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웅모 신부의 박물관, 교회의 보물창고] (71) 스페인 ‘부르고스 대성당’과 ‘산 에스테반 교회 박물관’
산티아고 향하는 순례객들의 영적 쉼터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
수세기 걸쳐 아름답게 꾸며져
인근엔 교회 박물관도 자리해
오랜 역사와 그리스도교 전통을 자랑하는 스페인 곳곳에서는 유적과 성당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성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Santiago)로 가는 순례의 길목에는 크고 작은 도시가 형성돼 있고, 그곳에 있는 성당과 유서 깊은 건물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부르고스(Burgos)도 대성당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다. 이 성당은 신앙 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특히 광장에서는 부활이나 성탄 시기 전례와 관련된 행사가 열리고, 일반 대중문화 행사도 자주 펼쳐진다. 그래서 광장은 언제나 사람들과 행사로 북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며 규모 뿐 아니라 건축의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하다. 1221년에 마우리시오 주교에 의해 건립됐으며 라틴십자가 모양의 평면도는 길이 84m, 폭 59m에 이른다. 수많은 장식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성당 내부 마름모 형태의 황금 계단과 화려한 별 문양의 둥근 천장 장식이다. 이런 장식은 성당이 완성되고 난 후인 르네상스 시대에 꾸며졌다.
대성당은 여러 세기에 걸쳐 지어졌는데 기본이 되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에 독일과 프랑스 건축 양식도 추가됐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활동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열심한 사람들의 신심이 하나의 건축에 응집돼 나타난 것이 부르고스 대성당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사람들이 만든 놀라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유네스코(UNESCO)는 1984년에 대성당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하면서 인류가 아끼고 보존할 문화재로 선포했다.
중세부터 오늘날까지 산티아고로 향하던 순례자들은 이곳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거나 안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내적인 힘을 받아 다시 순례의 길을 걷는다. 사막을 걷던 사람들이 오아시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생기를 되찾는 것처럼, 순례자들은 성당에서 영적으로 충만하게 된다. 성당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남쪽 광장에는 지친 순례자가 의자에 주저앉아 쉬는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순례중인 남성이지만, 오늘날 세상에서 힘들게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보인다.
부르고스에도 대성당 주변에 여러 성당이 있다. 그 중에 어떤 성당은 교회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몇 곳은 성당과 박물관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한 성당은 교회의 기능을 접고 온전히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성당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 에스테반 성당(Iglesia San Esteban)의 기능은 그렇게 바뀌었다. 박물관 외관은 고딕성당 모습 그대로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박물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내부 원형도 그대로 보존하고 최소한의 개조 공사를 통해 전시 공간을 만들어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산 에스테반 교회 박물관에서는 부르고스와 인근의 여러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제단화와 성화, 성물이나 성상을 전시해 사람들을 맞이한다. 오래된 성당의 보수나 전례 변혁 등으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성물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교회 박물관 덕분이다. 이 박물관에서는 성작이나 성반 등 크기가 작은 성물도 특별한 전시 박스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파이프 오르간도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런 전시를 통해서 교회 박물관이 단순히 유물을 보존하는 창고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장품의 전시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상호 소통하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방문한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성당 주변을 둘러보고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교회 박물관에 들러서 전시된 유물이 들려주는 지나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을 풍요롭게 채운다. 교회의 많은 유산이나 유물은 이처럼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나아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세계 교회가 박물관이나 문화 기관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의 대성당은 대부분 부속 교회 박물관이나 유물실을 갖고 있다. 사람들의 눈앞에 있는 성당이 오늘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면 박물관은 어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회가 전해주는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내일을 향해서 나가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자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람들이 신앙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문화가 없으면 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가꾸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에서도 문화와 접목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품으려 한다. 세상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도 이런 추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회가 소중한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서 꼭 새로운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건물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건물이 더욱 늘어나기도 한다. 교회의 오래된 건물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소중한 유물이다.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나 공간을 찾아 그곳을 조금 손질해 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교회의 유물은 더욱 빛나고 새로운 생명을 연장하며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