렌토 공의회는 여러 면에서 교회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줬다. 공의회 이후에 선출된 교황들의 개혁 의지도 교회가 쇄신하고 변화된 생활을 하는 데 동력이 됐다. 우선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는 1569년 잘츠부르크 지역 시노드 소집을 독려했고, 「로마 교리서」를 출판했으며 「성무일도서」를 통합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사용한 「미사 경본」을 개정했다.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는 로마를 비롯한 교구 신학교 설립을 장려했고, 교황 대사에게 더욱 교회다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의 수단이 되게 했다. 특히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예수회 인재들의 지원을 받아 교회 개혁의 동력으로 삼았다.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1908년까지 유효했던 보편 교회와 교황청의 중앙 행정을 개혁하고, 주교들에게 앗리미나(ad limina, 사도좌 방문)를 의무화했다.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과 예수회
오늘 주제와 연관해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과 예수회 관계에 주목해 보기로 하겠다. 그레고리오 13세는 1576년 루뱅대학교 교수로 있던 예수회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1542~1621)를 로마로 불러 콜레지움 로마눔 부설 교황청 학원재단 변증학회 회장직을 맡겼고, 2년 후(1578년)에는 예수회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를 초대해 달력 개혁을 준비했다. 독일인 수학자며 콜레지움 로마눔 교수로 있던 예수회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1538~1612)와 시칠리아 출신의 의사며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주세페 스칼라(Giuseppe Scala, 1556~1585)의 연구를 토대로, 1582년 가톨릭 국가들의 제후와 대학교수들의 동의를 얻어 달력 개혁을 단행하는 교서 「중대한 일 가운데(Inter Gravissimas)」를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인 ‘그레고리오 달력’이다.
그 시기에 그레고리오 13세의 정책도 예수회도 크게 진일보했다. 교황은 콜레지움 로마눔에 보조금을 지원해 예수회 교육기관을 증축, 교육 정책을 체계적으로 펴나가도록 했고, 예수회는 인근에 별도의 땅을 확보해 대학교를 완성했다. 1584년 10월 28일에 축복식을 가진 이 학교를 ‘그레고리아노 최고 학부이자 그레고리아노 대학교(Archiginnasio Gregoriano e Universit Gregoriana)’라고 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헌정한 오늘날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이다. 이런 소식은 즉시 선교지로 전해졌고,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선교 활동에 임하는 선교사들을 고무하는 원동력이 됐다. 동시에 선교지에서도 수도원과 함께 교육 사도직을 위한 학교가 지어졌다. 이는 로마 교회가 지역 교회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회에 관해, 앞서 바치챠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1540년 종교 개혁의 불길이 한창 타오르던 시기에 설립됐다. 종교 개혁은 가톨릭교회의 성인 공경과 각종 이미지를 통한 신심 활동에 제동을 걸었고, 예수회는 설립과 동시에 예술과 영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함께 말씀과 이미지 간의 대화와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바오로 3세 교황도 예수회 설립을 승인하는 교서에서 “영적으로 무장되고, 교육 사도직과 문화 방면에 이르는 깊은 인식을 두루 갖춘” 교회 내 단체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문화 방면에 이르는 깊은 인식’을 위해 예수회는 예술에 관한 원칙과 토대를 마련하고,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단행한 전례 개혁과도 보조를 맞췄다. 공의회 개혁에 담긴 규범에 따라, 성당 건축과 장식에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이정표를 제시했다.
예술과 학문, 교육 발달 이끌어
예수회는 교육기관만 세운 것이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기준도 마련했다. 오늘날 거의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무 교육 과정에 있는 교육 프로그램은 16~17세기 예수회 교육지침서(Ratio Sudiorum)에서 마련한 것이다. 중세기 인문학 중심의 커리큘럼에 인문과학을 추가한 것은 예수회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의 업적이다. 예컨대, 예수회 교육 과정에서 수학 지식은 신학 과정에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자연 질서는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기획되고 만들어졌기에,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의 위대함을 탐구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보았다. 수학은 철학, 음악과도 연결돼 있어, 다른 순수 학문이나 응용 학문에 기초가 됐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예술’이었다.
따라서 예수회 전통에서 인문학을 토대로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의 인문과학을 습득한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건축,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자질 있는 회원을 양성하고, 그들을 선교 현장에 투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의 예수회 총원 콜레지움 로마눔 옥상에는 천체 관측소가 있었고, 퀴리날레에 있던 성 안드레아 수련소에는 예술 분야의 선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별도로 있었다. 당시 예수회 화가들의 작품도 많았다. 그 흔적은 오늘날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시실 한 공간이 거의 모두 예수회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될 때, 바티칸은 예수회 총원을 압수했고, 그때 가지고 온 예술 작품들이다.
예수회 3대 보르자 총장은 설교할 때, 이미지를 폭넓게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그것을 음식에 맛을 더하기 위해 사용하는 ‘향신료’에 비유했다. 피렌체 출신으로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의 제자 조반니 바티스타 피암메리(Giovanni Battista Fiammeri, 1530~1606)와 아브루쪼 지방 아퀼라 출신의 주세페 발레리아노(Giuseppe Valeriano, 1526~1596)는 예수회에 들어와 로마의 예수 성당 장식에 투입됐고, 베르나르도 비티(Bernardo Bitti, 1548~1610)는 선교사로 선발돼 페루로 파견됐다. 말씀 텍스트에 삽화를 넣은 시리즈물도 나왔다. 예로니모 나달(Jernimo Nadal, 1507~1580)의 「복음 이야기 도해집」이 대표적인데, 이것은 중세기 문자를 모르는 백성에게 이미지로 성경 내용을 가르치던, ‘가난한 이들의 성경(Biblia pauperum)’의 새로운 버전이었다.
예수회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리스도교 신앙 논쟁에 관한 토론」(15811)과 「거룩하고 속된 이미지에 관해서」(1594년)에서 프로테스탄트인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겨냥해 우상 숭배라고 비난한 것에 맞서 이미지를 통한 신심을 더욱 강하게 옹호했다. 그 시기에 추기경은 ‘천사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그의 가르침이 널리 보급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유럽의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에서 천사들이 넘쳐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회 설교자 올리바(Gian Paolo Oliva)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와 절친했다. 그는 제노바에 있던 바치챠(Giovan Battista Gaulli, Baciccia로 알려짐, 1639~1709)와 예수회원 포쪼(Andrea Pozzo)와 스페인 출신의 화가 보르고뇨네(Borgobnone)를 로마로 불러 예수회 성당들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고, 장식을 의뢰했다. 이 시기에 포쪼가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예수회 선교 활동의 은유’를 그렸고, 오늘 소개하는 바치챠가 예수 성당 천장에 ‘예수 이름의 승리’를 그렸다. 푸생, 틴토레토, 다 바싸노, 베로네세, 솔리메나, 루카 조르다노, 카를로 마라타, 구이도 레니,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무릴로 등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던 당시 예술가들은 예수회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베르니니의 지지 얻어 예수 성당 장식
환상적인 이 작품이 교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종교 개혁의 칼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가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흔적은 이 작품 하나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레스코화를 그린 화가 바치챠에 대해서는 지난번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12호 5월 9일 자 참조>에서 간단히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기선 작품에 관련한 것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제노바 출신의 화가 바치챠가 로마에 온 것은 1657년이다. 그는 로마에 오자마자 베르니니의 눈에 띄어 그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베르니니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거장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 중 한 사람이 됐다. 이 작품은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제단 뒤쪽 앱스에 만든 ‘성 베드로 좌’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했다. 그는 예수 성당에서 돔과 중앙 천장을 장식하면서, 베르니니가 설계한 성 베드로 좌에 버금가는 회화와 조각의 정수를 남기고 싶었다. 베르니니도 적극적으로 권했고, 나중에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 결과 그가 바란 대로 이 작품은 그에게 불후의 명작이 됐다.
그림 속으로
작품의 주제는 ‘예수 이름의 승리’다. 바로크 양식을 완전히 통합한 17세기 원근법적 환상주의 기법으로 배경을 장식했다. 바로크의 최고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화가는 가장 높은 데서 황금색의 빛이 발산되는 눈부신 자리에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IHS(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세주 예수)를 배치했다. 예수회의 문장이다. 거기에서 발산되는 빛은 점차 그 아래 있는 모든 인물에게로 퍼진다. 가운데 교회, 성인과 동방 박사들이 있고, 아래에 죄와 이단과 허영의 우화들까지 밝히고 있다. 주변에는 그림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힌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7월 18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