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76. 김범우 토마스의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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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31
다블뤼 주교 “김범우 유배지는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 기록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6. 김범우 토마스의 유배지
2021.11.28발행 [1639호]
▲ 위 문서는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 가에 전해온 것으로, 김동엽이 근래에 밀양으로 유락해 들어왔고, 그가 그간 균청둔감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했음을 적고 있다. |
▲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
김범우의 입교와 정약용 집안
김범우(金範禹, 1751 ~1786) 토마스는 1786년에 유배지인 충북 단양에서 죽었다. 111년 뒤인 1897년에 편찬된 「경주김씨 정유보(慶州金氏 丁酉譜)」에는 김범우가 1787년 7월 16일에 죽었다고 해서 사망연도에 차이가 난다. 하지만 동생 김이우와 이승훈은 그가 1786년에 죽었다고 했고, 다블뤼도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이 나라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단양의 아전들은 그가 2년 뒤, 다시 말해 1786년에 사망했다고 말한다”고 하여 1786년 사망 사실을 확인하였다.
김범우는 부친 김의서(金義瑞, 1721~1774)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의서는 첩에게서 2남 1녀를 더 두었다. 서자인 김이우(金履禹, ?~1801)와 김순우(金順禹, 1775~1801)가 그들이다. 복자 김현우(金顯禹, 1775~1801)의 이름은 족보에 보이지 않는데, 김순우는 김현우의 고치기 전 이름이다.
김범우의 집안은 증조 대부터 역관직을 수행했다. 증조 김익한(金翊漢, 1646~1720)이 수역(首譯)으로 연행을 다녀왔고, 부친 김의서도 종 5품 역원판관(譯院判官)을 지냈다. 김범우는 영조 49년(1773) 역과 증광시에 2등으로 합격해서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가 되었다. 아버지 김의서가 1762년에 간행된 경주김씨 족보 편찬 비용을 모두 감당했으리만큼 그의 집안은 상당한 경제적 부를 갖추고 있었다.
김범우가 1784년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이벽, 정약용 형제와의 교분을 통해서였다. 김범우와 정약용은 척분이 있었다. 정약용의 서모(庶母) 우봉 김씨(1754~1813)는 다산이 12살 나던 해에 20세로 아버지 정재원의 측실이 되었다. 그녀는 당시 어머니를 잃고 투정만 부리던 어린 다산을 각별하게 보살폈고, 그녀에 대한 정약용의 애틋한 정은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에 자세하다.
김두현의 정리에 따르면, 다산의 서모는 김의택(金宜澤, 1690~?)의 서녀(庶女)였다. 그녀의 숙부 김성택(金聖澤)은 김범우의 증조부 김익한(金翊漢)의 손녀에게 사위로 들어갔다. 게다가 김범우의 재당숙 김취서(金就瑞)의 처가 다산의 서모와는 5촌 간이었다. 이래저래 얽히고 설킨 혼맥을 통해 김범우는 이벽, 정약용 등과 이웃하며 가깝게 지내다가 1784년 교회 출범기부터 신앙생활을 함께 시작했다.
단양(丹楊)과 단장(丹場)
1785년 김범우가 귀양 간 곳이 어딘지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어 왔다. 김범우의 도배지(徒配地)는 충청도 단양(丹楊)이지 밀양의 단장(丹場)일 수 없다. 밀양부 단장면(丹場面) 법귀리(法貴里) 7통 3호로 명시된 호구단자가 김범우 후손가에서 발견되고, 1989년 단장면(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사기점길 50-100)에서 김범우의 무덤을 찾았다고 알려지면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장이라는 주장은 더 큰 힘을 얻어왔다. 이는 나아가 김범우의 단장 유배를 계기로 경남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퍼졌다는 논리로까지 확대되었다.
동생 김현우는 공초에서 형 김범우의 도배지가 충청도 단양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다블뤼 주교도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Taniang)’이라고 썼다. 만에 하나 김범우가 단장 쪽으로 귀양을 왔다면, 유배지를 단장이라 할 수 없고 밀양이라고 썼어야 한다. 귀양지는 행정 단위의 고을 이름으로 하지, 면 단위로 적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밀양부에 단장면이 없다. 1834년 김정호가 정리한 「청구도(靑丘圖)」의 밀양부 지도에도 단장면은 없다. 그러다가 1870년 즈음에 와서야 앞선 두 지도에 실린 중삼동면(中三同面)을 단장면으로 개칭하였다. 결국, 김범우가 유배 갈 당시 밀양부에는 단장면이란 지명 자체가 없었고, 김동엽이 하동면에서 이사할 즈음에야 중삼동면을 단장면으로 새로 고쳐 불렀다는 뜻이다. 김범우의 단장 유배설은 어떻게 보더라도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金東曄, 1795~1877?)의 후손가에 전해오는 호구단자와 간찰 문서에 그가 아무 연고 없던 밀양에 정착하게 된 과정이 잘 나타난다. 이들 자료는 손숙경이 엮은 「중인 김범우 가문과 그들의 문서」(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간, 1992)에 수록되어 있다. 집안에 전해온 7건의 호구 단자를 보면 1854년부터 1867년까지 작성된 4건의 문서에서 김동엽의 최초 밀양 주소지는 단장면이 아닌 하동면(下東面) 굴암리(掘岩里) 또는 구암리(龜巖里)였다. 김동엽은 1870년에야 단장면 법귀리로 이사했다. 증손자 김영희(金穎凞, 1840~1905) 대인 1898년의 호구단자에는 다시 성주군(星州郡) 금수면(金水面) 덕산리(德山里)로 거주지를 옮겨, 이후 대대로 이곳에 살며 성주 문중을 이루었다.
단장은 김범우가 단양에서 사망하고 68년 뒤인 1854년에 손자 김동엽이 밀양으로 옮겨가 하동면 굴암리와 구암리에서 1869년까지 15년간 살다가 1870년에 다시 옮겨간 주소지였다. 김동엽의 부친 김인구(金仁, 1768~1800)는 김동엽이 6세 때인 1800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다. 족보에 김범우의 부친 김의서 위로 3대의 묘가 모두 경기도 양주군 성산리 선영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1786년 당시 김범우의 시신 또한 아들 김인구가 운구해서 선산에 모셨을 것이다. 한편 김동엽이 아들 김영희(金穎凞,1840~1905)를 46세에 얻은 것을 보면, 부친 김인구의 사후 이때까지 상당히 굴곡진 삶을 살았으리란 짐작이다.
손자 김동엽의 밀양 정착 이유
척제(戚弟)인 역관 진계환(秦繼煥)이 김동엽에게 보낸 편지 7통이 남아 있다. 진계환은 본관이 풍기(基)로, 그의 조모가 김동엽의 고모 할머니였다. 1849년 5월 18일자 편지는 서울의 진계환이 당시 동래에서 내부관(萊府館) 전차비관(專差備官)을 맡고 있던 김동엽에게 보낸 것이다. 1849년과 1852년의 다른 편지에는 수신인을 유원관(柔遠館) 김주부(金主簿)로 썼다. 앞서 내부관은 동래부 유원관을 줄인 표현이다. 유원관은 당시 동래 초량 왜관에 조선 관리가 제반 사무의 처리를 위해 머물던 관소(館所)로 성신당(誠信堂)의 동편에 있던 건물 이름이었다. 김동엽은 1849년에서 1854년 밀양 이주 직전까지 동래 왜관에서 문서 관리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진계환은 1849년 5월 10일의 편지에서 자신이 동래부사에게 김동엽을 비장전령(裨將傳令)으로 쓰게끔 청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동엽이 당시 맡고 있던 유원관의 보직을 옮겨달라고 진계환에게 부탁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852년 8월 2일자, 정봉조(鄭鳳朝)가 보낸 편지에도 김동엽은 여전히 유원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1854년 즈음에야 60세의 김동엽은 밀양으로 이주했다. 고문서 중 「소록(小錄)」에 본영(本營)이 소유한 밀양 둔답(屯畓)의 감관(監官)으로 김동엽을 천거하면서, “균청둔감(均廳屯監) 김동엽은 수십년 동안 문하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으로 일을 잘 알뿐 아니라 십분 부지런하고 야무진데, 근래 본부(本府)에 유락해 온 정상이 불쌍히 여길만하다”고 한 언급이 보인다.
김동엽이 밀양으로 오기 전 동래 왜관에서 4년 이상 일했고, 그전에도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균역청에 속한 둔전의 감독 직임을 맡아왔다는 뜻이다. 위 글에서 진계환은 김동엽이 근래에 밀양부에 유락(流落), 즉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밀양 이주가 밀양 발급 호구단자가 시작되는 1854년 경이었음을 의미한다.
김동엽은 이때 왜 밀양으로 이주했을까? 김동엽이 진계환의 주선으로 세도가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전장(田場)을 관리하는 집사 노릇과 함께 둔답 감관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밀양을 두고 “낙동강을 끼고 바다와 가까워서 한양의 역관 무리들이 이곳에 귀중한 재물을 많이 쟁여두고 왜국과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다”고 썼다.
밀양 정착 이후, 막상 김동엽은 진계환의 끝없는 요구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경제적 압박마저 몹시 심했다. 1856년 4월, 늦게 본 아들의 혼사를 치른 김동엽은 선혜청에 상납해야 할 둔세(屯稅) 200냥조차 보내지 못했다. 진계환은 1856년 4월 25일의 편지에서 이 일로 펄펄 뛰며 분개했다.
1857년 10월 26일의 편지에는 김좌근 대감의 회갑을 맞아 밀양 특산의 연죽(煙竹) 즉 담뱃대 1백 개를 기일에 맞춰 만들어 보내란 요구도 나온다. 김동엽은 이마저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진계환은 더 화를 내며, 밀양 환도(環刀) 5개를 대마도로 보내 옻칠을 해오게 하고, 왜숙복(倭熟鰒), 즉 일본산 삶은 전복 100개, 고래 고기 7~8근, 왜토장(倭土醬), 그리고 일본제 찬합 2개를 구해 함께 올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밖에도 왜통(倭桶), 풍로(風爐), 찬합(饌盒) 등의 일본 물품을 구해 바치라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
돈 문제로 오간 편지를 보면 해당 물품은 대금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1856년 4월 22일과 4월 25일, 1866년 8월 3일의 편지에는 다시 구암(龜巖) 또는 구남(龜南)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1854년 밀양 이주 후 굴암리에서 2년 뒤 다시 구암리로 옮긴 것이다.
어쨌거나 김동엽의 밀양행은 김범우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김동엽이 선대의 묘소 중 김범우의 묘소만 경기도 양주군 성산리 선산에서 단장으로 굳이 이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은 김동엽이 단장에 자리 잡은 1870년 이후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김동엽은 당시 76세의 고령이었고, 경제적 여유도 전혀 없었다. 김동엽은 1879년 이후 세상을 뜬 아내 파평 윤씨를 밀양이 아닌 경기도 양주군 신혈리(神穴里: 지금 서울의 은평구 뉴타운 지역)에 묻었는데, 이는 이때까지도 그가 한양 쪽의 선대 선영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정리한다. 김범우가 귀양 가서 죽은 곳은 충청도 단양이다.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이 4년여에 걸친 동래 근무를 거쳐 밀양부 하동면에 정착한 것은 1854년이고, 이후 단장면으로 이사한 것은 김범우 사후 84년 뒤인 1870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