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2) 젠틸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2) 젠틸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
비잔틴을 지키고 싶은 간절한 눈빛
- 젠틸레 벨리니,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동·서방 교회의 일치 모색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의 몰락 사이에서 동ㆍ서방 교회의 일치를 모색한 인물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는 성대하게 진행됐고, 화려하게 마감됐다. 다뤄야 했던 의제 중 종교 측면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이 ‘동ㆍ서방 교회의 화해’였다. 공의회 분위기가 처음부터 잘 조성돼 결국 양측은 재결합에 합의 서명했다. 정치 측면에서의 논의는 비잔틴 제국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1439년 2월 15일 피렌체에 도착하면서 본격화됐다. 요안니스 8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위기에 처한 비잔틴 제국의 상황을 서방 국가들에 알리고 서구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정교회 입장에서는 로마 교회가 어쨌든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비잔티온(Byzantion) 땅에 세운 도시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운 ‘콘스탄티누스의 도시’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리적으로도 콘스탄티노플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천연의 항만 금각만(Golden Horn)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어도 8세기 이전까지는 한 형제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점차 생각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성상 파괴, 필리오퀘와 연옥 교리, 교황 수위권 등을 문제로 동ㆍ서방 교회는 갈라서게 됐다. 하지만 양측 교회 간의 끊임없는 일치에 대한 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분열된 역사를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 일치는 서로에게 필요했다. 1439년 7월 6일, 피렌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두오모)에서 그리스와 라틴 교회는 칙령 「하늘에 맡기노니(Laetentur coeli)」에 기꺼이 서명했다. 뒤이어 시리아 교회, 콥트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도 합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결국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해 오는 오스만 군대를 보며 서방의 도움을 얻기 위한 비잔틴 황제의 필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을 때, 그리스 교회 주교단의 3분의 2와 고위 서명 인사 31명 중 21명이 공의회의 결과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례와 신학의 전통을 포기하고 “교황의 ‘삼중관’에 복종하느니, 오스만의 ‘터번’을 선택하겠다”라고까지 했다.
여기에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라틴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촉발된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이탈리아)인 간의 오래된 민족 감정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1369년부터 콘스탄티노플 인근 에디르네(Edirne)를 수도로 정하고 유럽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 행정ㆍ상업ㆍ문화의 중심지로 이슬람 문명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의 노력, 3인 특사 파견
비잔틴 제국 내부에서 드러난 반(反) 라틴 정서를 주도한 사람 중에는 황제의 동생 디미트리오와 루카 노타라 대공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의 대표로 피렌체 공의회에 참가했던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1355~1452)과 바실리오스 베사리온(1403~1472)은 종교의 통합만이 희망이자 피난처라며, 오스만의 위협으로부터 유일하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공의회 결정이 폐기되고, 동ㆍ서방 교회의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재위 1431~1447년)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교황은 포기하지 않고, 정교회가 꺼리는 라틴인이 아니라 독일인 젊은 신학자 니콜로 쿠사노(1401~1464)를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이 세 사람을 간단히 언급하면, 플레톤과 베사리온은 그리스 학문의 옹호자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실용주의적 애국자였다. 플레톤은 피렌체 공의회에 참가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로마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며 플라톤적인 신학의 우수성을 역설해 서방 교회 교부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가 보여 준 학자적 인품과 지성, 품위는 특히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치하는 계기가 됐다.
베사리온은 정교회 총대주교로 공의회 폐막에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과 요안네스 8세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정교회 연합의 선언문을 낭독한 바 있다. 교황은 그를 깊이 존경했고,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직함을 부여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쿠사노를 도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28명의 주교를 이끌고 가톨릭교회로 왔다. 그때 정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던 초대 교회의 많은 중요한 사료를 싣고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들어와 라틴 교회에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초대 교회 동방의 사료들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로마의 열두 사도 기념 성당 내 베사리온 소성당에 묻혀 있다.
니콜로 쿠사노는 비잔틴 교회가 라틴 교회에 가진 묵은 감정과 불신, 거기에 제4차 십자군 전쟁의 트라우마까지 있어 로마에 순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황 특사이기 전에 철학, 신학, 법학, 천문학 분야의 학자이며 변호사요 외교관이었다. 그는 비잔틴 신자들을 구하는 것 못지않게 비잔틴 문화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재위 1449~1453)의 궁정 분위기는 차가웠고, 그가 내놓은 최후의 제안은 외면당했다. 그런 중에도 쿠사노는 직접 보고 접한 동방의 풍부한 유산들을 모두 기록했고, 이후 서구 사회에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가 손대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었다. 그로 인해 르네상스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플레톤과 베사리온과 쿠사노의 간절함은 비잔틴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로마의 수도로 소아시아의 진주 같은 도시, 빛나는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지닌 콘스탄티노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베네치아 학파 대표 인물
소개하는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대표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이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가 그린 ‘참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이라는 제목이다. 여기서 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래서 흔히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이라고 한다.
젠틸레 벨리니는 베네치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버지 야코포와 동생 조반니 벨리니와 함께 온 가족이 화가이다. 이 그림은 1472년 사랑의 형제회에서 의뢰한 것으로 베사리온 추기경이 직접 기증한 유물함 뚜껑에 그린 것이다. 누가 언제 기증했는지를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사리온은 콘스탄티노플이 몰락한 후,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잊지 않게 하려고 유물을 사랑의 형제회에 기증했다.
젠틸레 벨리니는 1474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 초상 화가로 두칼레 궁 대회의실에 걸 도제(doge)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1479~1480년, 마호메트 2세의 요청으로 문화 외교관으로 파견돼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동ㆍ서양 관계에 관한 베네치아인의 탄력성, 상업적인 태도, 외교에서 예술의 기능 등을 말해주는 사례로 꼽고 있다.
그림 속으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십자가 고상을 둘러싸고 세 사람이 있다. 왼쪽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베사리온이다. 그는 서방 교회로 와서 베네치아의 사랑의 형제회에 가입했다. 그림 속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은 사랑의 형제회 두 지도자로 보인다. 회화 중앙이 많이 손상됐지만, 황금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양쪽에 수직으로 된 직사각형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일화가 묘사돼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세운 황제이고, 헬레나는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를 찾은 이다. 베사리온의 간절한 눈빛이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를 관통하며 비잔틴 제국을 세운 역사적인 두 인물을 떠올리는 것 같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7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