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백합화 같은 유섬이 처자
한 송이 백합화 같은 유섬이 처자
꽃밭정이 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문광섭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의 유섬이 처자묘소를 가려고 한 것은 작년 가을 가톨릭센터에서 신앙문화유산 해설사 강의를 듣고서부터였다. 송천성당순교자현양회는 5월 15일, 요셉회서는 그 다음 주 24일에 갔었다.
밤잠을 설쳤다. 그동안 담고 있었던 환영이 끝없이 펼쳐졌다.
210여 년 전, 아홉 살 어린 소녀가 전주감영에서 거제도까지 끌려가는 모습이 어른거리며 눈동자를 연신 눌렀다.
전주에서 자동차로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를 지나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달려도 3시간 걸리는 거리다.
거제까지 어느 길로 갔을까?
지름길은 내 고향 장수 가는 길로 가야 한다.
완주군 곰치 재를 넘고 진안 마이산(馬耳山)을 지나며, 육십령 재를 넘어 함양 진주로 빠져야 하는데 첩첩 산길이라 어려웠을 것이다.
임실, 남원, 운봉을 거쳐 함양, 산청으로 내려갔으려니 싶다.
음력 10월 13일 전주를 떠나 10월 중순에 거제 관아에 이르렀다 하니 4~5일 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역죄수는 오랏줄에 묶이고 개 끌 듯 끌려서 간다.
유배자는 두 손을 묶고 달구지에 실려 변방 오지로 가서 일정한 장소에 유폐된다. 유섬이는 어떠했을까?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관아로 끌려간 뒤,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어린 두 동생마저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으리라!
비록 나이는 어려도 단아(端雅)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였다고 교회사에 나와 있다.
어디서 그런 강단과 당찬 모습이 나왔을까?
아마도 아버지의 교육과 이순이 올케언니의 단정하고 정결한 모습을 평소에 깊이 새겼을 것 같다.
성당을 떠난 버스는 완주 IC를 벗어나자 신나게 달렸다.
지금은 폐도로가 된 곰치 재, 그 위로 솟은 만덕산 허리를 힘차게 돌아 나갔다.
멀리 모악산이 보이고 군산 앞 서해도 구름과 닿아있었다.
지난해 호남교회사연구소 이영춘 신부님의 열띤 강의에 몰입된 나는, 호수에 빠진 사람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물위에 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동정부부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에 가려 유섬이는 이름조차 잊고 있었다.
한데 기적같이 세상 밖으로 나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와 두 오빠, 큰 올케언니, 사촌 오빠, 다섯 분에 대한 교황님의 시복을 3개월 앞둔 2014년 5월 초 유섬이 묘소가 전주교구에 알려졌다.
주교님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달려갔음은 물론이다.
나 같은 사람조차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흥분했는데, 주교님과 교회사 대가인 김진소 신부님이야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었으랴?
송곡마을에 들어서니 안내 이정표가 보였다.
가슴이 뛰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하얀 칼라 교복의 여학생을 보려고 P초등학교에 가던 길처럼 신선하고 설렜었다.
풍산유씨 제실 건너 편, 나지막한 산기슭 봉분은 내려앉아 형체만 있고 70cm 크기의 자연석 묘비만 조용하니 반겨 주었다.
150여 년의 풍상 속에서도 오늘을 기다린 듯하고, 묘비석의 하얀 빛깔이 상념 속으로 투영(投影)되면서 흰 백합화로 피어났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 부끄러 조용히 고개 숙였네
가시에 찔릴까 두려함인가 / 고개를 숙인 양 귀엽구나 “
(김성태 작사, 작곡 – ‘한 송이 흰 백합화’의 2절 일부)
‘유 처자 묘(柳處子墓)’라는 묘비가 세상에 나오는 데는 몇 분의 공로자가 있다.
1801년 신유사화(辛酉士禍)때, 아버지 유항검을 비롯한 온가족이 사학[天主敎]을 금하는 국법을 어겨 모두가 순교했으나, 유섬이(9세)와 동생 일석(6세), 일문(3세) 세 형제는 나이가 어려서 법에 따라 노비로 각각 유배를 갔었다.
이때 섬이는 거제부 관아로 갔다.
당시 거제부사 이영철(李永喆)은 아직 어리고 양반집 자식이라는 배려로, 내간리에 홀로 사는 노파에게 수양딸로 보내주었다.
이후 양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돕고 배우면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자라온 터라 용모와 품위가 있어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나이 13~14세 되어 중매가 들어왔으나 동정녀(童貞女)로 살겠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거절했고,“내가 자식을 낳으면 모두 노비가 될 것이니 내 어찌 견디겠소?” 라고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양모 역시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호하며 서로 의지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처신이다.
유섬이의 나이 16~17세 때, 양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니 강폭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큽니다.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해주소서.”
하니,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해주었다.
이는 양어머니가 종교적인 면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음을 짐작케 한다.
섬이는 이때부터 정결(貞潔), 청빈(淸貧), 순명(殉命)을 서약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수도하는 봉쇄수도원의 수녀처럼 사는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40여 세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왔으니 봉인된 삶이 25년여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서의 삶도 항상 한 자 길이의 칼을 몸에 지니고 자기 몸을 보호하고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일찍이 그 정절(貞節)을 알고 경외심에 유 처녀(柳處女)라 불렀다고 한다.
1863년 7월, 나이 71세로 선종하게 되는데, 당시 거제도호부사 하겸락이 이임하려던 참이었다.
부사는 깨끗한 정절로 고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고고한 삶을 살아온 그녀를 모른 체할 수 없어 모든 장례비용을 내려, 내간리 송곡마을 뒤편에 그를 안장케 했했다.
이는 하겸락(河兼洛, 1828 - 1904) 부사의‘사헌유집(思軒遺集) 권3’잡저 서유록(西遊錄),‘부거제(附巨濟)’편에 유섬이의 삶을 기록해 놓아 그 생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또한 ‘제거제 유 처자 문(祭巨濟柳處子文)’에 유섬이의 생애를 추모하는 추도문 형식의 57행 제문(祭文)도 함께 실려 있어 읽어 보았다.
구구절절하여 눈물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하겸락 부사의 후손으로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하성래 선생이 없었다면 무한한 세월을 보냈을 뻔했다.
이 모두가 예비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다.
구름만 잔뜩 낀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흩날렸다.
‘동정녀(童貞女)인 유 처녀’의 회한(悔恨)과 반가움에서 나온 눈물이려니 싶었다.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후렴)
나도 모르게 목 안에서 작은 소리로 흘러나왔다.
몇 번을 뒤 돌아보아도 하얀 묘비석은 버스를 탈 때까지 시야에 들어 왔다.
고려장을 하고 돌아오는 불효자처럼 가슴이 메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2016. 05/15, 05/24.)
⚫시복(諡福): 로마 교황이 성인(聖人) 이전, 중간단계로 내리는 복자품(福者品)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하거나 모범을 보인 고인에게 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