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9) 요한네스 링겔바흐의 ‘1527년의 로마 약탈’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9) 요한네스 링겔바흐의 ‘1527년의 로마 약탈’
제후국의 로마 침략, 가톨릭 쇄신 운동의 단초가 되다
- 요한네스 링겔바흐, ‘1527년의 로마 약탈’, 개인 소장.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 교황에 이어 선출된 하드리아노 6세 교황(재위 1522~1523)은 루뱅대학교 출신의 네덜란드인이었다. 새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카를 5세가 어렸을 때, 그의 개인 교수를 했고,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고문이자 법정 대리인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이 된 지 1년 8개월 만에 사망했다.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의 사촌 동생 줄리오가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올랐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유럽에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상은 그의 꿈대로 돼 주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실세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였다. 두 강대국은 스페인을 두고 싸우다가 결국 프랑스에 넘겨준 뒤, 이번엔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스페인을 되찾아오는 것을 필두로 나폴리 왕국을 장악하고, 파비아 전투(1525년)에서 승리한 뒤, 점차 이탈리아 북부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1526년,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프랑스까지 참여시켜, 코냑동맹(1526~1530)을 결성했다. 교황이 주도하고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스포르차 가문)가 체결하고, 우르비노 공작이 동맹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신성로마제국군, 교황령 로마로 진격
이런 움직임에 분노한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보내 밀라노를 탈환하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황제는 곧장 로마로 진격을 명령했다. 지휘관 샤를은 제국군 2만 명을 이끌고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제국군에는 스페인 군사 6000명과 카를 5세가 고용한 란츠크네히트 용병 1만 4000명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두 개의 큰 용병 부대가 있었는데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 용병이었다. 스위스 용병이 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활동했다면, 란츠크네히트는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다. 스위스 용병들이 신의를 중시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포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던 반면에,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은 돈만 주면 적(敵)에게도 고용되고, 동포끼리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곧장 로마로 왔기 때문에 예상보다 길어진 전쟁에다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더욱이 이들 중에는 마르틴 루터의 반가톨릭 사상에 심취한 루터파 교도들도 많았다. 그들은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산지로 보고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는 종교적인 신념까지 갖고 있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카를 5세 황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점을 들어 설마 성도(聖都) 로마까지 군대를 투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종교적인 신념보다 자신의 권력 강화가 더 중요했고, 종교적인 신념은 역설적으로 그의 군이 갖고 있었다. 제국군이 로마 인근 도시 비테르보와 론칠리오네를 점령하고, 로마 성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교황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무참히 짓밟힌 로마
하지만 로마를 지켜줄 군대는 제국군과 비교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로마는 렌초 다 체리(Renzo da Ceri)가 이끄는 5000명의 군인과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 189명이 전부였다. 제국군은 자니콜로와 바티쿠스 언덕 쪽 로마 성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바티칸을 포위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이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휘관 샤를은 교황군을 이끌던 벤베누토 첼리니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용병들은 급료도 못 받은 상태에서 지휘관이 전사하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폭도로 변해버린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너진 성벽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육, 파괴를 자행했다. 신념을 가지고 자행하는 폭력에는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신부는 죽이고, 수녀는 강간하고, 성당은 파괴했다. 귀족들은 재물을 약탈당했고, 시민들은 붙잡혀 고문당했다. 사상자는 로마 시민만 4만 5000명에 이르렀다.
교황이 고용한 각 나라의 용병들은 완전히 기울어진 전세에 싸우기는커녕 도망치기에 바빴다. 하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목숨으로 맞서는 동안 교황은 무사히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피신했지만 189명 중 42명만 살아남았다. 교황은 남은 근위병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충성 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며,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근위병들은 계속해서 성 베드로 대성전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에 맞서 싸웠고, 결국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멘스 7세는 ‘천사의 성’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클레멘스 7세 교황은 후에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소성당의 제단화를 원래의 계획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의뢰하고 사망했다.
이탈리아풍 지향한 네덜란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한네스 링겔바흐(Johannes Lingelbach, 1622~1674)가 그린 ‘1527년의 로마 약탈’(17세기)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링겔바흐는 독일에서 태어나 12살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네덜란드의 로마파 화가며 에칭 화가로 알려진 카렐 뒤자르댕(1622~1678)의 화방에서 교습생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642년 프랑스를 거쳐, 1644년부터 6년 남짓 로마에서 살다가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하여 사망할 때까지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다.
링겔바흐는 이탈리아나이즌튼 회원이었다. 이는 17세기 북유럽에서 유행한 화가그룹으로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 중 이탈리아풍의 풍경화 양식과 기술을 접목한 네덜란드인 화가들을 일컬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혹은 이탈리아와 관련한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당시 이 그룹에 속한 화가들은 이탈리아, 특히 로마를 동경했다. 링겔바흐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후 그림 속에 삽입된 건물들을 빛과 원근법으로 웅장하게 표현함으로써, 크고 과감한 구도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풍경화를 넘어 항구와 전쟁 장면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마침표, 교회 개혁 시작
1527년 5월 6일, 로마는 신성로마제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르네상스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 재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로마는 7개월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여기서 교황은 그간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가톨릭 제후국가들이 품을 떠났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교황이 지배하던 가톨릭 국가들은 루터와 루터교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루터의 반박문이 비텐베르크에 붙은 지 정확하게 10년 만이다(1517년). 이 점에서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했고, 그것이 클레멘스 7세에 이어 즉위한 바오로 3세 교황 파르네세가 1545년에 개최한 트렌토 공의회였다. 가톨릭교회의 쇄신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가 약탈당할 때, 베로나의 주교 잔 마태오 기베르티도 로마에 있었다. 약탈자들은 그를 건물 안에 가두고 풀어줄 경우 주교관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그는 베로나로 돌아와 맹세를 지키며 죽을 힘을 다해 교구 개혁을 단행했다.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 성 가를로 보로메오의 교회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테아티니 수도회 설립자 잔 피에트로 카라파와 성 가에타노 디 티에네도 로마에 있다가 제국군에게 붙잡혀 수감, 고문당했으나 목숨만은 건졌다. 카라파는 훗날 바오로 4세 교황이 되어 역시 가톨릭교회 쇄신 운동을 이끌었다.
그림 속으로
배경 속 로마시는 짙은 안개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강 건너 멀리 성 베드로 대성전(당시에는 돔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이 강 동쪽의 막사 너머에 있는 피라미드보다 초라하게 보인다. 란츠크네히트 병사들의 막사 여기저기에는 약탈품이 나뒹굴고 병사들은 하나같이 빼앗아온 물건들에 집중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11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