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88)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 구조와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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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88)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 구조와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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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8)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 구조와 구성원

제대 꾸며진 협방에 주문모 신부 모시고 여성 20여 명 상주

 

 

-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도성대지도’. 종로구 안국동 인근 충훈부 후동에 강완숙의 집이 있었다. 현재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인근,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오른쪽의 숲은 창덕궁과 비원이다. 좌측 상단에 정광수의 집이 있던 벽동이 보인다.

 

 

스무 명이 넘는 상주 인원

 

강완숙(골룸바)은 1799년 남대문 밖 창동에서 도심 속 대사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 새집을 지으려다 법적인 분쟁이 발생해, 1800년 3월에 충훈부 후동(관훈동)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은 명실공히 조선 천주교회의 최전선이었다. 집행부의 중요한 의사 결정뿐 아니라 첨례와 교리 교육도 이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당시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고, 어떤 인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머물게 된 경위를 이렇게 썼다.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 입교한 사람이 자못 많았는데, 대개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닐 경우, 사족의 부녀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금지하는 명령을 염려하지 않았고, 신부 또한 이를 빌어 교회를 널리 선양할 바탕으로 삼으려 하여, 대우함이 특별히 두터웠으므로 교인 중의 큰 세력이 모두 여교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소문 또한 널리 퍼졌다.” 여성이 조선 천주교회에서 실제 주축이 된 배경을 설명한 내용이다. 끝에 말한 소문은 남녀 간에 구분 없이 문란하다는 구설이 있었다는 뜻이다.

 

먼저 강완숙 집의 상주 인원을 알아보자. 적어도 이 집에 상주하던 인원은 최소 20명 이상이었고, 대부분 여자였다. 우선 여러 사람의 공초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강완숙의 직계 친속이 8명이다. 시어머니 유 아녜스와 강완숙 본인, 아들 홍필주와 딸 홍순희, 홍필주의 처와 처형 및 조카딸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더해 주문모 신부와 윤점혜(아가타), 김달님, 김순이와 여종 소명, 정임, 복임, 동의 어미, 고공(雇工) 김흥년과 최춘봉과 그의 어미 등 최소 11명이 더 이 집에 살고 있었다. 이 19명 외에도 매번 첨례일이 가까워오면 3, 4일 전부터 객방에 기본적으로 대여섯 명 이상이 머물렀다. 동의 어미나 여종인 소명과 복임 등은 심부름과 빨래 등 허드렛일을 맡았고, 윤례(允禮) 어미는 정임과 함께 신부의 식사를 책임졌다. 외부로 나가는 편지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경기 감영 앞에 살던 윤례 어미는 날마다 출근했다. 이밖에 평상시에도 교리 교육이 활발히 이뤄졌기에 상주 인원은 기본적으로 늘 25명이 넘었다.

 

 

안채의 구조와 역할 분담

 

많은 인원이 함께 생활하려면 우선 이들이 숙식을 해결할 공간이 필요했다. 방은 몇 개이고, 공간은 어떻게 분할되어 있었을까? 「사학징의」 속 여러 관련자의 공초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대충 어렴풋하게나마 집의 구조가 파악된다.

 

동정녀 김달님[金月任]의 진술은 이렇다. “이른바 신부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노소(老少)가 그를 고향의 친족이라면서 비밀로 상청(上廳)의 가운데 방에다 숨겨두었고, 그 방에 출입하는 자는 강완숙 모녀와 다슬아입니다. 강완숙은 종종 혼자 그 방에 들어갔는데, 매번 그 방에 들어갈 때는 문득 안에서 닫아걸어 제가 들어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제가 혹 창틈으로 엿보기라도 하면, 강완숙의 어미가 대경실색하여 한사코 막아 금하였습니다.”

 

상청은 윗채이니, 우선 이 집이 윗채와 아래채로 분리된 것을 알겠다. 주문모 신부의 거처는 윗채 즉 안채의 안방 옆에 따로 들인 월방(越房) 즉 건넌방이라고 부르는 협방(挾房)에 있었다. 협방은 안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밀실이었다. 그 옹색하게 좁은 협방이 주문모 신부의 비밀 거처였다. 주문모 신부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강완숙과 그녀의 딸 홍순희, 그리고 김순이뿐이었다.

 

비녀 복점의 다음 공초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그 집의 모든 일은 홍문갑의 어미가 맡아 하므로 왕래하는 여러 사람이 모두 아랫방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항상 노주인이 지키는 안방에 있었기에, 비록 한 집 가운데 있었지만 건넌방의 일을 실로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요컨대 웃방에는 시어머니 유 아녜스가 있었고, 그 아랫방에 강완숙이 지냈다. 주문모 신부가 거처하던 협방은 강완숙의 아랫방에 딸린 협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문모 신부의 방은 유 아녜스의 웃방과 강완숙의 아랫방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집 뒤편으로 난 별도의 출입문이 있었을 것이다.

 

1801년 3월 15일의 의금부 공초에서 주문모 신부는 “제가 그 집에 계속 머문 것은 또한 장소가 없어서 그 집 건넌방에 몸을 깃들여 묵었을 뿐입니다. 그 아들이 함께 잤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웃방에서 홍문갑의 어미와 함께 있었으니, 서로 지냄에 절대로 남녀가 구별하지 않는 처신은 없었습니다”라고 약간 다르게 진술하였다. 안채의 윗방 즉 안방에 강완숙이 시어머니 유 아녜스를 모시고 지냈고, 아들 홍필주가 신부와 함께 곁방에서 잤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는 이런 진술도 남겼다. “대개 조선 집의 제도는 천하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다릅니다. 비록 4, 5칸의 초가집도 내외 구분이 반드시 몹시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도망해 달아난 사람이 만약 사랑방에서 지낸다면 며칠이 못 가서 바로 붙잡히게 됩니다. 저는 제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려 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매번 남의 집 중문 안쪽의 건넌방에서 지냈습니다. 그 집에 혹 남자가 있거나, 혹 남자가 없더라도 또한 한집에 사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라, 저는 이곳을 여관방과 같이 보면서 경문을 외우거나 묵묵히 기도하며 방문을 닫고서 가만히 수행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삿되고 더럽다는 두 글자를 가지고 더한단 말입니까?”

 

한편 안채에서 생활하던 다른 식솔에 대한 진술 역시 비녀 복점의 공초에 보인다. “홍문갑의 집에 늘상 왕래한 여자는 냉정동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의 여식 복임(卜任)과 아기씨 방에서 지내는 달님[月任], 아랫방에서 지내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씨, 늘상 노말루(老抹樓) 아래 조카딸로 불리는 여자 등입니다”라고 했다. 복임은 성이 박씨였고 세례명은 투다(投多: 테오도라)였다. 동정녀 김달님은 강완숙의 딸 홍순희와 한방에서 지냈고, 아랫방 아기씨는 동정녀 윤점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렇게 보면 안채에는 유 아녜스의 웃방과 강완숙의 안방, 그리고 그 사이 주문모 신부가 숨어지내던 협방, 이와 별도로 홍순희와 김달님이 거처하는 방과 윤점혜의 아랫방, 다시 홍필주의 처나 처형 및 질녀가 거처하는 방까지 포함해 안채에는 최소 여섯 개의 방이 있었던 셈이다.

 

 

아래채 사람들

 

손님이 머무는 객방과 여종과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은 아래채에 별도로 있었다. 여종은 소명과 정임, 복임이 있었고, 여기에 동의 어미와 윤례 어미 같은 여자들이 주로 음식 수발을 담당했다. 이밖에 집안의 허드렛일과 바깥 심부름을 맡았던 김흥년이 있었다. 소명은 원래 한신애의 여종이었는데, 18세 때 강완숙의 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24세 때까지 7년간 이 집에서 강완숙을 모시며 교회의 비밀스러운 심부름을 도맡았다. 여종 정임은 강완숙의 집에 온 지 3년 째였고, 윤례 어미와 함께 신부의 식사 준비를 담당했다. 규모가 있다 보니, 남자의 일손도 필요했다. 「사학징의」 속 김한봉의 공초를 보면, 자신의 이종사촌 최춘봉이 어머니와 함께 이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밖에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교회의 일과 교리 공부를 함께하던 그룹들이 있었다. 비녀 복점의 공초를 보자. “냉정동 남생원(南生員) 댁 안 양반과 수구문 안 조예산 집 안 양반이 찾아오면, 혹 보름이나 수십일 동안 계속 머물렀습니다. 여염집 여인으로는 어디 사는지도 이름도 모르는 4, 5명이 왕래하며 경문을 외우면서 날마다 함께 모였습니다. 자세히 물어보면 첨례 기일 3, 4일 전에 와서 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복혜 간지대와 김연이 율리아나, 비녀 윤복점 레지나 등 사학매파 3인방을 비롯하여 문영인과 강경복, 서경의 같은 궁녀나 나인들도 출입이 잦았다. 그 밖의 출입 인원 또한 대부분 여성이었다. 남성들은 각 거점별로 신부를 모셔갈 때나, 신부의 재가가 필요한 긴급한 현안이 있을 때만 강완숙의 집을 찾았다.

 

홍어린아기연이는 강완숙의 바로 뒷집에 살았고, 그 집에는 우물이 두 개나 있었다. 1800년 겨울 강완숙의 집에 화재가 났을 때, 그의 아들인 좌포청 포교 강득녕이 불을 꺼준 일도 있었다. 뒷문을 만들어 수시로 왕래했고, 폐궁 나인 강경복의 어미가 그녀의 집 곁채에 세들어 산 인연으로 서학을 전파하기도 했다. 왕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므로 강완숙 집의 여종들은 집에서 나오는 빨래나 허드렛일을 들고 홍어린아기연이의 집으로 건너가서 해결했던 듯하다.

 

강완숙의 집에서는 강습과 첨례가 수시로 열렸다. 첨례는 강완숙의 안방에서 신부의 거처인 곁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고 진행되었다. 유덕이는 공초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교종(敎宗)이라 일컫는 사람이 협실에 앉아있고, 그 집 모녀와 집안에 있는 여자아이와 과부, 침교(沈橋) 조예산(趙禮山: 조시종)의 처 한신애, 동네 이름을 알지 못하는 홍주부(洪主簿)의 처 등 여러 사람이 좌우로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은 뒤에 강완숙이 강론하는 책을 가지고 이를 외웁니다.”

 

첨례 때는 주문모 신부의 거처인 협실이 개방되었다. 신부가 협실 중앙에 앉고, 여성 신자들이 안방의 좌우에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으면, 강완숙이 책을 외워 강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혜의의 공초에는 신부 뒤편에 십자가와 함께 족자가 걸렸는데, 예수가 잔혹한 형벌을 받는 형상을 그려 놓았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절을 올리고, 엎드려 입으로 사서를 외운다고 썼다. 이로 보아 신부의 거처에는 소박한 형태로나마 제대가 꾸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서 홍필주가 복사를 섰다. 손님인 주문모 신부를 제외하면 20명이 넘는 집안에 남자라고는 홍필주와 최춘봉 정도뿐인 여성의 집이었다.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은 언제나 강완숙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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