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17. 최초의 반서학 통문과 효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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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29
“우리도 잡아가라! 속히 육신을 버리고 영원한 천당에 오르고 싶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7. 최초의 반서학 통문과 효유문
2020.09.06발행 [1579호]
▲ 「사학징의」 부록으로 실린 추간지 을사춘 감결과 뒤에 실린 효유문 원문 스캔 자료. |
통문은 어떤 내용을 담았나?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유야무야되려 하자, 성균관 진사 이용서(李龍舒)와 정서(鄭) 등이 나서서 통문을 돌렸다. 다만 이들은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성명은 감추고 밝히지 않았다. 「벽위편」에 수록된 통문은 이러했다.
“근래 들으니, 서양 것을 가져온 종자 5, 6인이 도적 떼처럼 모임을 맺어 도장(道場)을 설치하고 그 법을 강론하다가, 도장의 주인이 구속되어 형벌을 받게 되자, 5, 6인이 제 발로 추조에 나아가 같은 벌을 받기를 청하며, 오로지 속히 육신을 버리고 영원히 천당에 오르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부형이 금하여도 소용이 없고, 벗들이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다만 저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빠뜨릴 뿐 아니라, 젊은 축 중에 조금 명성이 있는 자는 문득 자신들이 그들 무리와 동학이라 일컬으며, 여럿이 공공연하게 이름을 적어내기까지 했다. 추조에서 그들의 음흉하고 현란한 계책을 받아들이려 하므로, 우리가 만약 눈을 똑바로 뜨고 용기를 내서 힘껏 함께 성토하지 않는다면, 타오르는 불길이 들판을 덮고, 졸졸 흐르던 물이 하늘에 넘쳐, 말류의 폐해가 장차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것보다 크게 될까 염려한다.”
“우리도 같이 잡아가라! 속히 육신을 버리고 영원한 천당에 오르고 싶다.(願速棄形骸, 永上天堂.)” 권일신 등 6인이 추조에 와서 했다는 말이다. 부형의 금지와 벗들의 만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글 속의 ‘젊은 축 중에 조금 명성이 있는 자’는 바로 정약용과 이승훈을 지목한 말로 보인다. 다산은 1784년 정조의 중용 강의에 제출한 답안으로 1등을 차지한 뒤 단연 두각을 드러내 촉망받은 인재로 꼽히고 있었다. 이때 다산은 이벽의 도움을 받아, 마태오 리치의 논의를 끌어와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풀이해 정조 임금의 큰 칭찬을 받았었다.
문제가 꼬이자 추조에 출두한 6인 외에 다산 등 젊은 축들까지 연명(聯名)하여 자신들도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는 것이다. 이에 문제가 너무 커질 것을 염려한 형조판서 김화진이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 이 문제를 덮으려 하므로, 자신들이 분연히 일어나 이 통문을 돌리게 되었다고 썼다.
당시 명례방 집회 참석자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정면돌파를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역모 사건과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굳건한 호교(護敎)의 붉은 열성에서 나온 것인지는 가리기가 어렵다.
달레의 오독과 문체의 과잉
한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또 이때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곧이어 두려워하는 마음이 서울과 인근으로 퍼졌다. 태학생(太學生) 정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는 통문을 돌려, 자기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완전히 절교하라’고 강요하였다. 1785년 3월에 돌린 이 문서는 천주교를 공식으로 공격하는 첫 번째의 공문서로 알려져 있다.”
달레의 이 문장은 위 정서 등이 쓴 통문을 오독한 것이 분명하다. 본래의 원문은 친척과 친구들에게 절교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친척과 친구들이 그들에게 천주교 믿는 것을 그만두라고 만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오독은 다블뤼 주교가 당시 척사와 관련된 1차 자료를 불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해당 원문의 맥락을 잘못 이해한 탓이다. 다블뤼의 1차 오역을 바탕으로 작성된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가 그 오류를 답습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한 가지 한문 텍스트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화려한 불어식 수식이 덧붙어 문체의 과장이 엿보이는 것도 이 책을 읽을 때 가감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자기들 언어의 결로 가공된 불어 원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 한문 원본 텍스트와는 두 번 멀어진 글이 된다. 여기에 더해 용어에 대한 부족한 이해도 문제다. 달레는 당시 정서의 신분인 ‘태학생’에다 ‘왕의 스승인 학자’라는 풀이를 달아놓기까지 했다. 고작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을 왕의 스승 역할을 맡은 최고 학자로 본 것이다.
한편 뒤늦게 이 소동을 알고 대경실색한 것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다산의 부친 정재원이었다. 한창 과거 시험 공부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던 자식들이 천주학에 깊이 빠진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크게 놀라 즉각 자식 단속에 들어갔다. 직접 죄를 묻고, 친지의 집안을 돌면서 제 입으로 잘못을 말하고 다니게 했다. 이승훈의 부친은 이승훈에게 척사문(斥邪文)을 지어 스스로 배교를 선언하게끔 했다.
당시 역모 사건을 처리하던 김화진은 문제의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튀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남인 명문가에서는 자칫 역모로 비화되어 집안의 명줄을 죌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에 자식들이 연루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어쨌거나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누르고, 당시 역모로 가파르게 상승하던 정국의 힘을 빌려, 을사년의 추조적발 사건은 그럭저럭 가라앉았다.
형조의 효유문
그렇다고 형조 판서 김화진이 아무런 조처 없이 그저 사건을 종결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실린 ‘을사년 봄의 감결(乙巳春甘結)’ 끝에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曉諭文)이 실려 있다.
“근래에 서양학이 허황한 얘기를 펴고 화복을 주장하나, 그 말의 황탄함과 가리키는 뜻의 속임수는 불교의 곁길로 난 별파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 책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 육신과 영혼 등의 주장은 불경스럽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아! 저 하늘은 아득하고 멀어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건만, 어찌 일찍이 본뜰 수 있는 형상이 있어서 이에 감히 사람의 모습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예수라고 부르면서 개인의 집에서 이를 받들어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린단 말인가? 오만하게 모독하는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정의 어리석고 미혹된 무리가 그 책을 간직해두고 그 화상을 받드는 것을 한꺼번에 불태워 없애 말끔히 씻어내어, 그들로 하여금 법을 범하는 뜻이 없게끔 하나하나 알게 하려 감결 5부를 보낸다.(仍以禁西學, 曉諭坊曲曰: ”近來西洋學, 架鑿空虛, 主張禍福, 辭語之荒誕, 旨意之隱詭, 不過釋家之旁蹊別派, 而其書所言天堂地獄, 肉身靈魂等說, 可知其不經之甚也. 噫! 上天玄遠, 無聲無臭, 曷嘗有形體之可以摸像者, 而乃敢圖畵人像, 呼稱耶, 奉之私室, 加以頂禮, 慢瀆之罪, 孰大於是? 坊曲愚迷之類, 藏其書而奉其像者, 一幷燒毁淘洗, 無使犯科之意, 一一知悉, 捧甘五部.)”
천당지옥설과 육신과 영혼에 대한 주장을 특정해서 비판했고, 하늘을 인격신으로 보아 사람의 형상으로 그려놓고, 사실(私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예배한 것이 큰 죄가 됨을 밝혔다. 서학책은 불태우고, 예수 화상은 보이는 대로 없애라는 지침이 처음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원문 끝의 ‘봉감(捧甘)’은 공문서를 접수하라는 뜻이다. 당시 전국의 행정단위별로 각 5부씩의 효유문이 하달되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실록과 「일성록」 등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언급을 삭제해 버렸다.
이후로도 천주교 관련 사건 기록은 늘 이런 식이 많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사건 당시에도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잡혀 와서 그날로 물고를 당해 죽었지만, 당일 이들 기록에는 아예 사건 자체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추조적발사건은 3월 말 「정감록」 역모 사건의 뒤처리 과정에 묻혀 그럭저럭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엉뚱하게 남인 성호학파의 한 축을 떠받치던 안정복(安鼎福, 1712~1791)에게 남은 불똥이 튀었다. 안정복은 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하기 넉 달 전인 1784년 12월에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편지를 써서, 이가환과 정약전, 이승훈과 이벽 등의 이름을 지목하며 경박한 연소배들이 서학을 창도하는 데 두 사람이 끌려다니는 것을 지적했다. 이들은 모두 권철신과 이기양의 가까운 벗 아니면 문도들인데, 두 사람이 이를 금하여 눌렀다면 어떻게 이들이 함부로 날뛸 수 있겠느냐고 나무랐다. 결국, 금하여 누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파란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안정복의 이같은 편지에 이기양이 거칠게 반발했고, 뒤미처 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안정복의 이같은 행동이 같은 남인을 재앙 속으로 몰아넣는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이라며 강력하게 대들었다. 이후 같은 남인들 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당시 74세의 노인이었던 안정복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공서파와 신서파의 길고 긴 전쟁으로 이어질 줄은 당시 이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