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장을 지어 숨겨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갔는데,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질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으며, 2년 뒤에는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서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와 같이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점혜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동시에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그녀는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