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발걸음 따라 900㎞ 웨딩마치 -정현우·이혜민 부부 관면 혼배 후 산티아고로, 42일 걸으며 ‘땀의 결혼식’
정현우·이혜민 부부 관면 혼배 후 산티아고로, 42일 걸으며 ‘땀의 결혼식’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하고 웨딩 촬영을 한 정현우·이혜민씨 부부. 이혜민씨 제공 |
화려한 웨딩드레스도, 고가의 결혼반지도, 잘 차려입은 하객들도 없었다. 등산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멘 이들 앞에는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길만이 펼쳐져 있을 뿐. 가파른 오르막길과 평평한 길, 내리막길을 42일간 걸으며 둘은 ‘땀의 결혼식’을 올렸다.
정현우(루카, 31, 수원교구 수리동본당)ㆍ이혜민(30)씨 부부는 지난 3월 ‘세상에서 가장 긴 900㎞ 웨딩마치’를 올렸다. 오랜 세월 수많은 순례자의 발걸음이 새겨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다.
“오랫동안 서로 둘만 의지한 채 걸어보면 무언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아내)
웹디자이너였던 남편과 그래픽디자인 기획 편집일을 했던 아내는 6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결혼을 결심했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위해 용기를 냈다. 남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한 것. 양가 부모를 설득하고, 직장까지 그만둔 둘은 성당에서 관면 혼배를 한 후 작은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챙겨 스페인행 비행기에 올랐다.
“각자 8㎏, 10㎏의 배낭을 메고 걸었는데, 첫날부터 너무 힘들었습니다. 피레네 산맥을 오르는데 눈도 많이 쌓여 있고, 대관령처럼 구불구불한 길에 한쪽은 낭떠러지이고, 차는 쌩쌩 달리는데 끝이 안 보이는 거예요.”(남편)
둘은 비바람을 맞으며 매일 20~30㎞씩 걷고 또 걸었다. 다퉜거나 지쳤을 때는 끈적이는 땀과 거친 숨만이 둘의 유일한 대화였다. 그러나 새의 지저귐과 무지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은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해 주는 듯했다. 주례자와 하객, 축가가 없는 둘만의 결혼이었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축가를 불러 주고, 주례에 버금가는 축복을 건넸다.
“루르드 성지에서부터 순례를 하고 있다는 한 가톨릭 신자에게 ‘우리는 결혼식 중’이라고 소개하자, 성수를 꺼내 축복의 기도를 해주셨어요. 힘들 때마다 많은 천사를 만났어요.”(아내)
둘은 반쯤 걸었을까. ‘고통을 덜어 주시고 지혜와 인내,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이혜민씨는 체력이 달려 발목과 무릎에 통증을 호소했고, 중간에 주저앉기도 했다. 순례길 결혼 행진을 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꿈꾸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도 잊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100㎞ 남겨 놓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자, 남편은 배낭 깊숙한 곳에 숨겨둔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함께 같은 길을 걷던 호주 청년이 기타로 축하 연주를 해 줬고, 인도에서 온 아저씨의 박수 속에서 정씨는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매일 20~30㎞를 걷다 보니 당장은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길은 언젠가 끝난다는 걸 배우게 됐어요. 방향만 잃지 않고 꾸준히 걷다 보면, 저희가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아내)
정씨는 “앞으로 결혼 생활에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산티아고를 걸었던 경험을 기억하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부부는 결혼 행진 과정을 페이스북(facebook.com/900km)을 통해 사진과 이야기를 공유했고, 많은 젊은이에게 용기를 줬다. 부부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