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8) 파울 투만의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8) 파울 투만의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베드로 대성전 건립 자금 뒷거래가 촉발한 종교 개혁의 바람
- 파울 투만,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1872년, 바르트부르크성 박물관, 독일 튀링겐.
율리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은 사람은 레오 10세(재위 1513~1521)였다. 메디치 가문 로렌조 마니피코의 셋째 아들 조반니가 제217대 교황이 된 것이다. 마니피코의 똑똑한 아들로 정평이 나 있던 조반니는 13살에 인노첸시오 8세 교황으로부터 부제급 추기경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이후 가문의 쇠퇴와 함께 로마를 떠나 유럽을 돌아다녔다. 힘든 시절을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1500년 5월 조반니는 로마로 돌아왔고,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그를 환대했다. 그러나 1503년 율리오 2세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메디치가의 추기경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508년부터 재개한 ‘캉브레 동맹 전쟁’ 중 1511년 8월 교황은 돌연 병에 걸렸고, 그때 자신의 사후 콘클라베(교황 선거)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측하게 되었다. 건강은 회복한 율리오 2세는 1511년 10월 북부 이탈리아 로마냐 지방 특사로 조반니 추기경을 임명했다. 조반니는 교황군을 이끌어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고, 피렌체에서 권력을 회복했다. 메디치가는 다시 피렌체에 입성했고, 조반니는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 교황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사업과 비용 마련 고심
레오 10세는 율리오 2세가 시작한 많은 일을 그대로 떠안아야 했다. 캉브레 동맹을 종결하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3~1517)를 열어 피사 공의회파 이단을 종식하며, 이제 막 시작한 성 베드로 대성전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율리오 2세가 궁정에서 만났던 르네상스 예술가 세 명의 운명도 갈렸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라파엘로의 방들을 그리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를 완성하고 델라 로베레 가문과 율리오 2세 교황의 영묘 건설 두 번째, 세 번째 계획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이라는 엄청난 일을 시작하고, 율리오 2세에 이어 이듬해(1514년)에 그도 사망했다. ‘대성전을 훼손한 사람들에게 내린 하늘의 징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이어갈 적임자를 찾고, 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사촌 율리오 추기경과 함께 추진하던 피렌체 성 로렌조 메디치가(家) 대성당의 정면 공사는 비용 문제로 일단 포기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델라 로베레 가문과 합의를 못 보고 1516년 피렌체로 돌아갔다.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로마는 여러 면에서 인문주의적 가치를 발휘했다. 학자, 예술가, 음악가와 시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해줌으로써 로마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뿐 아니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미국인 철학자며 사학자인 윌 듀란트(Will Durant, 1885~1981)는 저서 「르네상스」에서 레오 10세 교황 재임 시 로마를 두고 “단지 문화의 양만 보더라도, 역사상 결코 이와 같은 시절은 없었다. 페리클레스 재위 시절 아테네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의 로마도 결코 이렇지는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메디치가의 교황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고루 살피며 혜택을 주었다. 노인과 환자들을 먼저 돌보고, 퇴역 군인과 순례자들을 대접하며, 사회 부적응자와 망명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다. 빈민들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무상 교육도 시행했다.
대사 판매에 반발한 루터, 파문에도 굽히지 않아
하지만 그의 이런 모든 업적을 덮는 엄청난 사건이 그의 재임 기간에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 개혁’이었다. 레오 10세는 캉브레 전쟁 종결을 위한 프랑스와의 전쟁과 로마에서 진행 중인 성 베드로 대성전 건설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마그데부르크-할버쉬타트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와 계약을 맺었다. 마인츠대교구장직을 승계하도록 허락하는 조건으로, 1만 두카토(135억 원 상당)를 받기로 한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푸거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기로 했고, 교황은 그가 대출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보편 교회가 주는 ‘대사(Indulgentia)’를 6년간 그의 관할 교구에 한해 대주교가 줄 수 있다는 교서를 내려줬다. 알브레히트는 돈을 대출받아 절반은 로마에 보내고, 절반은 앞서 대출받은 대금을 상환했다.
알브레히트는 도미니코회 요한 테첼(Johann Tetzel) 수사에게 자기 교구 내에서 대사에 관한 설교를 부탁했다. 아우구스티누스회 마르틴 루터(Martin Lutero) 신부는 테첼의 설교에 거세게 반발했다. ‘대사 판매’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대사 판매’와 함께 그간 로마 교회에 품었던 의구심을 95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독일어로 번역한 뒤, 유럽 전역에 돌렸다. 그의 주장은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두 달 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레오 10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통적으로 수도사들이 뭔가를 주장하면, 소속 수도회 측에서 소환 혹은 제명되기도 하고, 주장과 반론으로 서로 성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 간,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과소평가했다. 그 사이에 일부 신학생과 그간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루터의 주장에 동조했고, 1517년 12월 루터는 자신이 강의하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모든 성인 성당’ 정문에 논박문을 붙였다.
1518년 2월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회 총대리에게 수사들의 입단속을 지시했고, 루터는 그해 5월 30일, 자신의 95개 반박문에 대한 설명을 레오 10세에게 제출했다. 1518년 10월 교황은 특사 가예타노(Thomas Cajetan) 추기경을 아우크스부르크로 보내는 등 여러 차례 루터에게 주장을 굽힐 것을 요구했고, 루터는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통해 루터의 주장에서 41가지 오류를 열거하며, 60일간 말미를 줄 테니 주장들을 철회하고, 급진적인 주장을 담은 그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문시키겠다고 했다. 루터가 파문 위협이 담긴 교서를 받아든 것은 그해 10월 10일이었다. 그로부터 유예 기간이 끝나는 12월 10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성의 ‘엘스터 문’ 앞에서 교황 교서뿐 아니라, 스콜라 신학 서적과 교회법전을 모두 불 속에 던졌다.
독일 출신 삽화가이자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 출신의 삽화가며 화가, 파울 투만(Paul Thumann, 1834~1908)이 그린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1872)이다. 그림은 중세 튀링겐 지방 문화의 중심지며, 파문당한 루터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의 보호 아래 숨어지내던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있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만이 그린 ‘마르틴 루터의 생애’ 연작 5개 중 하나다.
투만은 마을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능력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1854~1856년, 베를린의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이후 몇 년간 드레스덴에서 일하다가 라이프치히에서 2년을 보낸 후, 바이마르의 그랜드 듀칼 색슨 미술학교(Saxon-Grand Ducal Art School)에서 공부했다. 1872년 드레스덴에서 교사, 1875년 베를린 아트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등지를 여행했고, 1887~1891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살기도 했다. 1892년부터 괴테, 테니슨, 샤미소, 하이네 등의 유명 저서들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삽화는 우아한 디자인과 분별력 있는 진지함, 인물의 품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08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1520년 12월 10일 오전 9시 루터는 동조하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레오 10세 교황 교서와 로마 교회 관련 책들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나뒹구는 책과 둘러선 사람들 표정과 제스처가 모두 극적이다. 타오르는 장작의 연기에 가려진 희미한 배경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불어닥칠 유럽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안 된 이듬해,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교서 「로마 교황의 선언(Decet Romanum Pontificem)」을 통해 루터를 공식 파문했다.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에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개혁은 기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며, 루터가 던진 과제는 “개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송두리째 쇄신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언제나 성경”임을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4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