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7) 오라스 베르네의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 설계를 명하…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7) 오라스 베르네의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
걸작 성 베드로 대성전을 만든 ‘르네상스 주역들’ 한 자리에
- 오라스 베르네,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 1827년, 루브르, 프랑스 파리.
권력가 율리오 2세 교황과 어지러운 정세
말 많고 탈 많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보르자)의 뒤를 이은 사람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로 곧 율리오 2세 교황(Giulio II, 재임 1503~1513)이었다. 율리오 2세는 선임 알렉산데르 6세를 몹시 싫어했다. 공공연하게 “나는 보르자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율리오 2세도 만만치 않기로는 오십보백보였다. 알렉산데르 6세가 호색가였다면, 율리오 2세는 권력가였기 때문이다.
율리오 2세의 가문 ‘델라 로베레’는 대대로 전사 가문이다. 알렉산데르 6세 시절, 원래 교황령이었던 땅을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공작으로 앉힌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탈리아 북부 로마냐 지역인데, 율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체사레 보르자를 내쫓고 영지를 도로 빼앗아 왔다. 그러나 일부 도시들이 그 틈을 타 자치권을 들고 나오며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는 나름의 속셈이 있어 이를 수용했고, 리미니, 파엔차 등 몇 개 도시들이 베네치아로 넘어갔다.
율리오 2세는 원래 교황령이었음을 내세워 반환을 요구했으나 베네치아가 이를 거절하자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 구성된 반(反)베네치아 동맹 곧 ‘캉브레 동맹(Ligue de Cambrai)’을 조직했다. 이 동맹은 1508~1516년, 유럽의 국제 정세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오로지 전쟁을 위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캉브레 동맹 전쟁(Guerre de la Ligue de Cambrai)’으로 알려졌다. 동맹 초기에는 원래 의도대로 베네치아에 넘어간 영지들을 찾아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율리오 2세와 루이 12세간 관계가 틀어지면서 1510년, 사실상 동맹은 해체되었다.
그런데 율리오 2세 교황이 이번에는 프랑스에 맞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베네치아와 율리오 2세간 동맹은 ‘신성 동맹(1511~1513)’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잉글랜드, 구 스위스 연방까지 가세하여 확장되었다. 그 결과 1512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리품을 분배하는 문제로 베네치아와 교황이 합의를 보지 못하자, 이번에는 베네치아가 동맹을 깨고 프랑스와 친선을 맺었다.
이렇게 어제의 아군이 내일의 적군이 되고, 친선과 배신이 요동치는 속에서 ‘신성 동맹’에 한번 가입하여 교황 편에 섰다가 끝까지 교황 편으로 남은 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구 스위스 연방(Ancienne Confdration suisse)이었다. 오늘날 스위스의 전신이 되는 국가다. 율리오 2세의 삼촌이었던, 식스토 4세 교황(재임 1471~1484)은 헬베티아 연방(Confederazione Elvetica, 구 스위스 연방의 전신)과 동맹을 맺어 교황 호위를 맡겼었다. 알렉산데르 6세 시절 요란한 교황 때문에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에 맞서, 교황 영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발에 맞서,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 때문에 장화 반도에서 일어나는 여러 세력에 맞서 항상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런 역사를 잘 아는 율리오 2세는 교황 즉위 직후, 신변 보호를 구실로 ‘교황청 근위대’를 정식 창설했다. 스위스 연방과 체결하여 첫 용병대를 요청한 것이다. 1506년 1월 22일 폰 시레넨(Kaspar von Silenen, 1506~1517)을 지휘관으로 한 150명의 스위스 용병이 포폴로 성문(Porta del Popolo)을 통해 처음으로 로마에 공식 입성했다. 율리오 2세는 이들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런 인연으로 스위스 연방은 교황과의 신뢰를 중시했다.
예술과 문학을 후원한 교황
한편, 로렌조 마니피코의 사망과 무능한 그의 아들 피에로가 샤를 8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피렌체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하여 피렌체에서 쫓겨난 이래, 메디치 가문은 18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런데 1511년 베네치아와 교황 간 ‘신성 동맹’으로 이탈리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의 권력을 제한시키려고 했다. 거기에 손을 들어준 것이 피렌체였고, 피사에서 반(反)교황적인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뒤끝 작렬인 율리오 2세가 이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피렌체를 응징하기로 하고 그의 중요한 영지 프라토(Prato)를 쳤다. 피렌체에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지지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교황군을 지휘하던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레오 10세 교황)은 피렌체에 무혈 입성하여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율리오 2세가 이렇게 항상 싸움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역대 어떤 교황보다도 예술과 문학을 즐기고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렌체 르네상스를 로마로 옮긴 장본인이고, 그의 재임기에 브라만테(1444~1514),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모두 바티칸에 와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를 그렸고, 라파엘로는 바티칸 박물관 내 ‘라파엘로의 방들’을 그렸다.
율리오 2세는 화끈하고 솔직한 교황이었다. 그의 화끈한 면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솔직한 면 때문에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기도 했다. 볼로냐를 탈환(1506년)하고, 1년 전에 자신의 영묘 건설 문제로 틀어졌던 미켈란젤로를 볼로냐에서 재회하여 자신의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제안했으나, 율리오 2세는 성경 대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은 학자가 아니라 전사 집안 출신이고, 실제로 전사 교황이라는 것이다.
화가 가문, 19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
소개하는 그림은 루브르에 있는 작품으로 오라스 베르네 (Horace Vernet, 1789~1863)가 그린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1827)이다. 오라스 베르네는 프랑스인 화가며 최초의 사진 예술가였다. 그의 부친 샤를 베르네(Carle Vernet)도 석판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고, 조부 클로드 조제프 베르네(Claude Joseph Vernet)도 회화와 판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였다. 그러니까 오라스는 가업을 이은 화가였다.
오라스는 일찌감치 로마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원장을 지냈고,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방 전체를 자신의 그림으로 채워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는 그를 두고 “재치 있고, 사랑스럽고, 본성이 바르고 정직하며 충직하다. 활기가 있으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다”라고 평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명예로운 ‘레지옹 도뇌르(Lgion d’honneur)’ 훈장을 받고 1863년 74살에 사망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율리오 2세의 교황궁에는 같은 시기에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었다. 1508년 64살의 브라만테는 율리오 2세에게 두 사람을 천거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였다. 그는 라파엘로는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편애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싫어했다. 그런데도 천거한 이유는 프레스코화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미켈란젤로를 엿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때 라파엘로는 25살이었고, 미켈란젤로는 32살이었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활동할 때 스포르차 가문의 신망을 얻어 다빈치를 천거하여 명작을 남길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 삼총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브라만테와 인연이 있는 셈이다.
그림 속으로
작품에서 수염을 기른 율리오 2세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앞에서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대성전 설계도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브라만테 오른쪽에는 젊은 미켈란젤로가 있고, 왼쪽 설계도 앞에는 잘생긴 젊은 라파엘로가 자기가 그리던 ‘엘리오도로의 방’에 있는 ‘레오 대교황과 아틸라의 만남’ 스케치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그 밑에 의자와 왼쪽 끝에 등을 보이고 앉은 사람의 의자에 새겨진 교황 문장을 통해 지금 이 공간이 교황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을 꾹 다물고 설계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브라만테의 설명을 경청하는 교황과 그런 교황의 태도에 주목하는 미켈란젤로의 표정이 눈길을 끈다. 율리오 2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은 결국 이 세 사람의 업적으로 이루어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7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