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6) 무명화가의 삽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6) 무명화가의 삽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세속 권력은 잃고 교황의 영적 권위를 얻은 공의회
- 칼 벤징거 저, 「1873년 비오 9세 교황에 관해서」에 나오는 ‘1869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삽화.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교황령의 위기
1800년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운동(Risorgimento)의 격변 속에서, 그보다 더 큰 격변을 겪은 것은 반도의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운명이 바뀐 교회 국가였다. 그 시기에 성 베드로 사도 다음으로 긴 시기(32년간) 교황으로 재임한 비오 9세(재임 1846~1878)는 1854년 12월 8일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Dogma dell’Immacolata Concezione)’를 선포하고, 이어서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두 가지 교회의 일은 시대적인 정황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맥락에 있었다. 당시 교황령의 행정은 국무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이 맡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리소르지멘토’가 진행 중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3걸 중 한 사람인 카부르(Camillo Benso Cavour, 1810~1861)는 반도의 통일을 쟁취하고 자유로운 정책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과 피에몬테 정부의 패권 장악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민족통일운동주의자들과 영국과 같은 반(反) 교황청 세력과도 손을 잡아야 했다.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시키려는 정책으로 교황청과 대립했고, 로마의 병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청의 세속 지배권을 빼앗는 대신 왕국 내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종교 활동의 자유와 연금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 왕국의 교섭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원 제도의 병폐를 비난하며 계속해서 교회 행정에 관여했다. 비오 9세는 1864년 12월 8일 회칙 「전적인 돌보심(Quanta cura)」과 거기에 덧붙인 ‘오류표(syllabus errorum)’를 통해 종교무차별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실증주의를 포괄하는 근대주의를 비난하며 그런 성격의 정부와는 협력할 수 없다고 했다. 1866년 7월, 급기야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원 해산에 관한 법률, 종교단체의 재산 국유화, 성직자들의 재산 몰수와 매각 등을 놓고 교황청과 재차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말이 교섭이지, 실제로는 1859년에 롬바르디아, 1866년에 사르데냐와 나폴리 왕국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교황령 침공을 앞두고 있었다.
공의회를 소집하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약화된 상태에서 1848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혁명’, 리소르지멘토 운동으로 교황령이 통일 이탈리아라는 국가 건설에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계몽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혁명가들이 외치던 반(反) 가톨릭, 반(反) 교황 분위기까지 고조되던 시점에서 소집됐다. 사실 1563년에 트렌토 공의회가 폐막된 이후, 1864년 12월 6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예고하기까지 약 3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트렌토 공의회에 힘입어 교회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계몽주의와 각종 혁명과 운동, 이념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세상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1864년 비오 9세 교황은 교회의 가르침에 상반되는 내용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80여 개 항목의 ‘오류표(Syllabus)’를 작성해 시대적인 위험 요소들을 지적했다. 거기에는 자연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유리주의(唯理主義), 자유주의와 맹목적 진보주의 등이 포함됐고, 신앙을 위협하는 오류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1867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예고했다. 그리고 1869년 12월 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개최했다.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개막식에 참석한 교부들은 모두 1050명 중 774명이었고, 관련 학자와 전문가들까지 1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교들 외에도 미국과 영국은 물론,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주교들까지 참석했다.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주교들이 참석한 건 공의회 역사상 처음이었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각국 군주들의 사절단 형태가 아니라, 모두 나름의 자율권을 갖고 참석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예정된 날짜에 맞추어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점이었다.
공의회는 준비위원회를 거쳐 올라온 51가지 안건을 의결했는데, 거기에는 주교와 공석인 주교좌, 성직자의 생활과 규율, 교리서 및 신앙과 이성 등 교회와 교의에 관한 6가지 안건이 포함됐다. 특히 주교의 권한과 관련해 공의회의 최대 의제로 떠오른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세계사와 교회사에 새긴 중대한 사건이 되게 했다. 이것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며,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세계 교회와 모든 교구에서 완전한 주교권, 곧 ‘수위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무류성’은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해 사도로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교회 동의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르칠 수 없고 변경될 수 없다는 것으로, 신앙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공격받을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의결사항이었다.
공의회 교부들은 헌장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1870년 4월 24일)을 통해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논의를 거듭했고, 의결사항을 규정한 「영원하신 목자(Pastor aeternus)」을 통과시켜(찬성 533, 반대 2) 신앙의 윤리적인 차원은 물론 세계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문제를 정리했다.
가톨릭출판사 운영하며 가톨릭 문학 발전에 공헌
소개하는 작품은 스위스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출판업을 하던 칼 벤징거(Karl Benzinger, 1854~1937년)가 쓴 「1873년 비오 9세 교황에 관해서」에 나오는 ‘1869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라는 제목의 삽화다.
칼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아인지델른의 기업가이자 가톨릭출판사의 4대 공동 소유주이며 상업이사였고, 슈비츠(Schwyz)의 오랜 귀족 가문의 후손인 모친 덕분에 가족은 아인지델른과 슈비츠에 집과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칼은 슈비츠의 마리아 힐프 기숙학교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인지델른으로 와서 수도원 학교에 다녔다.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영국과 이탈리아를 장기간 여행했다.
1875년 22살에 그는 아인지델른의 가족 사업에 합류했다. 이후 40년 넘게 스위스 출판업계에 큰 자취를 남기고, 당대 가톨릭 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하인리히 페더러(Heinrich Federer)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을 지원했고, 외국 문학을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1916)의 소설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가톨릭출판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했고, 그의 집은 저명한 예술가와 작가는 물론 고위 성직자들도 북적였다. 1924년 출판사의 광범위한 조직 개편이 있자 스스로 가장 먼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났다. 1937년 83세의 일기로 슈비츠의 헤렌가쎄에 있는 별장에서 생을 마쳤다.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 발표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가 발표(1870년 7월 18일)된 다음 날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에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이 철군하면서 로마가 위태로워졌다. 1870년 9월 1일 공의회 교부 120명은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일주일 후 이탈리아 군대는 교황령을 침공했고, 9월 20일 로마가 함락되면서 교황령은 붕괴했다. 교황은 공의회를 중단했고, 다시 열리지 못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성만 강조 혹은 맹신하여 계시의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반대로 신앙만을 내세우고 인간 이성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신앙주의의 오류를 극복함으로써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했고,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것으로 공의회 우위설에 기반한 갈리아주의나 페브로니우스주의 같은 오류들에 제동을 걸고 교황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후 교황은 세속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되어 통치 기반이 사라졌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확고하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세속 군주가 아니라, 교회와 세계의 영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던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7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