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53. 기억의 착종과 기록의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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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07
판결 전 고문으로 죽임 당한 순교자, 「사학징의」 명단에서 누락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3. 기억의 착종과 기록의 사각지대
2021.05.30발행 [1615호]
▲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신미년백서」. 가톨릭평화신문 DB |
「사학징의」에 누락된 「신미년백서」 속 순교자
스쳐 가는 기록 속에 보석이 박혀 있는 수가 있다. 한쪽에서 지워져 말소된 정보가 다른 기록을 통해 보정되기도 한다. 기록의 교차 검토가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반대로 상이한 내용을 담은 두 가지 정보로 인해 실상 파악에 혼선이 빚어질 때도 있다. 특히 세례명의 경우 이같은 착종이 비교적 심하다. 본인의 기술과 뒷 시기 제3자의 기록이 엇갈릴 때는 본인의 진술을 따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중국의 세례명과 조선식 세례명이 엇갈릴 때는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인다. 어쨌거나 조각조각의 퍼즐이 하나둘 모이면, 좀체 가늠할 수 없었던 전체상이 언뜻 드러난다.
1811년 11월 3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신미년백서」에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능지처참에 처해지거나, 매 맞다 죽고 교수형에 처해져 죽은 사람의 수가 1백 수십 명에 달한다고 쓰고, 그들 중 살았을 때 공적이 탁월했고, 박해 당시 시종일관 굳세고 바른 자세를 견지해, 여러 성인 전기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조금도 없는 순교자 43명을 꼽았다. 앞쪽에 주문모, 강완숙, 윤점혜, 이순이, 정약종, 최필공, 황사영 등 7명의 자세한 행적이 있으니, 모두 50명의 행적을 실은 셈이다.
그런데 이 사형 죄인 명단 중에 공식 기록을 정리한 「사학징의」에 안 나오는 몇몇 이름이 있다. 조상덕(趙尙德), 마필세(馬必世), 신약봉(申若奉), 이명불(李明黻), 장재유(張在裕), 동정녀 이석혜(李碩惠)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어째서 「사학징의」 속 사형 죄인의 명단에서 누락되었을까? 이들 중 마필세, 신약봉 두 사람은 달리 교차되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나머지 조상덕과 이석혜, 장재유, 이명불 네 사람은 추정할만한 단서가 있어 이 글에서 찾아 살펴보겠다.
조동섬의 아들 조상덕 토마스
먼저 조상덕(趙尙德, 토마스, 1762~1801)은 양근 사람 조동섬(趙東暹, 1739∼1830)의 아들이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는 조 토마스로만 나온다. 「한양조씨족」을 통해 그의 이름이 조상덕임이 확인된다. 「신미년백서」는 조상덕의 실명을 신유박해 순교자 명단에 올린 최초의 기록이다.
아버지 조동섬은 권일신의 가까운 벗이었다. 1801년 2월 11일에 양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어 정약종과 대질 심문을 하고, 2월 27일 함경도 무산 땅으로 유배 갔다. 아들은 63세 난 늙은 아비의 건강이 염려되어 무산까지 따라갔고, 고문으로 중병이 든 아비를 봉양하며 지냈다.
당시 양근 군수 정주성(鄭周誠)은 양근 지역 서학 신자를 박멸하기 위해 작정하고 부임한 사람이었다. 권철신 집안을 때려잡으려는 과정에서 조상겸(趙尙兼, 1736∼1801)을 비롯해 관련자 50여 명이 죽거나 유배 갔다. 개인적인 원한까지 있었던 조동섬이 의금부에 의해 목숨을 건져 무산 유배에 그치자, 그는 1801년 8월 양근 포졸을 무산까지 보내 그 아들 조상덕을 붙잡아 오게 했다.
양근으로 끌려가게 된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어찌 하려느냐?” 부자는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대답했다. “예, 한발 한발 주님의 십자가만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잘 가거라. 후회 없이 보내마.”
이후 그는 양근 관아에서 두 달 동안 날마다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잔혹한 고문 끝에 그는 1801년 10월 초에 3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죽었다. 그의 순교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것은 지방 관아에서 벌어진 고문이었고, 판결이 나기 전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미년백서」는 그를 신유박해 당시 대표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했고, 「사학징의」의 기록에서는 누락되었다. 달레는 그를 조 토마스로만 적었는데, 이후 족보의 기록에 따라 「신미년백서」 속 조상덕이 바로 조동섬의 아들 조 토마스였음이 확인된 경우다.
동정녀 이석혜는 이 아가타?
동정녀 이석혜는 따로 알려진 행적이 없다. 그런데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오는 동정녀 이 아가타와 겹쳐진다. 이 아가타는 양근 인근 이동지(李同知)의 딸로, 신앙을 지켜 동정의 삶을 살 결심을 했다. 집안 친척인 양근 동막골의 향반(鄕班) 유한숙(兪汗淑)의 도움을 받아, 서울 윤점혜 아가타에게 간 그녀는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달레는 “이 아가타에 대한 기억이 오늘까지도 그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특별한 찬양을 받고 있다”고 썼다.
동정녀이고 이씨이며, 윤점혜 아가타와 함께 생활한 널리 알려진 동정녀는 「신미년백서」에서 적고 있는 이석혜 외에는 달리 없다. 달레의 기록 속 이 아가타는 이석혜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달레는 “가장 믿을 만한 전설에 의하면 1801년 4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천주교인의 수는 모두 13명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지금은 모두가 잊혀졌지만 교우들은 그들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고 썼다. 관변 기록에는 7명의 이름만 있는데, 나머지 6명 중에 앞서 본 조상덕과 이석혜 아가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방민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사학 죄인을 출신지로 내려보내 그곳에서 처형하는 정책을 취했다. 양근의 기록에서 사망자 명단이 누락된 것은 결안(結案), 즉 선고 공판 이전에 이들이 고문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하버드 옌칭도서관 소장 백가보에 실린 연안이씨 족보 중 이명불과 이명호가 나란히 실린 대목. 이명불의 직계 또한 말소된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듯 하다. |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불(李明黻)과 이명호(李明鎬)는 기록상 착종이 심한 경우다. 이명호와 이명불은 모두 이정운(李鼎運, 1743~1800)의 아들이다. 셋째 아우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이 아들이 없자 큰형의 아들 이명호를 입양해 대를 이었다. 그런데 이명호는 자주 이명불이란 이름과 뒤섞인다. 이명불은 족보에 이정운의 장자로 나온다. 이명불과 이명호가 동일인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장남의 장자를 3남에게 입양할 수 있느냐는 데서 막힌다. 두 사람이 혼동된 이유는 이제 와서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족보상으로 보면 이익운에게 양자로 들어온 아들은 이명불이 아닌 이명호(李明鎬, ?~1801)가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담유록」과 「눌암기략」과 「신미년백서」는 모두 이명호가 아닌 이명불로 적고 있다. 게다가 족보에서 이명불의 후대가 끊겼고, 일체의 기록이 말소된 점도 의아하다. 교회사 쪽의 기록에는 이명호 요한으로 나오고, 1801년 10월 26일 순조실록 기사에도 이명호로 나온다.
「송담유록」의 기록은 이렇다. “이익운이 입양한 아들 이명불(李明黻)(아명은 개불(介不)이다)이란 자는 어려서부터 서학을 배웠다. 사람들은 이익운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배웠다고 하였다.”
이 기록 속의 이명불은 이명호에 관한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기록상 착종이 일어난 셈이다. 이명호는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이정운의 아들인데, 숙부인 이익운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1795년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했고, 격한 성격을 고치고 예수와 성인의 모범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익운이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호가 듣지 않자 강제로 독약을 먹여서 죽게 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장재유는 장덕유?
「신미년백서」 속의 장재유는 따로 기록이 안 나온다. 다만 그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장덕유(張德裕)가 「사학징의」에 나온다. 이름을 두 가지로 썼거나, 「신미년백서」 기록자의 잘못된 기억에 의한 착오로 보인다.
장덕유는 총모장(驄帽匠)으로 남대문 밖 이문동(里門洞)에 살았다. 황사영과 연루된 인물로 조사받았다. 그는 황사영을 도피시킨 김한빈과의 인연으로 끌려가서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예수는 개 돼지라고 입으로 말하여 맹세의 말로 삼아, 이제부터 이후로는 바른길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공초를 바쳤으나, 황사영의 종적을 찾는 데 혈안이 된 형조의 고문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끝에 가서, 살기를 꾀해 마음에 없는 공초를 바쳤다 하고, 주문모, 정약종과 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앞선 공초에서 예수를 욕하여 욕보였으니, 이는 교주를 배반한 죄여서 후회 하나 미치지 못합니다. 속히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신앙을 증거하다 용감하게 죽었다.
나머지 두 사람 마필세와 신약봉에 관한 흔적은 끝내 찾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짐작건대 양근 관아로 끌려가 죽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6명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례명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윤운혜는 「사학징의」에는 누재(樓哉) 즉 루치아라 했는데, 「신미년백서」에는 마이대(瑪爾大), 즉 마르타로 나오고, 19세에 동정녀로 순교한 심아기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세례명이 바르바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의닉사(依搦斯) 즉 아녜스로 되어 있다. 윤운혜의 경우 본인의 진술인 루치아가 맞겠고, 심아기의 경우는 시기상으로 아녜스 쪽에 신뢰가 간다. 한편 「신미년백서」에서 정순매 발발아(發發阿)를 중국식 표기에 맞춰 파이발랄(巴爾拔辣)로, 정복혜 간지대(干之臺)를 감제대(甘第大)로 적은 것이 눈길을 끈다. 그 밖의 모든 세례명도 중국에 보고하는 글에는 모두 조선식 표기가 아닌, 원표기에 준하였다. 표기의 상이한 체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