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1 · 끝) 페르난도 보테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1 · 끝) 페르난도 보테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
20세기 교회의 변화·쇄신 향해 담대한 발걸음 내딛는 요한 23세
- 페르난도 보테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1972년), 바티칸 박물관 현대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로마.
2000년 교회사의 장면들을 이미지로 기록을 남긴 예술가들 덕분에 시기와 사건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60회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매번 어떤 작품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었다. 교회는 계몽주의 시대부터 부각된 현대 세계의 새로운 사조와 경향들에 반대와 경고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인류는 스스로 재앙을 불렀다.
베네딕토 15세 교황 이후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교황은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세계 평화와 화해를 위해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에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외치며, 유럽의 재건과 일치를 호소했다. 공산 정부로부터 박해받는 교회가 속출했고, 그 지역 성직자와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속에서도 교황들은 할 일을 했다.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이끌다
비오 12세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있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재임 1958~1963) 추기경이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됐다. 77세였다. 연로한 상태에서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차기 교황을 위한 징검다리 교황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뒤엎고 큰일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선택했는데, 1400년대 초, 서구 대이교 논란 속에서 1419년 ‘대립 교황(antipapa)’ 요한 23세(발타사레 코사)가 물러간 뒤 거의 500년간 아무도 그 이름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론칼리가 당당하게 똑같은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발타사레 코사에 대한 교회사의 논란을 종식했다.
그다음은 파란만장한 교회사를 돌아보며, 시선을 미래로 향해 ‘기쁨과 희망’(Gaudio et spes, 사목헌장)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겨우 90여 년이 지났고, 세계는 냉전 상태였다. 하지만 요한 23세 교황은 교회가 더는 세계와 괴리된 채 교회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이제 ‘우리가 바뀐 현대세계에 맞추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자연스럽게 창조주의 뜻에 따르도록 교화’하자고 했다.
지난 세기까지 숱한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른 것은, 교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명령’하던 데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섬기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적응’, ‘쇄신’으로 번역되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로 표현된 교황의 대담한 행보 덕분에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이미지와 사명’을 인식하는 동시에 ‘성덕에 대한 보편적 소명’도 깊이 인식했다. 전례 개혁 및 교회 일치 운동, 현대 세계에서의 적응과 대화, 평신도 사도직,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변화의 측면들이었다.
교황은 1962년 공의회 개막(10월 11일) 주일을 앞두고, 10월 4일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아 기차를 타고 아시시와 로레토를 방문, 공의회 성공을 위해 기도했다. 이것도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처음 로마 밖으로 여행한 사례였다. 세상을 보지 않고는 그 눈높이에 맞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더욱이 공의회를 막 시작한 즈음(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문제로 미국과 소련 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요한 23세는 미국대통령 존 F. 케네디와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서신을 보내 평화를 중재했다. 후에 두 국가의 지도자는 교황의 헌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공의회 중인 1963년 4월 11일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반포했다. 여기서 그는 평화의 범주를 확대하여, 총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의 대척점으로서만이 아니라, 빈부 격차와 노동 문제 등 현대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도 평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그 맥락에서 처음으로 진단했다. 그해(1963년)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뚱뚱함의 미학’ 추구한 화가
소개하는 마지막 작품은 ‘뚱뚱함의 미학’으로 유명한 현대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로 알려진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Angulo, 1932~)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1972년)라는 작품이다. 바티칸 박물관 현대미술관에 있다.
어린 시절, 바로크 건축과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의 단테 「신곡」 판화 시리즈에 반해 그림과 조각을 시작했고, 16세부터 삽화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1952년 20살 때 보고타 국립도서관 주관 콜롬비아 예술가 대상 제9차 살롱전에서 ‘해변’으로 2위 수상을 했고, 그 상금으로 유럽으로 연구 여행을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서 프란치스코 고야와 티치아노를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하며 전통에 남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최고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조토와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들에 크게 영감을 입어 그들의 작품을 여러 번 모작하기도 했다. 시에나와 토스카나 학파의 많은 예술가도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귀국 후 결혼과 함께 멕시코로 이주한 뒤, 워싱턴과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제10회 보고타 살롱전에서 다시 2위를 수상하며, 고국으로 귀환했다. 1958년 보고타 국립 아카데미아 회화 교수가 되며, 제11회 살롱전에서 드디어 ‘신혼부부의 방’이라는 작품으로 1위 수상을 했다. 이후 남북미와 유럽을 오가며 많은 전시회를 했고, 그의 작품이 이름난 세계 도시들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회화를 이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에 의한 내적 욕구의 표현으로 보았다. 이런 욕구는 절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색은 언제나 희미하고, 강력하지도 열광적이지도 않다. 대체로 윤곽이 없고 평이하고 균등한 배경에 그림자가 없다. 색이 너무 강하면 전달하려는 내용이 훼손될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거의 비현실적으로 뚱뚱하게 표현함으로써 인체의 형태를 새로 제시하고, 다빈치,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형태로 재해석했다. 풍경 속 인물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배경을 크게 잡음으로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주인공들의 시선을 허공에 가두는 등 그만의 특징이 있다.
당시 콜롬비아의 일상에 깊이 파고든 ‘폭력’에 관한 문제도 그는 회화에 담았다. 비록 자신은 풍자한 것도 사회 비판적인 표현도 아니라며, 단지 큰 형태와 감각적인 볼륨으로 그린 것뿐이라고 하지만,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루벤스의 ‘시인’을 재해석한 것에서, ‘날씬함’만을 추구하는 사회 현상을 풍자하고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표현한 교회는, 성경 속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성화보다는 ‘사라져가는’ 성당, 종탑, 지붕(돔) 등을 ‘모성’과 일치시킴으로써 한때 잘 알려지고 흔했던 ‘아기를 안은 성모’와 동일시하는 특징이 있다.
현대 세계의 변화에 응답한 교회
변화를 거듭하는 세계 속에서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이고, 교회의 자원을 모두 가동해 현대 세계의 변화에 응답하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루살렘 공의회, 트렌토 공의회와 함께 교회 자신의 체질을 바꾼 역사상 가장 중요한 3대 공의회의 하나로 평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3000명가량이었다. 역사상 가장 성대했고, 필요했고, 성공적인 공의회였다. 연로한 주교들은 3년간, 거의 목숨을 걸고 매일같이 교회의 변화를 위해 고단한 작업에 임했다. 공의회 개막 미사를 주례한 요한 23세도 공의회 회기 중간에 세상을 떠났고, 공의회 중간에 콘클라베(교황 선출 투표)를 해야 했다. 이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를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선출했다. 바오로 6세는 1965년 12월 8일, ‘새로운 성령 강림’으로 규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16개 문헌(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문)을 발표하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3년간의 길고 역동적인 시간을 장엄 미사로 마무리했다.
그림 속으로
세상의 아픔과 슬픔, 기쁨과 희망을 안고 역사의 새로운 행보를, 소개하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모든 피조물과 함께 시대의 다양한 형태에 편승하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아니”라고 말하면서 조용한 걸음을 시작했다. 멀리 배경의 산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한 과거를 의미한다면, 이제부터 교회가 걸어가는 길은 현실이고, 현대 세계에서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도 교회의 이 걸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21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 연구원 상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