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40. 밀고자 한영익과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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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52
한영익이 밀고한 주문모 신부, 정약용이 먼저 달려가 피신시키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0. 밀고자 한영익과 다산 정약용
2021.02.28발행 [1602호]
▲ 다산이 해배된 지 2년 뒤인 1821년 1월 24일에 다산초당 주인 윤문거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 딸(稚女)을 하인 편에 업고 올라오게 해서 사창동에 사는 사제(舍弟) 정약횡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내용의 친필 편지다. 개인 소장. |
짧은 방심
1794년 11월 2일, 천신만고 끝에 주문모 신부를 모신 조선 천주교회에 기쁨이 넘쳤다. 신자들은 이전에 가성직 신부에게서 받은 영세 대신 진짜 세례와 성사를 받겠다며 줄을 섰다. 막상 신부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당시 4000명에 달하던 교우의 숫자는 신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신부를 뒷받침할 조직도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신부를 모시려고 마련한 최인길의 집은 계동(桂洞) 안쪽의 으슥한 길 끝집이었다.
신부를 만나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고 고해를 받으며, 그들은 천국을 얻은 듯이 기뻐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죄에 찌들었던 삶이 한순간에 순백의 순결을 얻었다.
그 틈새로 밀고자가 파고들었다. 진사 한영익(韓永益)! 그는 예비신자였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배교했던 사람이었다. 한영익의 여동생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열심한 핵심 신자였기에 가능했다. 너무 기뻤던 그녀는 오빠에게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사실과 강론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신부님께 함께 가서 세례를 받자고 권했다.
순간 한영익은 나쁜 마음을 먹었다. 그는 1795년 5월 11일에 누이의 주선으로 신부를 찾아가 만났다. 죄를 뉘우치고 세례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당시 신부는 의욕이 앞섰고, 집행부도 조심성이 없었다. 한영익은 신부에게 천주교 교리를 문답하던 도중, 입국 경로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었다. 이 짧은 방심이 허를 찔렀다. 한영익은 그 길로 국왕의 친위 조직인 별군직(別軍職)으로 별군청을 지키고 있던 이석(李晳)에게 달려갔다. 한영익은 평소 알고 지냈던 이석에게 계동 집의 위치와 주문모 신부의 용모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석은 그 길로 영의정 채제공에게 뛰어가 이 놀라운 소식을 보고했다. 더 놀란 채제공이 즉각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임금은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을 불러 비밀리에 주문모를 체포해오게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모든 것이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규진이 입단속을 하며 포졸을 풀어 계동의 천주당을 덮쳤을 때, 주문모 신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전광석화의 출동이었건만 포도청의 급습 정보는 이미 새어 나간 상태였다. 신부는 마치 하늘로 솟은 것처럼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중국인 주문모의 공개적인 체포는 청나라와 심각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임금은 그 점을 몹시 꺼렸다.
한영익의 고발 이후 이석, 채제공, 임금을 거쳐, 다시 포도대장에게 긴급 명령이 하달되는 사이에, 이 사실을 안 누군가가 계동 천주당으로 황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달려가 주문모 신부를 황급히 피신시킨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얼마 전까지 우부승지였던 그는 배교 상태에서 서학 문제로 비방을 받아 체직되어, 부사직(副司直)의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의 교서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급여를 주려고 임시로 내린 부사직은 오위(五衛)의 무직(武職)이었다. 이석은 이벽의 동생이었다.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기도 했다.
신부를 피신시킨 사람이 다산임을 어찌 알 수 있는가? 두 가지 기록을 교차해 보아야 보인다. 다산은 60세 때 쓴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 이석이 채제공에게 고하고, 공은 비밀리에 임금께 보고하고,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 오게 했다.”
다산은 이 글에서 ‘나 또한 이를 들었다(吾亦聞之)’라고 썼다. 다산의 이 말은 나중에 전해 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한영익이 밀고하던 자리에 자신도 같이 있었다는 의미다. 문장의 순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엉뚱한 데서 맞춰진 퍼즐
하지만 다산은 들었다고 했지, 자신이 주문모 신부에게 달려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산이 직접 달려간 증거는 어디에 있나? 전혀 엉뚱하게 1797년 8월 15일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1796년 주문모 신부의 보고를 받고 나서,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르(Jean Didier de St. Martin, 1743∼1801) 주교에게 보낸 장문의 라틴어 편지에 나온다.
“이 일이 터진 것은 6월 27일(음력 5월 11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가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신부님한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는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한영익의 밀고를 함께 들은 무관이, 이석이 채제공에게 달려간 사이에 쏜살같이 계동 천주당으로 달려가 신부를 피신시켰다는 내용이다. 다산은 자신이 한영익의 밀고 현장에 함께 배석했다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가 보내온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밀사의 전언을 통해, 신부를 극적으로 구출한 사람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어떤 무관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했다. 다산은 당시 배교 상태에 있었고, 명목상 무관 신분과 무관 복장으로 궐내에 머물고 있었다. 모든 진술이 다산 한 사람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무관이 계동으로 화급하게 뛰어들었을 때, 역관인 최인길이 중국인 행세로 시간을 벌겠다며 그에게 신부를 선뜻 맡긴 것만 보더라도, 최인길 등은 그 무관을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명례방 집회 시절부터 함께 열심히 활동했던 다산을 그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다산이 아니었다면 난데없이 뛰어든 무관의 무엇을 믿고 그 귀한 신부를 덜컥 내준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모셔온 신부였던가? 지난 몇 년간 피눈물 나는 조선 교회의 노력이 일시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한편 윤민구 신부도 구베아 주교의 위 편지를 번역 소개하면서 이 무관이 다산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음을 밝혀 둔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다 ‘나 또한 이를 들었다’고 쓸 때만 해도,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구베아 주교의 기록 속에 자신을 콕 집어 말한 내용이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이 이렇게 무섭다. 구베아 주교의 이 기록은 당연히 주문모 신부의 사목 보고서와 밀사의 전언에 바탕한 것이다. 이런 글에는 이름이 안 나온다. 중간에 문서가 발각되어 압수되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참한 죽음의 진실
이날 신부 대신 붙들려 간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은 당일로 죽여 시신도 없이 사라졌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조선의 사법 체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한차례 쓰겠다. 한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한영익에 대해 이런 기술을 추가했다. “밀고자 한영익은 그의 배반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였다. 그해 가을에 그는 자기 집안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죽을 때 탄식하고 눈물 흘리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진실한 참회로 하느님에게서 자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예수를 판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1799년 10월에 서얼 조화진(趙華鎭)이 이가환, 정약용이 한영익 부자와 함께 서교에 탐닉했다고 고발하자, 정조가 화를 벌컥 냈다. “한영익은 주문모를 고발한 자인데, 그가 어떻게 이가환과 정약용의 심복일 수 있는가? 무고다.” 이 한 마디로 이가환과 다산은 혐의를 벗었다. 이 조화진은 앞서 충청도로 내려가 옥에서 자살한 밀정 조화진(趙和鎭)과는 다른 사람이다.
한영익은 1799년에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조화진이 일찍이 한영익에게 구혼했는데, 한영익이 응하지 않고, 그 누이를 나의 서제인 약횡에게 출가시켰다. 이 일로 한영익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내게 미쳤던 것이다.” 한영익의 천주교 신자 누이는 다산의 서제(庶弟) 정약횡(丁若鐄)과 결혼해, 다산 집안과 사돈이 되었다. 한영익 또한 서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밀고자의 밀고를 무력화시킨 다산이 그 밀고자의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니 해괴하다. 한영익의 회심이 전제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누이와 결혼한 정약횡도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다.
최근 필자는 1821년 1월 24일, 귀양에서 돌아온 다산이 귤동 초당 주인 윤문거(尹文擧)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보았다. 사연 중에 강진 시절 소실에게서 얻은 딸을 서울로 데려와 사창동(司倉洞) 아우의 집에 데려다 달라는 사연이 있었다. 이 사연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참 짠했다. 홍임이로 알려진 이 딸 또한 결국 천주교 신자 부부의 손에서 천주교 신자로 키워졌으리란 짐작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