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84) 죽여서 입을 막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4) 죽여서 입을 막다
주문모 신부 입국 사실 숨기려 윤유일 · 최인길 · 지황 비밀리에 처형
- (왼쪽부터) 복자 윤유일 바오로·최인길 마티아·지황 사바.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최인길의 가짜 신부 행세는 포도청에 압송된 뒤 바로 들통이 났고, 기찰포교에 의해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붙잡혀 왔다. 최인길·윤유일·지황 세 사람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이튿날 새벽 옥에서 순교했다.
기록에서 사라진 세 사람의 죽음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최인길은 시간을 끌려고 상투를 잘라 중국 사람처럼 꾸미고 기다리다가 체포조가 들이닥치자 말을 어눌하게 하고 중국어를 섞어가며 주문모 행세를 했다. 그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조선 말을 못 알아듣는 척 시간을 끌었다.
수염이 길었다는 한영익의 밀고와 달리 수염이 하나도 없었던 최인길의 가짜 행세는 포도청에 압송된 뒤 바로 들통이 났다. 속은 줄을 안 기찰포교들이 화들짝 놀라 다시 주문모 체포에 나섰다. 신부는 그 사이에 남대문 안쪽 수각교 인근 강완숙의 집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든 뒤였다.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붙잡혀 왔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은 5월 11일에 체포돼 이튿날 새벽에 죽었다. 참 이상한 일은 당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국가의 공식 기록 속 당일의 기록에 이들의 체포 사실 자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점이다. 이들은 기록상 체포된 적이 없어 사형 집행 기록도 당연히 없다. 이들이 어떻게 죽었고, 누가 심문했고 심문에 임하는 태도는 어땠는지, 시신은 어찌 처리했으며, 가족과 관련 인물의 후속 처리는 어찌 마무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전무하다. 세 사람은 그야말로 전광석화로 끌려가서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이들의 죽음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만 편린의 기록이 남았다. “체포된 그 날 밤으로 그들은 법정으로 끌려나갔다. 그들의 굳은 결심과 그들의 말의 지혜는 재판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 재판관들이 외국 신부와 그의 도착과 그의 서울 체류에 대하여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들에게서 신부에게 위험한 자백을 끌어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고문을 하고, 매를 몹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렸으나 아무것도 그들의 용기를 꺾거나, 그들의 인내심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임금은 천주교의 원수들이 거듭 내는 요청에 못 이겨 그들의 결안에 서명하였다. 판결은 그날 밤으로 옥 안에서 집행되었고, 순교자들의 시체는 강에 던져졌다.”
그들은 5월 11일 저녁에 잡혀가, 당일 밤에 심문장에 끌려갔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부의 소재에 대해 끝까지 침묵했다. 당일 판결을 내려 옥 안에서 사형을 집행했고,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과연 그랬을까? 달레의 기록은 대부분 추정 기술일 뿐이다. 극비리에 끌려가 이들의 체포 사실 자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천주교의 원수들이 거듭 내는 요청이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시신을 강에 던졌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 시신을 강에 던져 공연한 소문을 키울 일도 아니었다.
-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려고 가짜 신부 행세를 한 최인길 마티아. 그림=탁희성 화백.
무시된 법 절차와 공서파의 반격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처결은 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했다. 당일 체포한 주요 사범에게 당일에 사형을 내려 이튿날 새벽에 시신을 강물에 던지는 것과 같은 법 집행은 조선의 사법체계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다기보다, 입을 막으려고 살해한 것에 가까웠다. 주문모 신부를 기필코 잡으려 했다면 세 사람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 사람과 주변 인물들과 가족까지 모조리 붙잡아 들여 신부가 붙잡힐 때까지 고문하고 심문했어야 했다.
한영익의 밀고로 갑작스레 돌출한 주문모 신부 체포 문제는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쉬쉬하며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문제는 당사자인 주문모 신부의 종적이 내내 묘연한 거였다. 시간문제로 보였던 신부의 체포가 시일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임금과 조정은 당황해 허둥지둥한 기색이 역력하다.
달레는 이때 세 사람 외에 5명의 교인이 같이 체포되었고, 보름 간 고문을 당한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기뻐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물러갔다고 썼다. 실제로 「사학징의」 중 허속의 공초를 보면, 최인철의 매부였던 그는 “1795년 5월에 제가 처남 최인길과 함께 본청에 체포되었는데, 최인길은 죽었고, 저는 감화되어 바른 길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공초를 올리고 석방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김종교도 “저는 최필공, 최창현, 김종순(金宗淳), 최인길, 최인철 등과 서로 사서를 강학하다가, 1795년에 포청에 체포되어, 감화되었다는 뜻으로 공초를 바쳐 석방되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앞선 세 사람 외에 허속과 김종교가 별도로 체포된 5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위 명단에서 김종순은 다른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위 명단 중에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이 서학 문제로 포도청에 끌려와서 당일 매 맞아 죽어 나갔다는 소문이 수군수군 퍼져나갔다. 이만채는 「벽위편」에 「포도청에서 세 역적을 급히 죽인 일(捕廳三賊徑斃事)」이란 항목을 따로 두어 이 일에 대해 논했다. 그런데 워낙 극비리에 처리된 일이고 보니, 문제 삼는 측에서도 명확한 사실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벽위편」의 기록은 이렇다. “이 해 6월 염탐하는 포졸에게 잡히게 되자, 임금께서는 밤중에 좌의정 채제공과 포도대장 조규진을 들어오라 명하시고, 세 역적을 포도청에서 다스리되 좌의정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케 하였다. 그때는 자궁께서 회갑이 가까운 시점으로 조야가 모두 경하하는 때였는데, 임금께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시니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뜻이 엄중함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을 엄히 신문하니, 이가환 이승훈 황사영 등의 이름이 모두 문초 속에서 빠짐없이 나왔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 사람은 도망쳐 버려 체포하지 못하고, 다만 최인길, 윤유일, 지황 세 역적만을 체포하여 그 밤에 박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었다. 그들을 잡아 죽인 것을 매우 비밀히 하였으나, 여기저기서 세상 사람들의 수군대는 말이 많으므로 권유의 상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5월 11일의 일을 6월이라 하고, 밀고로 잡은 것을 포졸의 염탐에 걸렸다 한 것을 보면 사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월 18일에는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국가적 잔치로 예정돼 있었다. 화성 건설도 본궤도에 올라 속속 건물이 낙성되던 터여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이 와중에 도성의 한복판, 그것도 임금이 집무하던 창덕궁 담장에서 1㎞ 정도의 지근 거리에 중국인 신부가 버젓이 천주당을 만들어 놓고 서학을 포교하고 있었다.
강세정도 「송담유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기술했다. “영의정 채제공이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을 불러서, 하룻밤에 삼적(三賊)을 때려죽이게 했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다들 사적(邪賊)인데 그것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해서 입을 막으려는 계책이라고들 했다. 주문모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모든 일 처리가 극비리에 이루어졌고, 소문만 무성하게 번졌으나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공서파, 포문을 열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 세 사람은 붙들려 온 지 12시간도 채 못 된 이튿날 새벽에 고문 끝에 죽었다. 이것은 심문이 아닌 살해에 가까웠다. 중국인 신부의 잠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 한 것이었다. 은폐의 시도는 일단 성공했던 듯하다.
화합의 메시지와 새 시대의 청사진이 막 펼쳐지려는 시점에,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잠잠해진 천주교 문제로 정국이 격랑 속에 다시 빠져드는 것은 국왕 정조도 좌의정 채제공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주문모는 중국인이어서, 자칫 그를 공개적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다가는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다.
신문 과정에서 이가환과 이승훈, 황사영 등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지만, 속사정을 모른 채 넘겨짚어 찔러본 데 지나지 않았다. 수군대는 말이 떠도는 것이 당연했다. 대비의 생일잔치가 끝나고 보름쯤 지난 7월 4일,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로 첫 포화를 쏘아 올렸다. “일전에 포도대장이 때려서 죽인 세 놈은 듣자니 사학하는 무리라고 합니다. 비록 대신이 경연에서 아뢰어 포도대장을 지휘하여 그리했다 하나, 이는 보통의 변고가 아니고 또한 비밀로 감출 일이 아닙니다. 진실로 마땅히 뿌리와 마디를 자세히 살펴서 법 집행을 밝고 바르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얻어서 알게 하고, 얻어서 토벌케 해야 하는데도,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다급하게 거두어 죽여, 마치 단서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입을 없애고 자취를 가리려 함과 같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란 말입니까?”
난감해진 정조는 비답에서 어찌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이처럼 과도하게 말하느냐고 나무랐다. 멸구엄적(滅口掩跡) 즉 입을 틀어막고 자취를 감추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며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만 이들이 너무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드러내놓고 알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임금의 대답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흘 뒤인 7월 7일에는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엉뚱하게 이가환을 저격했다. 그는 이 일이 중국인 신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인 줄을 전혀 모른 채 헛다리를 짚고 말았다. 저들이 상황도 모르고 신서파 타도의 깃발만 올린 줄을 알게 된 정조는 불같이 노해 박장설의 직위를 박탈하고 삼천리 유배형에 처해버렸다.
정약용은 「정헌묘지명」과 「복암묘지명」에서 권유의 상소와 박장설의 상소가 척사파 악당들의 사주를 받아, 채제공을 공격하고 이가환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음모였다고 반복해서 썼다. 하지만 결국 이 일로 이가환은 충주목사에,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쫓겨났다. 정조의 개혁 구상은 이렇게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월 23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