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91) 알 수 없는 이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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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91) 알 수 없는 이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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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1) 알 수 없는 이존창

수차례 배교한 이존창, 마지막 선택은 순교였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전파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인물이었지만 감옥에 잡혀갈 때마다 배교를 맹세해 석방을 거듭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림은 형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이존창이 가족들을 데리고 한겨울에 고향을 떠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초기 교회사의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

 

이존창의 존재는 초기 교회사에서 특별하고 특이하다.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며 충청도 교회를 견인했던 거물이었다. 「송담유록」을 보면, 선대의 신분이 노비였으나 면천되었고, 뛰어난 두뇌로 권철신의 강학에 참여하여 당당히 인정받았다. 1787년 그가 신앙 활동 중에 체포되자 이기양의 아우 이기성이 천안까지 찾아와 감옥에 갇힌 그에게 큰절을 올리고 군수에게 석방을 탄원한 일까지 있었다. 노비 출신임에도 딸을 사대부 명문가의 며느리로 시집 보냈다. 천주교가 신분을 타파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이 일은 앞서 여사울 교회를 소개하며 자세하게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할애한다.

 

그가 진심과 성심으로 개종시킨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내포 교회의 주축으로 성장하였다. 이존창의 일상은 전교 그 자체였다.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믿음이 샘솟았다. 그는 지치지 않은 열정의 소유자였다. 달레가 그를 두고 위대한 재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는 윤유일과 황심과 김유산을 북경 밀사로 파견하는 데 관여하였고, 신부 영입을 설계하고 주도했다. 천안에서의 군교 노릇은 어찌 보면 신분 세탁과 안전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설계로 여겨질 정도다. 그는 이 같은 역량과 영향력으로 내포 교회를 조선 교회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그가 최초로 관에 의해 체포된 것이 1787년이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87년 예산 현감 신사원이 천안 군수 조정옥에게 공문을 보내 천주교 문제로 이존창을 체포케 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검거였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교회, 신분의 벽을 허물다」에서 상세하게 살핀 바 있다.

 

신사원은 1791년 진산 사건 당시에는 진산 군수로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부처님 같은 분이란 말을 들었을 만큼 백성을 위하는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신사원은 본의 아니게 천주교 문제와 깊게 얽혔다. 진산 사건 당시 평소 성품대로 문제를 온건하게 처리하려 했던 그의 태도가 홍낙안에게 항의 편지를 받게 만들었고, 이후 이 때문에 일이 더 커졌다.

 

달레는 이렇게 썼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첫 번 박해 때 나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 전파에 가장 많이 활동한 이들 중 한 사람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때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

 

조선 최초의 신부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의 조카의 손자였다. 이 밖에도 김광옥, 김성옥, 인언민, 이성례, 홍지영, 원백돌, 양재, 김만득, 한봉이, 이개봉, 황유복, 최관복, 김명복, 유복철, 이취한, 최거두금, 이복돌, 김유산, 유가, 안성교, 최억명, 최필제, 홍필주, 황일광, 최여겸, 김순재, 유순철, 김명주, 김홍철, 김인철, 고윤득 등 수많은 초기 교회 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이 모두 그를 통해 입교했던 인물들이다.

 

 

가장 슬프고 창피스러운 배교

 

그는 여러 번 잡혀가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배교를 맹세하고, 개전의 정을 보여 석방되었다. 달레는 그의 이같은 반복된 배교를 ‘내포 천주교 신자들의 가장 슬프고 창피스러운 일’으로 규정했다. 1791년 공주 감영에 체포되어 배교할 당시의 사정은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의 수기에 거의 날짜별로 중계방송되고 있다.

 

1791년 11월 13일의 보고에 이존창을 잡아와 형벌을 가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고 했다. 처음에 버티던 이존창은 11월 20일의 보고에서는 서학을 배척하여 요술이라 하며 바른길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11월 29일에는 한결 명확한 태도로 배교를 선언했다. “이존창은 날마다 타이르고 부지런히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모습을 보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 사학을 떠나 정도로 돌아올 것을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 입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모욕하며 소라 하고 말이라 하였으니,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고친 것이 이처럼 분명합니다.”

 

또 「수기」 1792년 1월 3일자 공문에 이 같은 표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학문을 배척하여 극구 모욕하며 자신을 소, 말, 개, 돼지에 비유한 뒤에는 정말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이때 이존창은 배교의 진정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신앙을 계속 유지할 경우 스스로를 소나 말이라고 하겠다고까지 말했던 것 같다. 정조는 이 말을 듣고 12월 1일에 이존창을 석방하라는 밀지를 내려보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존창은 12월 15일쯤 천안에서 또 체포되었다가 20일 이후에 다시 석방되었다. 이때는 배교의 증거로 사학서를 모두 모아 바치겠노라는 다짐을 함께 냈다. 이때 그를 다시 체포한 것은 충청도 사학 조직이 생각 외로 덩굴이 크게 번져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0일경 배교를 거듭 맹세하고 재차 석방된 이존창은 신앙을 버리는 대신 고향을 버렸다. 12월 30일 밤 그는 여사울을 떠났다. 새해를 새로운 곳에서 새로 맞이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가 떠날 때 300가구가 넘는 동네 주민들이 일제히 나와 아버지나 형, 친구를 잃는 심정으로 그를 전별하는 광경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에 대한 그곳 주민들의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 길로 홍산(鴻山)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포교의 거점을 세웠다.

 

 

조건부 체포와 군교 노릇

 

네 해 뒤인 1795년 7월 29일에 정약용이 사학 세력 근절의 밀명을 받고 금정찰방으로 내려왔다. 당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 이후 사학 세력 검거를 통해 비등하던 서학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벗어야 하는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있었다. 검거망이 좁혀오자 이존창은 보령 땅 성거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성거산에 숨어든 이존창을 붙잡은 것은 정약용이었다.

 

이때의 체포는 사전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797년 2월 23일 「일성록」의 다음 기록 외에도 여러 증거들이 남아 있다. “이존창은 재작년에 금정 찰방(金井察訪)의 염찰(廉察)에 걸려, 충청도관찰사에게 말해 감영의 감옥에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그가 바친 공초를 보니, 전날에 뉘우쳐 깨달은 것과 하나하나가 상반되었고, 심지어 다만 빨리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날 공초를 바친 것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풀려나 돌아온 뒤에 옛 습관을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재작년, 즉 1795년 당시의 금정찰방은 정약용이었고, 이존창이 당시 정약용의 염찰에 걸려서 체포되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1795년 당시 이존창은 배교를 거부한 채 빨리 죽여달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처형을 면하고 공주 감영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97년 충청도 일원에 사학 검거 선풍이 불자 그는 다시 문초를 받았고, 이번에도 죽음을 면했다. 그 와중에 1796년과 1797년 황심을 북경 밀사로 보내는 데 관여했고, 1798년과 1799년에도 김유산을 북경으로 보내는 일을 주도했다.

 

1799년 6월경, 이존창은 도내를 순시 중이던 충청감사 이태영 앞에 다시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다. 이에 그는 공주 감영에서 천안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그는 1801년 체포 때까지 행수 군관 노릇을 하며 천안 읍내에 머물렀다. 그는 매달 1일과 15일에 보고를 올려야 했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전의 존경을 받았다. 1801년에 다시 공주로 이송되었고, 이후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2월 28일에 공주에서 참수되었다. 처형 당시 42세로, 그는 중병을 앓아 신문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를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황일광이나 박취득 같은 민초들이, 내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고, 인생은 아침 이슬이요, 삶은 나그넷길이며, 죽음이 본향으로 돌아감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기쁘게 순교의 길에 나섰던 것과 달리, 이존창은 여러 번 습관적으로 배교 행동을 반복했다. 자신을 소나 말에 견주고도, 돌아 나와서는 교회 재건의 선봉에 서곤 했다. 그의 배교가 일신의 안위보다 교회를 수호코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승훈의 배교와는 구분해야 할 점이 있긴 하나, 씁쓸함은 남는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이렇게 썼다. “이존창은 충청도에 전교한 죄로 공주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이 사람은 여전히 배교한 가운데 있었기에, 죽음에 임하여서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그가 좋게 죽었다고 전하지만 감히 갑작스레 믿지는 못하겠다.” 황사영조차 그의 회두(回頭)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고산을 찾았을 때도, 신부는 이존창에게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배교는 당시 교회 내부에 두고두고 많은 논란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장면 또한 특별히 거룩한 징표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 칼질 끝에야 땅 위로 굴렀다. 희광이가 사형수의 고통을 가중시키려고 고의로 장난친 결과였다. 「추안급국안」에 사형선고문이 실려 있다. “오래 감옥에 갇혀 선처가 불가능한 처지에서도 풀어주었는데 새로워지기를 약속하고도 고쳐먹지 않았다.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우리는 그의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가? 배교의 나약함인가? 배교를 약속해놓고도 끝내 고쳐먹지 않았던 마음인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3월 20일, 정민(베르나르도, 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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