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92) 가짜 책 「만천유고」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2) 가짜 책 「만천유고」
이승훈이 직접 쓴 글 하나 없는 「만천유고」는 엉터리
- 「만천시고」 중 홍석기의 「만주유집」과 양헌수의 「하거집」에서 베껴온 부분을 표시한 내용.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이 한 면에서만 본문에 표시한 것처럼 5자의 오자를 냈다. 옮겨 쓴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만천 이승훈과 「만천유고」
만천(蔓川)은 한국 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호다. 만천은 무악재에서 발원해 독립문과 염초교를 지나 서소문 성지를 거쳐 청파동 남쪽으로 흐르던 샛강의 이름이다. 덩굴풀이 많이 자라 덩굴내로도 불렸다. 이승훈의 집이 만천 인근에 있었으므로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만천유고(蔓川遺稿)」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승훈의 문집이다. 「만천유고」는 1967년 8월 27일 자 「가톨릭시보」 제582호 기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는 김양선 목사가 수집해 숭실대에 기증한 12종의 이른바 초기 천주교회 관련 자료 중 하나였다.
특별히 이 책이 교회사 연구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만천유고」에 수록된 이벽의 「성교요지」 때문이었다. 이후 「성교요지」를 주제로 수많은 논문이 제출되었고, 이를 주해한 단행본만 해도 여러 종류가 출간되었다. 하지만 윤민구 신부의 본격적인 위작설 제기 이후 「성교요지」는 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지 오래다.
이 논의는 길게 끌고 갈 문제가 아니고, 회피하거나 외면해서 판단을 미룬다고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명백한 팩트에 의한 정리로 소모적 논란의 반복을 차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의혹과 분열이 가중되어 수습하기 힘든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렇듯 난마와도 같이 얽힌 것은 이해 당사자들의 속사정과 무관치 않다. 무엇보다 당장 진행 중인 이벽과 이승훈의 시성시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여서, 이 시점에서 명확하게 털고 넘어가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당 못 할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글에서는 「만천유고」 중 「만천시고」에 실린 이승훈의 한시 31제 71수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이승훈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훈의 시는 앞서 살핀 「벽이시」 외에는 달리 알려진 것은 없다. 「만천시고」 속 한시 71수야말로 위작이 아닐 경우 이승훈의 저작으로 확인된 유일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만천유고」는 「만천잡고」, 「만천시고」, 「만천초고」의 3부로 구분된다. 앞쪽 「만천잡고(蔓川雜藁)」에는 「농부사(農夫詞)」,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이 실려 있고, 이를 이어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警世歌)」 등의 천주 가사 3편을 수록했다. 각각 정약전과 이벽, 이가환이 지은 것으로 나온다. 이어 이벽이 지었다는 문제의 「성교요지」가 실렸다. 여기까지가 「만천잡고」다.
3부 「수의록(隨意錄)」에는 아래에 ‘만천초고(蔓川草藁)’라 적어, 이승훈의 적바림을 모은 것처럼 되어 있다. 각 분야의 최초를 모은 「창시(創始)」와 조선 왕계의 연대를 정리한 「본조년기(本朝年紀)」,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노정을 정리한 「자아동지북경정도(自我東至北京程道)」와, 일본까지의 노정을 적은 「일본국정도(日本國程道)」, 오키나와까지의 일정을 쓴 「유리국정도(琉璃國程道)」, 그리고 서울의 성문과 궐내 전각 명칭을 적은 「도성(都城)」, 서울서 각 감영까지의 거리를 쓴 「행로거리정(行路去里程)」, 중국 각성(各省)의 이정을 기록한 「각성부현(各省府縣)」이 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이 책 저 책에서 참고할만한 사항을 베껴 적은 적바림 모음이다. 이승훈의 글은 한편도 없다.
어이없는 「만천시고」
결국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 중 이승훈이 직접 지은 글은 제2부 「만천시고」 뿐이다. 여기에는 이승훈이 25세 나던 1780년에서 27세 때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시를 모았다. 첫 번째 시에 ‘경자춘(庚子春)’의 간지가 보이고, 이후 ‘신축입춘(辛丑立春)’과 ‘임인년(壬寅年)’ 표시가 나와 이승훈이 북경으로 가기 4년 전부터 1년 전 사이에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막상 작품을 살펴보면, 이 역시 이승훈이 직접 지은 시가 단 한 수도 없다. 25세 때 지은 「선유대(仙遊臺)」 시에서는 서울에서 과거 공부에 한창 열중하고 있던 그가, “세상에서 떠나온 뒤 호연이 여기 와서, 몸과 마음 기르려고 이 누대에 올랐다네”라 하고 있고, 27세에 지었다는 「난화십절(蘭花十絶)」 시는 첫수 첫 구가 “40년 동안이나 집에 심겨 있었지만, 그저 잎만 보았지 꽃은 보지 못했네”로 시작되어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그뿐 아니다. 수록 작품의 절반가량을 다른 사람의 시집에서 절취해왔다. 「등문장대(登文壯臺)」와 「경복궁구호(景福宮口呼)」 2수 등 3수는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만주유집(晩洲遺集)」에 버젓이 수록된 엄연한 남의 작품이다. 「등문장대」는 특별히 홍석기의 아시작(兒時作)으로 문집에 특기된 것을 이승훈의 27세 작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중간에 「밤에 이덕조(李德藻)와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당나라 절구시의 운자를 차운하다(夜與李德藻翫月, 次唐絶韻)」 2수가 실려 있다. 이덕조가 누구인가? 바로 이벽(李檗)이다. 이 작품을 한국고전번역원 DB로 검색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신미양요 때 강화도 전투에서 활약했던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장군의 「하거집(荷居集)」에 실린 작품이다. 제목 또한 「밤에 취정 이문경 복우와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당나라 절구시의 운자를 차운하다(夜與翠庭李聞慶德福愚藻翫月, 次唐絶韻)」였다. 문경 군수를 지낸 벗 취정(翠庭) 이복우(李福愚, 1811~?)와 달구경하면서 지은 시를 이벽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양헌수는 이승훈이 세상을 뜬 뒤 15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양헌수의 문집 「하거집」은 1888년 그가 사망한 뒤 1893년 이후에 정리된 책이다. 「만천유고」를 조작한 사람이 「하거집」의 시를 훔쳐 왔다면, 이를 엮은 당사자가 20세기의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만천시고」 뒤편에 수록된 「계상독좌(溪上獨坐)」에서부터 마지막 「양협노중(楊峽路中)」까지의 26수 또한 순서까지 그대로 양헌수의 「하거집」에서 통째로 베껴 왔다. 이렇게 「만천시고」에 수록된 71수 중 총 29수의 시가 홍석기와 양헌수 두 사람의 문집에서 베껴낸 것임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시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람의 문집에서 베낀 것이 틀림없다. 앞쪽의 작품 중 「평천십이곡(平川十二曲)」 12수와 「원적산중팔경(元積山中八景)」 시 9수가 있다. 평천은 경기도 용인군 양진면 일원의 지명이고, 원적산은 경기도 이천과 광주 백사면에 위치한 산이다. 이들 작품 모두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노경에 든 한 사람의 시집에서 베껴낸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시기 이승훈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고, 과거 시험 준비에 골몰하던 때였으니, 시 속의 정황과 시인의 삶을 연결 지을 고리는 애초에 하나도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만천유고」 중 유일한 이승훈의 작품이랄 수 있는 「만천시고」 속 71수의 한시는 광주나 용인 근처에 살던 어떤 문인의 시와, 이승훈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살다간 홍석기의 시 3수, 그리고 이승훈이 죽고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 28수를 짜깁기해서 앞뒤 없이 얽어둔 요령부득의 가짜 시집이다. 게다가 이승훈의 시집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중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벽으로 바꿔치기까지 하여, 엮은이의 불순한 의도까지 드러나는 교활한 악마의 편집이다.
무극관인(無極觀人)의 발문
책 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극관인이란 사람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그간 관련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이 글을 정약용이 지은 것으로 지목했다. 글의 전문은 이렇다. “평생 감옥에 갇혔다가 죽음을 면하고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 되었다. 강산은 의구하고 푸른 허공과 흰 구름은 그림자가 변하지 않았건만, 선현(先賢)과 지구(知舊)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목석 같은 신세를 붙이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엎어져 지내는 중이다. 아! 뜻하지 않게 세상이 바뀌어 만천공의 행적과 여문(儷文)이 적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불에 타 없어져서 원고 하나도 볼 수가 없었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와 잡록과 조각 글이 남아 있었으므로 못 쓰는 글씨로 베껴 적고 「만천유고」라 하였다. 봄바람에 언 땅이 녹고 고목이 봄을 만나 새잎이 소생한 격이니, 이 또한 상주(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일 것이다. 우주의 진리는 이와 같아서 태극이면서 무극이니, 깨어 깨달은 자는 주님의 뜻을 접할지어다. 무극관인.”
이 글을 정말로 정약용이 썼다면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양헌수 장군의 시를, 그의 문집이 정리되기 70년 전에 정약용이 미리 보고 이승훈의 시로 알아 편집한 뒤 이 글을 썼다는 뜻이니 애초에 따지고 말고 할 가치도 없다. 다산은 ‘평생’ 감옥에 갇힌 일이 없었고, 설령 귀양지에 있었던 기간을 감옥이라 표현했다 하더라도, 해배된 뒤 18년 뒤에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란 말은 가당치 않다. 무엇보다 한문 문장의 수준이 명백하게 20세기 이후 사람이 한글 문장을 한문으로 얼기설기 옮겨놓은 실로 형편없는 하수(下手)의 조악한 수준이다. 도처에 비문(非文)에다 어거지로 얽은 글이어서, 앞선 연구자들이 이를 다산의 글로 본 것은 실로 아연할 노릇이다.
정리한다. 필사본 「만천시고」에는 이승훈의 시가 한 편도 없다. 「만천유고」 전체로도 그렇다. 「만천유고」는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짜깁기한 가짜 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작품 속 이름을 바꿔치기하거나, 괴상한 발문을 끼워 넣는 성의를 보인 것을 그나마 가상타 해야 할 일일까? 이제 와 볼 때 이런 수준의 조악한 책자를 두고 초기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열광하여 환호한 것은 무엇보다 이승훈과 이벽을 위해 민망하고 아쉬운 노릇이었다. 모든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지금까지도 논란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낯이 붉어지는 일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3월 27일, 정민(베르나르도, 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