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49. 간지대 정복혜와 성녀 칸디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 같은 세례명 중국의 서 칸디다와 닮은꼴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9. 간지대 정복혜와 성녀 칸디다
2021.05.02발행 [1611호]
▲ 마태오 리치, 탕약망, 서광계 등과 나란히 그려진 서 칸디다의 초상화와 그녀의 은제 십자가 문구. |
간지대, 간거다, 칸디다
세례명을 살피다 보니 유독 「성년광익」에 없는 간지대(干之臺)란 이름이 궁금해진다. 간지대는 복자 정복혜(鄭福惠)의 세례명이다. 그녀는 1801년 2월에 붙들려와서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간지대는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까? 「성년광익」에도 없는 성녀 이름을 정복혜는 어떻게 자신의 세례명으로 쓸 수 있었을까? 「사학징의」에 따르면 그녀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합규(李鴿逵)였다. 그녀는 1791년경 입교한 것으로 나온다. 또 「사학징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 한신애의 집 땅속에서 파낸 서책 중에 「셩여 간거다」 1책이 들어있다. 한신애의 집에서 파낸 수많은 책들은 모두 정복혜 간지대가 가져와 맡겨둔 물건이었다.
간거다와 간지대는 동일 인명의 이(異)표기로 보인다. 간지대 또는 간거다란 이름의 성녀는 「성년광익」 365일에 날짜별로 정해둔 성인 성녀의 명단에 없다. 별도로 전하는 그녀의 전기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정복혜는 「셩여 간거다」를 읽고 자신의 세례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간지대는 성녀 칸디다(Candida)로, 중국어로는 감제대(甘第大), 또는 감제대(甘弟大)라 쓰고 읽기는 ‘칸디다’로 읽는다. 1811년 신미년 백서에도 ‘감제대(甘弟大) 복혜(福惠)’라고 적혀 있다. 간지대는 긴 장대를 가리키는 우리말이기도 해서, 음운조합이 다소 어색한 칸디다를 친숙한 우리말 어감으로 바꾼 표기다. 책 이름 속의 ‘간거다’ 또한 ‘디’에 해당하는 글자가 마땅치 않아 발음하기 좋게 교체되어 나타난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기록상 서양 성녀 칸디다는 적어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서기 78년경 베드로 사도에 의해 치유의 은사를 받은 뒤 그의 제자가 되어 후에 로마 성문 밖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한 동정 성녀다. 또 한 사람은 성 에메리우스(Emerius)의 어머니인 성녀 칸디다로 에스파냐 북동부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수도원 근처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한 여인이다.
▲ 라틴어로 간행된 백응리의 『서 칸디다 전기』와 책에 들어있는 그녀의 초상화 삽화. |
중국 여인 서(徐) 칸디다
실제 정복혜가 어떤 칸디다를 지향으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칸디다가 더 있다.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마태오 리치와 교유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서광계(徐光啓)의 손녀 서 칸디다(徐甘第大, 1607∼1680)로, 서양 선교사인 백응리(柏應理, Philippe Couplet, 1623∼1693)가 라틴어로 그녀의 전기를 남기면서, “고금에 짝할 이가 드물고, 중국 성교(聖敎)에서 유일무이한 여사(女士)”라고 칭송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허씨 집안에 시집갔으므로 서양식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서 허부인(許夫人)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성녀의 공식 칭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미 당시 교회에서도 “경건한 정성으로 주님을 공경하며, 성덕(聖德)을 부지런히 닦았다(虔誠敬主, 勤修聖德)”는 평가를 얻어, 중국 천주교회와 유럽 교회에서 성인 이상의 기림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전기는 라틴어로 먼저 쓰여졌고, 이후 불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정작 중국어로 번역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신앙과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헌신적인 공헌 및 기여는 이미 중국 천주교회 내부에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정 간지대가 지녔던 「셩녀 간거다」는 당시 중국 교회에서 불어 번역판을 보고 그녀의 사적을 간략하게 간추린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 불어판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고려주증(高麗主證)」이 간행된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서 칸디다는 중국에서 천주교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광계의 외아들 서기(徐驥)의 5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 고씨(顧氏)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익힌 뒤, 16세에 송강부(宋江府) 허씨 집안에 시집가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녀는 당시 교난(敎難)을 만나 고통 속에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어려운 살림에도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성당의 건립에도 기여해, 송강과 소주(蘇州) 인근 지역에 135개의 작은 성당이 세워지는 데 헌신했고, 근 400권에 달하는 천주교 교리 서적의 간행에도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죽기 직전 상태에 놓인 신부들을 구출해 정성껏 치료해주고 빼앗긴 여행 경비까지 마련해준 일도 있었다. 당시 최악의 상황 속에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천사 같은 존재였다. 이후 중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서양 신부들의 입과 기록을 통해 성인 이상의 존재로 각인되어, 각종 전기가 잇달아 출간되었다. 그녀는 중국에서보다 유럽 교회에 먼저 알려진 특이한 경우였다.
간지대가 소장했던 「셩녀 간거다」란 책 또한 그같은 전문(傳聞)을 수록한 소책자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녀가 교회 서적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도 서 칸디다를 연상시킨다.
사학 매파 간지대
「사학징의」에서 정복혜를 ‘위항천파(委巷賤婆)’로 지칭한 것을 보면, 그녀의 신분이 낮았고, 나이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 교회 조직에서 서민 출신으로 가장 영향력이 막강했던 이합규를 통해 입교하였고, 그녀에게 간지대란 세례명을 내려준 것도 이합규였다. 그녀는 강완숙의 집과 예산군수를 지낸 조시종(趙時種)의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서울 지역 천주교 조직의 중심부를 구성하던 이합규, 정광수, 김이우, 황사영 등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던 이른바 사학 매파였다. 특별히 조시종의 처 한신애 모녀와 가까웠고, 한신애의 요청으로 이합규와 정광수, 홍문갑 등을 그 집으로 데려가 그 집 비복들에게 전교하는 중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정광수의 처 윤운혜도 자신이 간지대와 몹시 가까웠다고 진술한 바 있다.
간지대는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다. 오라비 정명복(鄭命福) 내외와 아들 윤석춘(尹碩春) 내외도 신자였다. 정명복 내외는 전농동에 살다가 1798년에 서소문으로 이사 왔고, 이들 또한 이합규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다. 정명복의 사위 김덕중(金德重)도 강완숙의 집을 들락거리며 강학에 열심이었다. 정명복은 배교하고 목숨을 구해 1801년 12월에 장성으로 귀양 갔다. 윤석춘의 처는 이기양의 아들이자 이총억의 동생인 이방억의 유모였다. 이 인연으로 간지대가 천주교 신자였던 그 집안을 자주 왕래할 수 있었다. 이총억과도 가까웠다.
간지대는 덕산(德山)의 교주인 송가(宋哥)와 친해, 그가 만든 천주교 서적을 들고 다니며 교인들에게 판매한 일도 있다. 그녀가 이 시기 교회에서 담당했던 주요한 일 중 하나는 천주교 교리서의 공급과 보급책의 역할이었다. 한신애의 집에서는 땅에 파묻어둔 26종의 교리서가 쏟아져 나왔다. 이 책은 모두 간지대가 검거의 위협을 느껴 한밤중에 가져가 땅에 묻어둔 것이었다.
간지대의 것으로 압수된 책의 목록을 보면 실제로 첨례에 필요한 기도서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수진일과(袖珍日課)」, 「미사(彌撒)」, 「성경일과(聖經日課)」 , 「셩경직ᄒᆡᆡ(聖經直解)」, 「성경광익(聖經廣益)」, 「셩경광익직 ᄒᆡ(聖經廣益直解)」, 「쥬년첨예쥬일(周年瞻禮主日)」 등이 쏟아져 나왔고, 「예미사규졍(與彌撒規程)」과 「오샹경규졍(五傷經規程)」 등의 책자도 모두 주일 미사 첨례에 필요한 각종 기도문과 독서 성경 및 의례와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이밖에 교리서로는 「교요셔론(敎要序論)」, 「주교은지(主敎恩旨)」, 「묵상(黙想)」, 「묵상지장(黙想指掌)」, 「고ᄒᆡ요리(告解要理)」 , 「셩교쳔셜(聖敎淺說)」, 「척죄정규(滌罪正規)」, 「삼문답 부십계(三問答 附十誡)」, 「요리문답(要理問答)」 등이 더 있다. 「묵상지장」의 경우 한문본과 한글본이 따로 있었다.
여기에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 일기로 보이는 「노능좌명일기老楞佐命日記」와 「셩녀 간거다」 같은 책은 성인전 계통의 책자이다. 또 여성 교육을 위한 「규잠(閨箴)」, 「규람(閨覽)」 등이 더 있다. 이들 중에는 미처 표지를 씌우지 못한 책자도 여럿 보인다. 그녀의 집은 정광수 윤운혜 부부가 이끌던 성물 공방과 연계된 거점이었던 듯하다.
특별히 그녀의 압수 물품 품목에 도상판(圖像板)과 도상 족자 3개가 눈길을 끈다. 도상판은 성화를 찍어내기 위해 원화를 새겨둔 목판을 말한다. 이를 통해 당시 성화의 제작이 목판에 새겨 찍어낸 뒤 채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 점도 소중하다. 함께 발견된 작은 주머니 6개에는 순교 성인의 모발과 나무 조각 및 성해(聖骸)와 관련된 가루 등이 들어 있어서, 당시 신자들에게 이 같은 물품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작 집주인인 한신애의 거처에서 압수된 것이 「성호경」 책과 사학 경전을 언문으로 베낀 책 1권뿐이었음을 본다면, 당시 간지대가 한신애의 집 마당에 묻어둔 자료의 범위가 얼마나 위력적인 것이었는지 알게 되고, 이를 통해 당시 교계 내 그녀의 위상에 대해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다만 「사학징의」에 실린 그녀의 공초는 뜻밖에 짧아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그녀가 특별한 진술과 배교를 거부하고 단호한 태도로 군더더기 없는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