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87) 여걸 강완숙 골룸바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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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87) 여걸 강완숙 골룸바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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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7) 여걸 강완숙 골룸바의 카리스마

「사학징의」에 강완숙 이름 128회 등장… 6년간 주문모 신부 모신 여장부

 

 

복자 강완숙 골룸바는 여회장으로서 6년간 열과 성을 다해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교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림은 강완숙이 왕실인 은언궁 송씨를 찾아 교리를 가르치는 모습(탁희성 화백).

 

 

압도적 존재감

 

강완숙은 초기 교회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에 그녀의 이름은 128회나 등장한다.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장 정약종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실포 사건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냈지만, 기본적으로는 6년간 그녀의 집이 주된 거처였다. 신부는 강완숙의 안방 안쪽에 달린 협실(挾室)에서 기거했다.

 

주 신부가 있는 곳이 교회의 중심이었기에 그녀의 집 또한 자연스레 교회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신부를 만나지 못했고, 신부의 동선과 행선지도 그녀가 결정하고 관리했다. 그녀의 위상은 황사영이 「백서」에서 “박해 후에 신부가 그 집을 거처로 정하였다. 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사무에 모두 그녀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신부가 총애하여 신임함이 몹시 융숭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썼을 정도다.

 

그녀는 신부의 비서실장이자 보호자였다. 그녀의 둘레에는 수행비서 역할을 맡은 아들 홍필주와 신심으로 똘똘 뭉친 동정녀 및 과부들의 조직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당시 교회를 설명하면서 “부녀자가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어리석은 천한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사대부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어 따르는 자가 몹시 적었다”고 한 말이 실감 난다. 남성 지도자 조직은 오히려 외곽에서 지원했다. 그녀는 조선 천주교회의 명실상부한 실세였다. 그녀를 ‘강파(姜婆)’로 지칭한 탓도 있겠지만, 그 압도적 카리스마로 인해 세상을 뜰 때 그녀의 나이가 적어도 50대 후반쯤은 되었지 싶은데, 막상 그녀가 처형당할 때의 나이는 41세였다.

 

- 강완숙 골룸바 복자화.

 

 

그녀는 1792년 이후, 1793년쯤 상경했다. 별라산 시절부터 그녀의 리더십은 출중했다. 앞서 살핀 대로 그녀는 계실(繼室)로 홍지영과 혼인했다. 홍지영은 영의정을 지낸 홍낙성의 5촌 서조카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는 7촌 서조카가 되는 인물이었다. 가족으로는 전처 소생의 아들 홍필주와 성격 고약한 시어머니 유 아녜스가 있었다.

 

별라산 시절부터 손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면 안방으로 불러들여 식사를 대접하고, 노잣돈까지 쥐어 줬다는 것에서도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이 엿보인다. 남편 홍지영과 고오봉 등 주요 신자들이 홍주 감영에 끌려갔을 때, 그녀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까지 찾아가 적극적으로 뒷수발을 했다. 그는 다소곳하지 않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이 적극성과 과감성이 초대 교회를 견인하고, 주문모 신부를 수호해낸 밑바탕이 되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강완숙에 대해 말한 것을 한 대목 더 들어보자. “골롬바는 안에서 신부를 받들며 기거와 복식에 모두 알맞게 잘하였다. 밖으로 교회의 사무를 처리함은 경영과 수응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동녀(童女)를 많이 모아 가르쳐 성취시켰고, 각 집을 나누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을 것을 권면하게 하였다. 자기 또한 두루 다니며 권면하여 교화시키느라 밤으로 낮을 이어 편히 잘 때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도리에 두루 통하고 말솜씨가 민첩하여 사람을 교화시킴이 가장 많았다. 일 처리에 강단이 있고 위엄을 갖추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려워했다.”

 

기록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했다. 한신애는 “강완숙은 제가 아들과 비첩들에게 서학을 능히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여 매번 비웃곤 했다”고 했고, 궁녀 문영인은 강완숙의 집으로 찾아가 사서를 배우려 하니, 강완숙이 잠깐동안 왔다 갔다 하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창동에 살던 유덕이 갈오사(乫於沙)도 강완숙에게 정성이 부족하고 배움에 게으른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나무람을 듣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거의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강단이 있었고, 여장부의 기질을 지녀, 결코 살가운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리스마를 갖춘 여회장

 

1811년 11월 3일 조선 교회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백서」에는 강완숙의 일생이 꽤 길고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음은 그중 한 단락이다. “갑인년(1794)에 신부가 동국에 오셨으나, 조심스레 비밀로 한지라 나아가 뵙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신부가 이미 그녀의 재주와 그릇을 아시고 천거하여 여회장으로 삼았다. 당시의 교우들이 모두 그녀가 알아줌을 입음을 보고 놀랐다. 이때 신부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성사를 조금 행하였다. 동국의 풍습은 남녀가 내외함이 지극히 엄하였다. 그래서 겉모습을 남모르게 꾸미는 것은 여교우가 나은 점이 있었지만, 계책을 삼가 비밀스레 하는 것은 남자 교우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강완숙은 앞에서 끌고 뒤에서 인도하여 정성을 다하고 힘을 온통 쏟아, 안으로 받들어 모시는 예절을 지극히 하고, 밖으로는 가늠해 따지는 본분을 다하였다.”

 

1794년 연말에 조선에 입국한 신부가 계산동 최인길의 집에 도착한 뒤에도 강완숙은 신부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평판을 익히 들어 안 주문모 신부는 그녀를 여회장으로 지명했다. 이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신부를 모시고 교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글 속의 겉모습을 남모르게 꾸민다는 말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척한다는 말이다.

 

앞서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 세 사람이 잡혀가던 급박한 상황에서 정약용이 주문모 신부를 창동 강완숙의 집으로 빼돌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신미년백서」에서 강완숙에 대해 말한, 다음 한 단락이 유독 눈길을 끈다. “3년이 되자 박해의 기미가 조금 누그러지고 성사(聖事)가 점차 늘어났다. 강완숙은 위로 신부님을 받들고 아래와 연결하니, 곧고 굳고 바르고 반듯해서 강론을 사람에게 펴면 마치 종소리가 화답하여 응하는 것 같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사람을 당기면 마치 불이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려움이 몰려와도 물리쳐 해결함이 마치 예리한 칼로 얽힌 뿌리를 잘라내는 것 같았고, 세속이 위험하나 그 나아감은 마치 남자가 전쟁에 임하는 듯이 하였다. 남자 교우가 비록 많았지만 열심만큼은 매번 그녀에게 양보함이 있었고, 신부 또한 그녀에게 의지하여 일을 이루었다. 진실로 거룩한 모임의 간성(干城)이요 당시의 우두머리였으니,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이라 논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러나 인정을 매번 살필 수는 없었고, 세상일을 모두의 뜻에 맞게 하기가 끝내 어렵다 보니, 간혹 마땅해 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성인의 전기 가운데서 두루 살펴보더라도 또한 이같은 종류가 많았으니, 이것으로 흠을 잡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교회 내에서 그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웅변하는 글이다. 다만 끝의 한 문장은 교회를 앞세우고 신부를 위하는 그녀의 선 굵은 행동과 말투로 인해, 한신애나 유덕이의 경우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얼마간 불만을 품은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폐궁 나인 강경복은 “사서를 배우려고 홍문갑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의 어미가 한 남자와 함께 앉아서 경문을 가르치는데, 그 소리가 벙어리 같은지라 홍문갑의 어미가 대신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했고, 정인혁은 “탁자 위에 등촉을 밝히며, 요상(妖像)을 걸어놓고는 신부인 주문모가 상 앞에 서서 입으로 사서를 외웠습니다”라고 했다. 주문모 신부의 조선어 실력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첨례는 신부가 주도하되, 교리 교육은 신부와 강완숙이 나란히 앉아, 신부가 우물우물 몇 마디를 하면 강완숙이 알아서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토론으로 기세를 압도하다

 

1801년 2월 26일경 강완숙과 한신애가 체포되었다. 신부는 이미 다른 곳에 숨은 뒤였다. 신부가 숨은 곳을 알아내기 위한 고문으로 인해, 그녀들은 뼈 마디마디가 부러져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강완숙은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 고문을 받아 견디며 입을 열지 않았다. 형리들이 저건 여자가 아니라 귀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신미년백서」는 형장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다시 이렇게 적었다. “유학을 끌어와 도리를 증명하고 본원을 환하게 밝혀, 삿됨을 배척하고 바름을 높이며 고금의 내력을 확고하게 드러내었다. 심문관은 말문이 막혀 여사(女士)로 일컬었고, 당시의 여론이 기운을 빼앗겨 모두 여장부[傑婦]라고들 하였다.”

 

달레도 “관리들도 감탄하여 강완숙 골롬바를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며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고 썼다. 고문으로 위협하다가 달래고 얼러 유혹을 해보아도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감옥에서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옷을 찢어 신부가 조선에 와서 행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기록하여 감옥에 함께 있던 여교우에게 맡겼다.

 

그녀는 1801년 5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그녀 외에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 8명이 한날 같이 죽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기도와 찬미를 멈추지 않았다. 형장에서도 그녀는 구차하지 않았다. 형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법은 마땅히 옷을 벗은 채 형을 받아야 하나, 다만 우리들 부녀자를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소. 담당 관리에게 속히 여쭈어, 이 죄수들이 옷을 입고 죽게 해주시오.”

 

강완숙은 성호를 긋고 맨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튿날 큰비가 쏟아졌다. 그녀를 포함한 아홉 구의 목 잘린 시신이 진창 속에 널려 있었다. 그래도 시신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고, 낯빛은 살았을 때와 같았다.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고, 강완숙을 필두로 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깊고 오랜 침묵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0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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