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2) 지롤라모 시촐란테 다 세르모네타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2) 지롤라모 시촐란테 다 세르모네타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
프랑스 군주, 군사력과 새 영토를 교황에게 바치다
- 지롤라모 시촐란테 다 세르모네타, 롬바르드족의 아스톨포 왕을 이긴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라벤나와 펜타폴리를 기증, 1565~1568년, 바티칸 사도궁.
교황령의 확장
클로비스 왕의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지지 속에 유럽에서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754년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와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차지한 롬바르디아를 물리치고 영토를 모두 평정했다. 라벤나 지방을 비롯한 이탈리아 중부지역 일대였는데, 피핀은 그 땅들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기증했다.
역사는 이것을 ‘Promissio Carisiaca’, ‘Donatio Carisiaca’, ‘Quierzy 조약’ 혹은 ‘Quierzy 기증’이라는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데, 한마디로 ‘피핀의 기증’을 말한다. 이것은 과거 콘스탄티누스가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기증한 교황의 영토가 로마 밖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고, 당시의 국제 관계 속에서 ‘교황령’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재차 언급된다. 교황령이 탄생하는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단순하며 서정적 화풍의 작가
오늘 감상할 작품은 지롤라모 시촐란테(Girolamo Siciolante)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이다. 시촐란테는 1521년 세르모네타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피스토이아(Pistoia)와 페린 델 바가(Perin del Vaga)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바사리(G. Vasari)가 ‘탁월한 제자’라고 평한 걸로 봐서 바사리 밑에서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라파엘로가 기획했던 ‘판테온의 유덕한 사람들 모임’을 1543년에 공동으로 창설했다.
매너리즘이 꽃을 피우던 시절에 대부분의 화가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추종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라파엘로를 추종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그는 이후 점차 절충주의 매너리즘으로 이동하면서 프레스코화와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미켈란젤로의 추종자들이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조각 효과를 보여준 반면에, 시촐란테는 조용하고 단순하며 서정적인 화풍을 유지했다.
시촐란테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세르모네타의 군주는 카밀로 카에타니였고, 그의 외사촌 알레산드로 파르네제가 바오로 3세 교황(재임 1534-1549)이었다. 카에타니 가문과 파르네세 가문이 사돈지간이라 시촐란테는 양가에서 후원을 받으며 바티칸 궁과 파르네세 궁에 작품을 남겼다.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 작품은 바티칸 사도궁 남쪽 날개 부분, 과거 교황이 각국의 왕들과 제후들을 맞이하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가톨릭 쇄신 운동을 주도했던 바오로 3세 교황은 1534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를 재정비하도록 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과 바티칸의 궁들도 다시금 손을 보았다.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1545~1563년 트렌토(트리엔트)에서는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사도궁의 이 방은 과거 왕들과 제후들이 공식적으로 교황을 알현하던 곳으로 교황에 대한 순명 서약을 하던 장소이다. 이곳에 가톨릭 쇄신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과거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이탈리아의 영토를 기증하는 이야기를 벽화로 그렸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를 담았다고 하겠다.
한편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술가들에게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했고, 예술적 표현에서 전통적인 장식을 준수하고 모호한 방종은 배제하도록 했다. 이것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통해 정통 교회의 수호자라는 강요와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위기는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촐란테의 보수적인 스타일은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에 도움 요청
작품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은 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테파노 2세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자 대립각을 세웠다. 동로마의 황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고, 교황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동로마 황제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두고 로마를 좌지우지했다. 그런 때에 롬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고 로마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스테파노 2세 교황은 동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프랑크 왕국의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할 목적으로 754년 1월 6일, 직접 프랑크 왕국의 궁정을 찾았다. 프랑크 궁정은 교황을 크게 환대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기름 부음 예식을 거행하고, 장엄 축복을 했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하겠다는 성대한 서약을 했다. 이 예식은 점차 대관식으로 발전했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앙시앵 레짐’(‘구체제’, ‘낡은 체제’)이 종식될 때까지 역대 프랑스 군주들의 전통이 되었다.
프랑크의 귀족들은 퀴에르지에서 롬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에 동의했고, 피핀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라벤나에서부터 로마까지 영토를 모두 점령했다. 그리고 그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로써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영토, 곧 교황령을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피핀의 기증’ 문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8세기 후반, 이 문서를 출처로 밝힌 인용 문구들이 전해오고 있다.
작품 속으로
가운데 고대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를 연상케 하는 옷을 입고 머리에 프랑크 왕국의 권위를 상징하듯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피핀 3세다. 왕은 근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계단을 오르려고 하고, 바로 뒤에서 동행하는 사제들은 르네상스 시기에 입던 성직자의 평상복을 입고 있다.
피핀의 뒤쪽 배경에는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가 로마 시대 건물이고,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프랑크 왕국의 군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군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메디치 문장이 있는데, 작품을 의뢰한 비오 4세 교황의 문장이다. 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먼 친척인 밀라노 메디치 가문 소속이다.
피핀 일행은 확인되지 않은 어떤 건물로 오르고 있다. 피핀 앞에서 계단 하나를 이제 막 오른 사람은 맨발에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손이 뒤로 묶인 것으로 봐서 전쟁 포로로 붙잡힌 롬바르드의 왕 아스톨포로 짐작된다. 포로 옆에 있는 사람이 손에 든 작은 동상은 라벤나 관구를 상징한다. 그 땅을 로마 교회에 돌려주기 위해 들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장면을 더 잘 보겠다고 뒤쪽 기둥 위로 오르는 젊은이도 있다.
이 벽화는 역사적인 사건을 함축하여 재구성했다. 일종의 광고용으로 보인다. ‘피핀의 기증’은 교회사는 물론 그리스도교 서양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교황의 신적, 인간적 권위를 황제로부터 되찾아 왔다는 것뿐 아니라, ‘영토 지배’라는 세속적인 권력이 공식적으로 발의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교황의 요청에 따라 왕이 군대를 움직였다는, 실질적인 권리집행자라는 더 큰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9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