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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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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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허물고 성물 제작소 운영하며 조선 교회 본당 역할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2021.08.15발행 [16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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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귀한 명문가의 유복자

황사영은 명문인 창원 황씨 판윤공파의 후예였다. 황사영의 7대조 만랑공(漫浪公) 황호(黃, 1604~1656)는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었고, 황사영의 증조부 황준(黃晙, 1694∼1782)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든 국가 원로였다. 그의 아들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종가가 절손되자, 황준은 황재정이 죽은 지 7년 뒤에 태어난 7촌 조카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종가의 봉사손으로 들어간 황석범은 1771년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지냈으나,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774년 11월 22일에 28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황사영은 이듬해 1775년 봄에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 남자라고는 82세의 증조부 혼자뿐이었다.

황사영은 8세까지 증조부 황준의 사랑을 받고 자랐던 듯하다. 아슬아슬 이어온 집안의 명운이 이 귀한 아이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의 돌림자는 원래 ‘연(淵)’자였지만, 증조부는 아이가 집안의 대를 길게 이어가 주기를 바라 돌림자를 버리고 ‘사영(嗣永)’으로 지었다. 아이는 증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 16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진사시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그 같은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황사영은 서울 서부의 아현(阿峴), 즉 애오개에서 나고 자랐고, 15세에 장가들었다. 어머니 이윤혜는 이승훈의 가까운 일가였다. 정약현의 딸이었던 아내 정명련은 이벽이 외삼촌이고, 정약종과 정약용이 친삼촌이었다. 당시 황사영을 둘러싼 환경은 천주교 핵심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황사영이 16세로 진사시에 최연소 합격하기 한 해 전에 처삼촌 정약용이 대과에 급제했다. 정조는 이 영특한 소년이 다산의 조카사위임을 알았을 테고, 그마저 진사시에 급제하자 임금은 황사영에게 아주 특별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이때 소년은 앞서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서학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추안급국안」의 1801년 10월 10일의 공초에서 황사영은 자신이 양학(洋學)을 한 것이 11년이 되었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그가 서학에 입문한 것은 1791년부터다. 그러다가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그는 과거 시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앙의 길에 온전히 투신하였다. 앞서 본 「눌암기략」의 말대로 정약종과 이승훈에게 이끌려 그는 오로지 사학만 익히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황사영의 아현동본당

가족은 단출해서 자신과 어머니와 아내뿐이었다. 이웃에 삼촌 황석필이 살고 있었고 그도 천주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앙역노(仰役奴) 돌이(乭伊), 육손(六孫), 비 판례(判禮), 고음련(古音連), 복덕(福德), 비부 박삼취(朴三就) 등의 하인들이 한 집 또는 가까이에 살면서 황사영을 보필했다. 황사영의 집은 종가여서 사당을 모시고 있었지만, 그는 제사마저 폐기했다. 친척들과 벗들이 펄펄 뛰며 난리를 쳤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1797년에는 종갓집인데도 사당을 아예 허물어 버렸다.

「사학징의」를 통해 볼 때,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필공(筆工) 남송로(南松老)와 충주 사람 이국승(李國昇)이 그들이다. 남송로는 황사영이 사당을 허문 자리에 집을 짓자 거기에 입주해서 살았다. 이국승은 1795년 충주에서 검거된 뒤 배교를 맹세하고 풀려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여러 해 동안 황사영의 집에서 지냈다. 그의 집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아현동본당 구실을 감당하고 있었으므로, 측근에서 사람과 조직을 관리할 인원이 필요했다.

1800년 3월 강완숙이 대사동 집을 포기하고 충훈부 후동으로 이사했을 때, 홍필주의 공초에 따르면 황사영은 김계완, 이취안, 김이우 등과 함께 각각 100냥 씩을 헌금했다. 무엇보다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모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송로의 공초에는 황사영이 빈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성화(聖)와 예수상을 제작해서 팔아, 이것으로 교회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했다고 나온다. 당시 전국적으로 성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으므로, 벽동 정광수의 성물 공방과 함께 황사영의 성물 제작소도 꽤 큰 역할을 맡았던 듯하다.

두 사람 외에도 「사학징의」에 나오는 아현 거주 천주교 신자는 김의호(金義浩)와 그의 아들 김희달, 그리고 김치호(金致浩), 궁인(弓人) 한성호(韓聖浩), 최봉득(崔奉得), 고조이(高召史)의 언니, 목수 황태복(黃太福), 그리고 그 집 행랑채에 살았던 제관득(諸寬得), 그리고 이웃의 목수 한대익(韓大益) 등이 더 포착된다. 이들은 자주 황사영의 집에 물건을 만들어주러 갔다. 목수가 둘, 궁인이 둘인 것도 흥미를 끈다. 역시 성물 제작과 무관치 않으리란 짐작이다. 가깝게 왕래했던 송재기가 각수(刻手)였던 것도 그렇다. 이 밖에도 홍인, 권상문과 같이 비교적 왕래가 잦았던 인물들이 더 있다.



「사학징의」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

또한 황사영의 둘레에는 당시 조선 교회의 수뇌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 자리에 황사영은 예외 없이 함께 했다. 유관검의 공초에 따르면, 1796년 겨울 주문모 신부는 조선 교우를 대신해 북경 주교에게 조선 교회가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대박(大舶), 즉 서양 선박을 청하는 글월을 보냈다. 이때 이 서찰에는 서울을 대표해서 최창현과 황사영이 이름을 적었고, 호남에서는 유항검, 유관검 형제가 이름을 올렸다. 1796년 말에 이미 황사영은 조선 교회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위상이 굳건했다. 한신애도 공초에서 남자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양반으로는 정광수와 황사영이고, 중인으로는 이용겸과 김계완이라고 진술했다. 홍필주는 황사영 등이 자기 집에서 모인 것이 6, 7년 되었다고 했으니, 황사영은 1795년경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투신한 것이 분명하다. 홍익만도 1794년에 황사영의 집 등을 왕래하며 공부한 사실을 적고 있다.

어쨌거나 「사학징의」에서 검거된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혈당의 무리를 거론할 때 황사영은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온다. 필자가 「사학징의」에 나오는 인명의 출현 빈도를 조사해 보니, 황사영의 이름이 무려 380차례나 나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주문모 신부가 275번, 홍필주 189번, 강완숙이 128번이었다. 정약종은 102번, 이합규 101번, 최창현은 67번, 최필공이 58번, 최필제는 42번씩 각각 등장한다. 이 수치는 황사영의 당시 교회 내 비중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거점 조직의 관리와 확산

1795년 이후 천주교의 확산세가 가팔랐지만,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 지역의 경우, 저인망식으로 쫙 펼쳐진 천주교의 그물 조직은 대단히 촘촘했다. 당시 서대문과 남대문 및 중구 인근은 한양의 천주교 조직의 주 활동 무대였다. 각 지역별로 거점이 있었고, 거점별로 중심인물이 각각 포진하고 있었다.

강완숙과 홍문갑의 집은 주문모 신부를 모신 조선 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여기에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경윤, 손인원, 김계완, 정인혁 등 앞서 살핀 약국 주인들이 각각의 거점을 맡고 있었고, 황사영, 정광수, 이합규, 김이우, 최인길 등의 조직이 한 구역을 맡아 활발한 포교에 힘쏟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자연스레 조선 천주교회의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단위들은 1800년 이후로는 새로 설립된 명도회 조직을 통해 급속도로 그 세를 불려 나갔다. 주문모 신부는 매달 7일 명도회 집회 때마다 각 지부를 순방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주었다. 황사영의 집에도 주문모 신부가 여러 번 와서 미사를 드렸다. 미사는 황사영 집의 건넌방에서 진행되었다. 신자들은 관을 쓰고 무릎을 꿇고 앉아 예수의 화상에 절을 올리고, 경문을 외웠다. 말이 어눌한 신부를 대신해서 황사영이 교리를 설명했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시에 급제한 천재의 아우라로 인해 주로 황진사로 불렸다. 여기에 임금이 손을 잡았다 하여 손목에 두르고 다녔던 명주천, 명문가 종손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신앙에 투신한 모범 등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학문도 높았고, 글도 잘 썼으며, 무엇보다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주문모의 핵심 심복이란 말을 들었다.

그는 사람이 겸손하고 해맑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마음이 닿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특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긴 구레나룻과 준수한 용모는 많은 여성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당일로 죽은 지황의 아내 김염이는 입국 초기 주문모 신부의 의복을 지어 입혔던 여인이었다. 남편이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는 강완숙의 홀대와, 남편 사후에 발길을 끊어버린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다. 황사영만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감격한 그녀는 사흘을 황사영의 집에 머물러 자며 딸의 옷을 지어주고 돌아온 일까지 있었다. 이로 보아 황사영에게는 아들 황경한 외에 딸도 있었던 듯하나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1801년 2월 송재기의 집에서 도피 중이던 황사영을 처음 만난 최설애는 그 명성을 익히 들어온 터라 ‘상견이 늦었다’며 인사를 청했고, 그의 도피를 위해 상복을 지어주는 일을 거들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황사영에게 “지금의 행색이 비참하고 처량하니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황사영에게 마음이 끌렸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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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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