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95) 「고려주증」과 「고려치명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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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95) 「고려주증」과 「고려치명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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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5) 「고려주증」과 「고려치명사략」

조선 교회의 굳건한 신앙 본받으려 중국에서 펴낸 조선 순교사

 

 

「고려주증」은 지금부터 143년 전에, 「고려치명사략」은 122년 전에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된 조선교회 순교사이다. 이 두 책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바탕을 두었으나, 중국의 전통적 역사 편찬 방식을 도입해서 「고려주증」은 열전체로, 「고려치명사략」은 강목체로 새롭게 편집했다.

 

 

조선 천주교인 전기집 「고려주증」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GLISE DE CORE)」 2책은 1874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이 파리외방선교회 출신 신부를 통해 중국에 들어오자, 프랑스 신부들은 이 놀라운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중국 교인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지 불과 5년 만에 한문으로 편집하여 간행되었다. 한국에서 이 책이 프랑스에서 간행된 지 105년 뒤인 1979년에야 번역 출간된 것과 비교된다.

 

이 시기 청나라는 19세기 중반 2차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서구의 환상이 무참히 깨졌다. 18세기 후반 백련교도의 난 이후 1850년대 태평천국의 난으로 중국 전역에 큰 소요가 오래 지속되었다. 1860년대에는 외세에 대항하는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다. 1876년에는 대기근으로 900만에서 1300만 명이 죽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변법자강운동의 와중에 1865년에 중국에 들어온 프랑스 신부 은정형(殷正衡, Sraphin Bazin, 1840∼1914)은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해 환난 속에 놓인 중국 신자들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은 신부는 1878년 9월 22일부터 중국인 신자 진광형(陳光瑩)에게 자신이 달레의 책을 편집하여 인명별로 정리한 내용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진광형은 신부의 구술을 한문으로 받아 옮겼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5개월 만에 초고를 마쳤다. 이후 3개월간 베껴 쓰고 윤문해서 1879년 5월에 초고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완성되어 은 신부의 연고가 있던 중경(重慶)에서 간행된 2책 5권의 책자가 바로 「고려주증(高麗主證)」이다. 지금으로부터 143년 전의 일이다.

 

「고려주증」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인물 중심의 열전체로 바꿔, 인물별로 모아 묶었다. 권1은 이벽 외 35명, 권2는 정철상 외 89명, 권 3에는 이여삼 외 73명을 수록했다. 권 4는 남문후(남명혁) 외 118명, 권 5에는 주문모 신부 외 14명의 사제의 전기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고려주증」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모두 329명의 전기를 추출하여 오롯하게 정리해냈다.

 

이 방대한 작업을 5개월 만에 마친 것은 실로 놀랍다. 은정형 신부의 정리 원고가 먼저 완성된 상태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이 작업에 몰입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한 작업량이었다. 통사로 집필된 달레의 원책을 인물 위주로 재편한 결과 「고려주증」은 「한국천주교회사」와는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프랑스 본국에서 「한국천주교회사」가 간행된 지 불과 5년 뒤에 인물 중심의 중국어 편집본이 전혀 새로운 면모를 갖춘 채 출간된 것이다.

 

 

인명 표기의 착종과 신부들의 전기집

 

책 속의 인명 표기는 대부분 엉망이었다. 윤지충(尹持忠)은 윤지총(尹之聰)으로, 최창주(崔昌周)를 최충주(崔忠州)로, 이중배(李中培)는 이종보(李宗輔)로 표기하는 식이다. 궁녀 문영인은 아예 문신혜(文信惠)로 이름을 바꿔 놓았다. 성명 표기가 이처럼 엉망이 된 것은 달레가 알파벳 표기로 적어둔 이름을 진광형이 중국 발음으로 유추해 한자로 옮겨적었기 때문이다.

 

매 사람마다 이름 아래 성명(聖名)을 적고, 죽은 해를 썼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도 ‘이씨’나 ‘김과부’와 같은 방식으로 빠뜨리지 않고 소개했다. 순교자만이 아니라 교회사에서 의미있는 활동을 펼친 인물들의 전기도 수록하였다. 정약용의 항목도 있는데, 뒷부분만 소개한다.

 

“그는 비록 현달하여 귀한 신분이었지만, 천주를 공경하는 정성은 감히 소홀하거나 게으르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노력을 더해, 길이 고치지 않았으므로 뜨거운 사랑의 지극함을 더욱 느꼈다. 그는 평소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고요히 침묵하며 재계하였다. (중략) 그는 착한 표양과 행실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켰다. 도광(道光) 15년(1835)에 천주께서 특별히 그 정성을 알아보시고 정표(旌表)를 내리셨다. 늙어서는 성회(聖會)의 비밀스러운 자취를 온전히 정리하였고, 심한 질병 없이 편안하게 선종하였다.

 

끝에 성회의 비밀스러운 자취를 온전히 정리했다 함은 정약용이 지은 「조선복음전래사」를 두고 한 말이다. 은정형과 진광형은 달레의 책을 번역만 하지 않고 자신의 문체로 새롭게 녹여냈다. 곳곳에 인물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평가가 들어 있었다.

 

권 5에는 조선에 들어와 사목하다가 순교한 신부 14인의 전기를 따로 수록했다. 처음 주사탁(朱司鐸)은 주문모 신부의 성씨를 잘못 썼다. 범감목(范鑒牧)은 조선 2대 앵베르 주교로 한국 이름은 범세형 라우렌시오였다.

 

책 앞에 진광형과 양자량(楊子良), 은정형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은정형 신부는 「고려주증소인(高麗主證小引)」에서 이 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주증」이라 한 것은, 고려국 사람들이 성교(聖敎)를 높이 받들어 계명을 각별하게 지키고,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관리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은 채, 겹겹의 풍파를 만나고 여러 번 함정에 떨어지면서도, 갖은 험난함을 딛고 온갖 죄의 그물에 떨어져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죽도록 변치 않아, 차라리 가업과 재산, 처자와 친우를 버릴망정, 몸을 버리고 순교하여 강개하게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전혀 두 마음을 먹지 않았고 감계를 드리움이 영원하므로 특별히 책의 제목에 밝힌 것이다.”

 

또 별도로 쓴 서문에서도 은정형 신부는 “이 책은 후세가 본받기에 충분하니, 우리들 또한 항상 그 덕을 본받고 언제나 그 아름다움을 따르자”고 하여, 당시 광란의 폐허 위에서 중국 사제와 신자들이 조선 교회의 모범을 따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더욱 굳건히 세우기를 바라 이 책을 펴냈음을 밝혔다.

 

또 신부의 명에 따라 신부의 구술을 한문으로 옮긴 진광형은 자신이 쓴 서문에 이렇게 썼다. “다만 고려의 교우는 또 종도(宗徒)가 가르침을 드리움이 없었고, 또 각 성인의 훈계도 없었으며 아무도 전하여 가르침이 없었다. 가르침을 받들던 시초를 살펴보면 중국에 사신 오는 길에 경전을 얻어서, 마침내 직접 전하여 스스로 받들며, 삼가 가르침을 지켰으니, 정절이 깨끗하고도 매섭고 정성이 아름답다 할 만하다. 게다가 국왕이 금지함은 지극히 엄하고 긴밀하였고, 수색하여 살육함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지극하였다. 죽는 이가 많을수록 우리 주님께서 묵묵히 지켜 주심은 더욱 많아졌고, 성령의 은총을 내리심은 갈수록 점점 더 기이해졌다.”

 

지금으로부터 143년 전에 프랑스 신부와 중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 교회에 대한 평가가 이러했다. 진광형은 조선 교회가 성직자의 파견 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룩한 자생적 교회임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 점은 세 편의 서문이 한결같다.

 

 

「고려치명사략」과 심칙관 신부

 

「고려주증」이 간행되고 21년 뒤인 1900년에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신부 심칙관(沈則寬, 1838∼1913)은 상해 토산만(土山灣) 인서관(印書館)에서 한문으로 168쪽 분량의 「고려치명사략」을 펴냈다. 지은이 심칙관 신부는 강소성 운간(雲間) 사람으로 호가 용재(容齋)이다.

 

은정형 신부의 「고려주증」이 인명별 전기집의 형태였던 데 반해, 「고려치명사략」은 제목 그대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사를 모두 23장에 나눠 정리한 교회사였다. 이 책은 강목체(綱目體) 또는 기사본말체의 서술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이 책은 조선 천주교회사의 전반적 흐름을 간명하게 정리한 통사가 되었다. 제1장 ‘고려개교연기(高麗開敎緣起)’에서, 제23장 ‘교사교민동시치명(敎士敎民同時致命)’에 이르기까지, 1784년 이승훈의 입교에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천주교회사를 담아냈다.

 

서문에서 심칙관은 처음 집필의 계기에 대해, 당시 상해 천주교회에서 펴내던 「성심보(聖心報)」라는 잡지에 자신이 조선 신자들의 순교 사실을 띄엄띄엄 소개했는데, 호응이 좋아 글을 모아 간행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였다고 했다. 「성심보」는 1887년 6월 창간된 월간지로 심칙관 신부는 한때 이 잡지의 발행인을 맡았다. 당시 이 잡지의 특집 기사를 통해 조선 교회의 소식과 순교자의 전기가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던 듯하다.

 

심칙관 신부는 책의 서문에서 “조선 신자가 순교한 것이 가깝게는 30, 40년 전의 일이고, 김육품(金六品) 같은 이는 우리들이 일찍이 직접 만나보았으며, 처음 가서 전교했던 주문모 신부는 또 나와 같은 나라 같은 성(省) 사람이다”라 하였다. 책에 김육품이란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제14장은 제목이 ‘김육품이 조각배로 신부를 맞이하다(金六品片舟迎牧)’이기도 하다. 육품은 부제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김육품은 김대건 신부의 부제 시절을 일컬은 것이다.

 

「고려치명사략」은 1900년 당시 의화단의 난으로 전국의 교회가 초토화되고 신자들이 무자비하게 살육되는 와중에, 교우들이 이 환난을 조선 순교자들의 굳건한 신앙의 표양을 본받아 이겨내야 함을 강조하면서 저술되었다. 「고려치명사략」의 인명 표기는 「고려주증」의 오류를 많이 바로잡았다. 달레의 책 이외에 다른 기록을 반영했다는 뜻이다. 그의 교회사 정리는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핵심을 잘 간추려 내서 가독성이 아주 높다. 군데군데 설명에 오류가 있으나, 지금 번역해서 옮기더라도 깔끔한 한 권의 조선 교회사의 구실이 충분하다.

 

「고려주증」은 지금부터 143년 전에, 「고려치명사략」은 122년 전에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된 조선교회 순교사이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는 통사를 표방했지만, 기본 사료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편집 원칙에 따라 중간중간 방만한 자료들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첨부된 소스 북에 더 가까웠다. 이 두 책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바탕을 두었으나, 중국의 전통적 역사 편찬 방식을 도입해서 「고려주증」은 열전체로, 「고려치명사략」은 강목체로 새롭게 편집했다. 원전의 방만함을 특색 있게 손질해 전혀 새로운 느낌의 책으로 재탄생시켰다. 중국뿐 아니라 국내에서조차 이 두 책에 대한 연구는 이제까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고 의아하다. 두 책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 책이 아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4월 1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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