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94) 「니벽젼」과 이벽의 사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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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94) 「니벽젼」과 이벽의 사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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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4) 「니벽젼」과 이벽의 사세시

불순한 자료로 인해 이벽 성조의 고결한 신앙 흐려질 수 있다

 

 

숭실대 박물관 소장 「니벽젼」의 표지와 본문 끝부분 두 면. 「성교요지」를 언급했고, 마지막 면에는 이벽의 ‘사세시’를 수록했다. 가짜 책 「성교요지」의 진실성을 높이려고 만든 가짜다.

 

 

계열화된 위서의 계보

 

엄정해야 할 역사 기술에서 연구 대상에 대한 과도한 애정은 독이 될 때가 많다. 그 자체로 의미 있고 훌륭한 존재가 중간에 불쑥 돌출한 근거 없는 자료에 의해 오염되어 과장, 왜곡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모두 연구 대상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투사한 결과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만천유고」와 「성교요지」, 「유한당언행실록」 및 영세명부로 알려진 「망장(忘葬)」 등 14종의 천주교 관련 자료들은 예외 없이 1920년대 이후 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자료다. 세부를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처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김양선 목사가 같은 경로로 구입한 이들 자료들은 계열화된 위서의 계보를 구축하고 있다.

 

「만천유고」나 「성교요지」 말고도 초기 신자들의 영세명부인 「망장」에 실린 인적 정보는 확인되는 것만 수십 군데가 넘는 터무니 없는 오류투성이여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수준이다. 「유한당언행실록」의 저자 안동 권씨는 권철신과는 상관도 없는 집안인데, 권철신이 버젓이 숙부라며 서문을 쓴다. 이들 자료의 위작성에 대해서는 이미 윤민구 신부가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에서 충분하고 타당하게 입증했기에 따로 더 보태지 않겠다.

 

이 같은 저급한 수준의 위서에 홀려 그간 「성교요지」에 대한 수십 편의 논문과 단행본이 간행되었다. 문제는 위서임이 명백하게 밝혀진 뒤에도 혹세무민의 자기방어 논리가 공격적으로 계속되는 점이다. 마틴 목사의 「The Analytical Reader(상자쌍천)」는 한자 학습 교재로서 우수성이 인정되어, 현재까지도 알라딘이나 교보문고에서 1863년 초판을 고화질로 최근 영인한 책자가 외국 서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윌리엄 목사가 이벽의 「성교요지」를 훔쳐 베껴 자기 책으로 만들었다는 한국 천주교회 일각의 주장을 원저자 쪽에서 듣게 된다면, 망신도 이런 국제적 망신이 없다. 지금도 위작임을 밝힌 연구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붓는 행위가 자행되기까지 한다. 수십 년 가짜에 속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대중까지 속이려 든다.

 

「성교요지」 및 「이벽전」 등 일련의 자료에 대한 논란은 진작에 종지부를 찍었어야 마땅하다. 교회사 연구가 이 정도의 자정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심각하다. 너무도 자명하고 명백한 사실을 외면한 채, 연구자를 불순한 의도로 매도하고 논의 자체를 원천 봉쇄해 입막음의 시도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말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의 침묵은 더 큰 문제다. 이는 자칫 이벽의 시성시복 청원에 심대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신앙 선조로서 이벽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기려져야지, 일제 강점기에 바르지 못한 의도를 가진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책에 의해 거짓 아우라를 덧씌워서는 안 된다.

 

 

종말론적 사유가 담긴 「니벽젼」과 사세시

 

「니벽젼」은 표지의 제목이고, 속 표제는 「니벽선생몽회록」이다. 이벽 선생을 꿈에 만나본 이야기란 뜻이다. 소설은 1846년 6월 14일 밤 꿈에 정학술 아오스딩이란 사람이 이벽과 만나며 시작된다. 이벽은 자신이 죽은 지 60년 만에 정학술의 꿈에 현몽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1786년에 쓴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세상에 전할 것을 그에게 명하였다.

 

「천주밀험기」에는 「천당지옥기(天堂地獄記)」, 「령득경신기(領得庚申記)」, 「험세문득기(險世聞得記)」, 「래셰례언긔(來世豫言記)」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래셰례언긔」는 1786년 병오년부터 1846년 병오년까지 60년간 벌어질 일에 대한 예언을 담았는데, “병오년 이후로는 내세가 임하여 죄 있는 자가 모두 토멸을 당하고, 선하고 천주를 공경하는 자가 혹 세상을 이어갈 때가 오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일종의 종말론의 사유를 담은 책이었던 셈이다.

 

「니벽전」의 본문 중에 “광주의 원앙산사에 은거하시매, 도우(道友)가 중도(衆到)하니, 「성교요지」를 하필(下筆) 하시더라”는 대목이 나온다. 1897년에 개정된 책을 베껴놓고 그 책을 이벽이 1779년 이전에 저술했다고 쓴 것이다. 가짜 책 「성교요지」가 호명되는 순간 「니벽젼」도 가짜다. 이 책이 만들어진 1920년대에는 천진암 이야기가 나오기 전이라, 그냥 원앙산에 있는 절이라고 했다.

 

작품 끝에 「사세시(辭世詩)」가 등장한다. 1786년 이벽은 집안에 틀어박혀 「천주밀험기」를 저술했다. 이를 들은 부친 이보만은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격노했다. 이때 이벽이 붓을 들어 벽에다 크게 썼는데, 그 내용은 “무협 중봉의 나이에 포의로 중천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천국으로 금의환향 하노라(巫峽重峰之歲, 絲入中天. 銀河列宿之年, 錦還天國)”였다. 그러고는 종적을 감추었고, 이후 득도하여 6월 14일에 승천하였다고 했다.

 

소설 끝에 등장하는 이 구절을 이벽이 세상과 작별하며 쓴 ‘사세시’라 하여, 신심의 대상으로 높인다. 허구를 사실의 언어로 혼동한 셈이다. 이 구절은 신라 때 당나라로 유학 갔던 최치원이 쓴 「연장(年狀)」에 나오는 구절을 살짝 비튼 것이다. 최치원은 “무협 중봉의 해에 베옷 입고 중원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비단옷 입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고 썼다. 이벽의 위 구절은 최치원의 글에서 ‘원(原)’을 ‘천(天)’으로, ‘동토(東土)’를 ‘천국(天國)’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협은 봉우리가 12개여서 무협중봉의 해란 12살을 뜻한다. 은하 열수의 나이는 하늘의 별자리가 모두 28수(宿)이어서 28세란 의미다. 최치원이 말하려 한 원래 뜻은 12살에 베옷을 입은 포의의 몸으로 중국 땅에 들어가서, 28세의 나이에 비단옷 입은 관리가 되어 신라로 금의환향했다는 것이다.

 

이벽은 죽기 직전 이 구절을 벽에다 유언처럼 써놓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소설은 적고 있다. 하지만 이벽은 애초에 중국에 간 적이 없었고, 사망한 나이는 28세가 아닌 32세였으므로 도무지 앞뒤가 없는 얘기가 되고 만다. 최치원의 말을 그대로 끌어오되 천국으로 금의환향한다는 의미만 취하여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소설의 작가가 무협 중봉이 12살을, 은하 열수의 해가 28세를 나타낸다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니벽젼」은 허구적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작가가 하필 이벽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지었으며, 작품에 나타난 종말론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 거리다. 또 「니벽젼」 속에 「성교요지」를 언급한 것은 「성교요지」를 이벽의 저술로 둔갑시킨 사람이 「니벽젼」의 작가와 동일 인물 또는 동일 집단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가짜 「이덕조친필첩」

 

또 하나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이덕조친필첩」이란 자료가 있다. 상당한 달필로 쓰여진 이 필첩은 1776년 6월, 이벽이 22세 때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당시(唐詩)를 베껴 쓴 것이다. 이를 이벽의 글씨로 보는 근거는 필첩 끝에 다른 사람이 장난처럼 써놓은 ‘우덕조희필(右德操戱筆)’이란 메모뿐이다.

 

또 서첩 끝에 반행(半行)이라 쓴 시가 있다. 이것이 또 이벽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 글로 포장되어 천진암 성지의 이벽 관련 소개 자료 속에 등장한다. 그 원문은 이렇다. “품은 마음 시원하여, 광풍제월처럼 가없고, 생각은 맑고 밝아, 긴 하늘이 가을 물에 서로 비침일세.(襟懷灑落, 光風霽月之無邊. 思慮淸明, 長天秋水之相暎.)”

 

금회는 품은 생각, 쇄락은 맑고 깨끗해서 시원스런 모습을 말한다. 광풍제월은 맑은 바람과 구름을 걷고 나온 달빛이다. 첫 구절은 그 품은 생각이 삿됨 없이 깨끗함이 마치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빛과 맑은 바람이 가없이 펼쳐진 것 같다는 의미다. 두 번째 구절은 그 마음속에 담긴 생각이 해맑아 마치 푸른 하늘이 가을 물 위에 그대로 비치는 것과 방불하다는 뜻이다. 서첩 끝에 그저 적어둔 메모가 근거 없이 대뜸 이벽에 대한 예찬으로 해석되었다.

 

‘금회쇄락’은 송나라 때 주필대(周必大)의 글 「익공제발(益公跋)」 중에 “망녕되이 남과 사귀지 않아 품은 마음이 시원스러웠으므로 사람들이 절로 이를 받아들였다(不妄人交, 而襟懷灑落, 人自受之)”라고 쓴 용례가 있다. ‘사려청명’ 또한 「근사록」 집주에서 “사람이 사욕을 제거하면 아무 일 없이 고요할 때 문득 마음이 텅 비어 해맑아지고, 일이 있어 움직일 때 문득 정직하고 이치에 합당하게 된다. 텅 비어 고요하고 맑으면 생각이 맑고 밝아진다(人去除了私欲, 無事而靜時, 便虛明澄澈. 有事而動時, 便正直合理. 虛靜澄澈, 則思慮明”이라 한 예가 있다. 성리학자들이 인간의 내면을 설명할 때 자주 쓰던 표현을 조립해서 만든 구절이다. ‘장천추수’도 당나라 때 왕발(王勃)의 「등왕각서(王閣序)」 중에 보인다.

 

이 두 구절은 이벽의 글씨라는 증거가 없고, 이 글씨가 쓰인 맥락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없다. 이제껏 천진암 성지에서 간행한 각종 책자에 인용된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은 설명이 앞뒤가 없고 풀이 또한 억지가 너무 심하다. 글씨도 유일한 이벽의 친필인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의 서체와 확연히 다르다.

 

이같이 가짜 자료를 배제하고라도 이벽이 조선 천주교의 창립 주역이었고, 신앙의 모범을 세운 리더였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 같은 불순한 자료들로 인해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 세례자의 목소리와 같았던 광암 이벽의 고결한 신앙이 흐려져, 「니벽젼」에서 그려진 것처럼 종말론 신앙의 전파자처럼 여겨지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4월 10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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