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한티성지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칠곡 한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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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설명 첩첩 산중에 핀 신앙의 꽃
 지번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 
 도로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전화번호 (054)975-5151
 팩스번호 (054)975-5150
 홈페이지 http://www.hanti.or.kr
 전자메일 dghanti@hanmail.net
 관련기관 한티 피정의 집    
 관련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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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왼쪽이 908번 지방도로이고, 오른쪽 내리막길이 성지로 가는 길이다.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漆谷郡 東明面 得明里)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산괴(八公山塊)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가 넘는 이 심심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산괴의 주령인 인봉(891m)에서 가산(901m)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1998년에 복원한 한티마을(옛 공소) 모습.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의 여파로 1861년 신나무골에까지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피신했지만 결국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잡혀 그곳에서 순교했다. 현재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는 신나무골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았다. 3년 가까이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1868년 한티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순교자 묘역의 조 가롤로 가족 묘.순식간에 평화롭던 마을은 피바다가 되었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차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이다.

그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상주 구두실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한티에 정착한 조 가롤로와 그의 아내 최 바르바라와 누이동생 조 아기 그리고 문경에서 체포되어 상주 진영에서 순교한 후 맏형 서인순(徐隣淳) 시몬과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시신을 거둬 한티에 안장한 서태순(徐泰淳, 1823-1867년) 베드로뿐이다. 이렇듯 4기를 뺀 나머지 33기는 모두 무명 순교자 묘로 남아 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박만수 요셉 등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순교자 묘역의 서태순 베드로 묘. 총 37기의 묘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4명 순교자 중 한 명이다.동명면 시내에서 한티 방향으로 조금 가면 송림사가 있고 그 앞에는 한국 성모의 자애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 요양원’이 있다.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여 말끔히 포장된 한티로를 걸어서 성지 입구에 이르게 된다. 또한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여 정비하고, 1991년 9월 29일 피정의 집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를 세우고 1998년 부활절에 옛 공소였던 한티마을을 복원했다. 2000년 2월 17일 성지 내에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을 축복하고, 2004년 12월 10일에는 성체조배실을 갖춘 순례자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는 2012년 9월 1일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세례명과 순교 연도 등을 바로 잡은 새 비석을 제작해 묘지에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1월 20일)]

2004년 축복식을 가진 순례자 성당. 2층에는 성체조배실이 마련되어 있다.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1991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진 한티 피정의 집.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신나무골 성지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 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 ·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1월호]

한티 성지의 순교자 묘역 입구. 위로 올라가면 대형십자가와 야외제대, 순교자들의 묘를 순례하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신산골에 위치한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 성지입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수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 중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고, 1991년 피정의 집,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 1998년 옛 공소 복원, 2000년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 2004년 순례자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2년 9월에는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세례명과 순교 연도 등을 바로 잡은 새 비석을 제작해 묘지에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1:00  단체순례미사는 사전 요청시 가능
평일미사 16:00  특전미사
기타   11:00  후원회 월례미사(매월 셋째주 월요일)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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