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60: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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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60: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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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0)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


국경 · 민족 초월해 인류애 선물한 베네딕토 15세 교종

 

 

피에트로 카노니카,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1928년), 성 베드로 대성전, 바티칸.

 

 

본당 사목 경험이 가장 많은 교종으로 알려진 비오 10세에 이어 반 가톨릭주의와 반 성직주의가 만연하던 통일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자코모 델라 키에사가 ‘베네딕토 15세’라는 이름으로 1914년 9월 3일 교종으로 선출됐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제노바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외교 경험이 있었다. 자코모 델라 키에사의 교회 내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자 레오 13세 교종의 최측근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과 비오 10세 교종을 대립 관계에 놓았던 당시 언론의 행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오 10세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를 주교로 선임했고 서품식을 직접 집전했다. 비오 10세 교종은 자기가 쓰던 목장(牧杖)과 주교 반지를 그에게 선물로 주고 볼로냐대교구를 맡겼다. 델라 키에사 주교는 사목 방문과 강론에 공을 들였고, 기금을 마련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데 앞장섰으며, 신학교 교육에 인문 과학과 고전을 추가해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 반전 메시지 선포

 

1914년 8월 20일 비오 10세가 선종하자 바로 콘클라베가 소집됐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이어서 추기경단은 이런 위기에 세계를 짊어지고 갈 교종은 외교력이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레오 13세 시절부터 외교 경험이 많은 볼로냐대교구장 델라 키에사 추기경을 10여 차례의 투표 끝에 선출했다.

 

예상대로, 그는 전쟁을 ‘유럽의 자살 행위’로 단정, 단호하게 반대했다. 교종으로 선출되던 해 그는 교전국들에 성탄 메시지를 보내 종전을 촉구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라 그런지 공감을 표했고, 영국도 그런대로 바티칸과 잘 지내고 있어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부각돼 평화를 중재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교종에 의한 평화는 무조건 거부한다”며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베네딕토 15세는 더욱 균형 있는 외교로 교전국 간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연합국과 동맹국 누구도 베네딕토 15세의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1917년 8월 1일 베네딕토 15세는 다시 한 번 모든 교전국의 수장에게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를 제안했다. △무력ㆍ폭력이 아닌 법적 권리에 의한 평화 수립 △교전국 동시 군비 축소 △국제 문제를 해결할 중재재판소 설치 △항해의 자유와 공공성 보장 △전쟁 배상금 제도 철폐 △점령 지역 반환 △영토권에 대한 우호적인 검토 등이었다.

 

이런 제안에 영국,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약간 호의적이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성의껏 작성해 보내왔다. 독일은 모호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교종의 제안서는 모두 무시된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 전쟁 종결을 위한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 원칙의 토대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평화를 위한 교종의 외교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류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종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활동은 후임 교종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시기, 물밑에서 조용히 외교를 펼친 비오 12세,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핵전쟁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에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반포하며 세계 평화에 큰 힘을 쏟았던 요한 23세, 학생 운동과 베트남 전쟁으로 세계 대변혁 시기 바오로 6세, 이라크 전쟁 시기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유증 치유에 앞장

 

전쟁은 종식되고 나서도 큰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교종은 이후 당사국 정부들과 협상을 벌여 포로 교환 및 부상병과 포로들의 귀환을 주도했고, 점령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의 교환, 전사자들의 시신 송환, 전쟁 포로와 가족 간의 상봉,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과 행불자 수색, 망명자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등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유럽이 승자와 패자로 갈려 전쟁의 비극이 계속되는 일이 없도록 염려하고 경고했다.

 

그는 전쟁을 ‘무익한 대학살’로 규정하고, 세계 각국의 화해를 호소하는 회칙 「평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Pacem, Dei Munus Pulcherrimum, 1920)」를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시에 전사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무덤 앞에서 베네딕토 15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전시됐다. 오늘 소개하는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기념비는 피에트로 카노니카(Pietro Canonica, 1869~1959)의 1928년도 작품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 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마주 보고 있는 ‘세례 경당’을 거쳐 ‘스튜어트 기념비’를 지나면 성 비오 10세 제단이 있는 경당이 있다. 이 경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를 이끌었던 베네딕토 15세 교종의 이 기념비가 있다. 지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무덤 경당(옛 성 세바스티아누스 경당)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사실주의 조각가

 

카노니카는 피에몬테주 토리노 근처 몬칼리에리에서 태어나 당시 이름난 조각가 오도아르도 타바키의 조수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후에 조각가며 작곡가로 20세기 전반기 이탈리아에 많은 역사적인 작품을 남겼다. 17살에 ‘수련 수녀’라는 작품으로 상을 받으면서 사실주의 조각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땅 파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등은 사실주의 맥락에서 칭송을 받았고, 도나텔로 조각에 영감을 입어 그리스도 연작, 곧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는 회화적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작곡가로서 그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고, 몇몇 오페라 작품도 남겼는데 ‘코린토의 신부’, ‘메네아’, ‘거룩한 땅’, ‘미란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20세기의 전위 예술에 편승하지 않고, 낭만주의와 르네상스 미술을 고수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종교 미술에 헌신했다. 잠시 아카데미아 교수를 지냈고,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아 회원이 된 첫 번째 회원 중 한 사람으로 무솔리니에 의해 직접 임명됐지만, 파시즘에 대한 유착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보르게제 공원 내에 있는 작은 빌라를 자비로 수리해 사용 허락을 받아서 살다가 사후 그곳을 그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으로 로마시에 기증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되었다.

 

 

인도주의 정신 실천

 

베네딕토 15세 교종은 계몽주의 시대부터 일어난 ‘신의 외면’과 이성에 대한 맹신을 우려해 왔다. 그리고 그 이성이 결국 자행한 건 유럽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형제들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었다. ‘무익한 대학살’인 전쟁은 그것을 결정한 국가와 정부의 수반들이 직접, 물리적으로 고통을 겪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무고한 백성들의 몫이다. 힘없는 약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도 큰 데 반해, 수반들은 무장 해제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냉소적이었다.

 

교종은 그런 백성을 돕기 위해 국경, 민족, 종교를 초월해서 기구를 만들고 전문인력을 파견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에는 고통이 경감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세속의 군주들과는 달리, 2000년 교회사에서 체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듯, 감동적인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했다.

 

2005년 라칭거 추기경이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교종으로 선출됐을 때, 그는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활동을 떠올렸다. 9ㆍ11 사태 이후 세계는 여전히 긴장 국면에 있었고, 여전히 많은 적을 만들어 싸우고 있었다. 그가 ‘베네딕토 16세’로 이름을 선택한 이유였다.

 

베네딕토 15세의 이런 업적은 그가 선종했을 때 터키의 이슬람교도가 앞장서 기렸다. 이스탄불 시내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이다. 교종의 박애 정신을 기리며 “비극적인 세계에서 국가와 종교를 초월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위대한 교종”이라는 헌시를 새겼다.

 

 

작품 속으로

 

오늘 소개하는 이 작품도 교종의 이런 정신을 잘 담았다. 무고한 희생자와 전사한 어린 군인들을 위해 전 유럽에는 엄청난 공동묘지가 세워졌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밖에 없다. 교종은 선두에 있는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공동묘지로 바뀐 유럽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뭇가지로 양쪽을 장식했다. 동상 위에는 화염에 휩싸인 세상을 아기 예수에게 보여주는 마리아가 있다. 교종은 마리아를 처음으로 ‘평화의 모후’라고 부르며, 인류를 의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14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 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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