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80. 두 과부의 전쟁 - 채제공 둘러싼 채당·홍당 싸움으로 정조의 개혁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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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80. 두 과부의 전쟁 - 채제공 둘러싼 채당·홍당 싸움으로 정조의 개혁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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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둘러싼 채당·홍당 싸움으로 정조의 개혁 구상 뒤엉켜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0. 두 과부의 전쟁

2021.12.25발행 [16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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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1년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의 전신 좌상 시복본 초상. 번암이 짓고 쓴 찬문이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이겨도 지는 싸움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과의 서학을 둘러싼 논쟁이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곧이어 남인 내부의 정파적 투쟁으로 변질되면서 비극이 싹텄다. 남인 학맥의 뿌리에 성호 이익이라는 거목이 있었다면, 정계에는 번암 채제공이라는 불세출의 정객이 버티고 있었다. 오랜 야당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던 남인들에게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던 채제공은 유일한 희망이자 최고의 구원투수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얼마 못 가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그는 1780년 홍국영의 실각 이후 거의 죽음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 1786년 12월까지 본의 아닌 유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채제공은 이제 끝났다. 곧 사약이 내릴 것이다.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 와중에 벌어진 작은 사건 하나가 남인 내부에 깊숙한 충격파를 안겼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은 전라도 나주의 미강서원(眉江書院) 이야기로 시작된다. 1783년 서원의 유생 몇 사람이 이전에 서원의 원장을 역임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찾아왔다. 무너져 가는 서원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였다. 채제공은 관동관찰사로 있던 집안 조카 채홍리(蔡弘履, 1737~1806)에게 도와주라는 편지를 써서 이들을 그리로 보냈다. 원주로 찾아간 유생들은 몇 달간 그곳에 머물며 관찰사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끝내 감영 안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채제공의 부탁을 개무시한 처사였다.

집안 조카라도 자식 같았던 채홍리는 이 일로 채제공의 등에 칼을 꽂았다. 남인 내부가 들끓었다. 순식간에 채제공을 따르는 대채(大蔡)와 채홍리로 줄을 갈아탄 소채(小蔡)로 패가 갈렸다.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이재기는 「눌암기략」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100년간 폐하여져서 실로 형세나 이익으로 다툴만한 것이 없다. 사람마다 인정이 마치 골육간과 같아 서로 마주하면 간담이라도 내줄 것 같았다. 비록 수백 리 밖에 살아도 소리와 기운이 서로 통하여, 그 풍속이 아름답다 할 만하였다. 하루아침에 한 방에서 창을 잡는 변고가 있었으니, 아! 또한 불행함이 심하다 하겠다.” 누군가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싸우니, 이는 시대의 풍기 탓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재기가 말했다. “그렇지 않네. 서인이 자기들끼리 죽자고 싸우는 것은 이익이 있어서일세. 우리의 경우는 두 과부가 서로 싸우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이들의 다툼은 이겨도 진 것과 같은 싸움이었다. 둘이 실컷 싸우다가 피를 흘리고 나면 전리품은 노론이 다 챙겨가는 허망한 전쟁이었다. 이석하 같은 이는 뒤탈이 날까 봐 채제공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자기 이름조차 적지 않았다. 채제공은 “어찌 그리 겁을 내는고?” 하며 분노했다. 채홍리는 이 와중에 같은 남인인 홍수보, 홍인호 부자와 손을 잡고 반채제공 연대를 확대시켰다. 대채와 소채로 갈라섰던 남인의 싸움은 이제 채당(蔡黨)과 홍당(洪黨)의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채제공은 의연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벽의 동생 이석(李晳)이 장용영 무관으로 있으면서 동요치 말라는 정조의 밀지를 지속적으로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고래 싸움 속 새우등

정약용은 이 싸움의 한 가운데 끼어 있었다. 홍수보는 장인 홍화보와 친형제 간이었고, 홍인호는 정약용에게는 사촌 처남이었다. 아버지 정재원은 채제공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켰고, 정약용 또한 채당이었다. 처가 쪽이 돌연 반채 전선의 선두가 되면서 정약용은 입장이 껄끄러워졌다. 그러다가 1786년 12월, 왕명으로 채제공이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반채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1788년 2월에 채제공은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남인이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8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채제공은 거물이었지만 품이 넓지는 못했다. 와신상담의 시절 자기에게 등 돌렸던 남인들을 끝까지 응징했다. 이로 인해 남인의 파이를 키워 노론을 견제해 개혁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던 정조의 정치 구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다. 게다가 채제공 친위 소장 그룹 중에 유독 신서파들이 몰려 있었던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정조가 양측의 화해를 주선해도 채제공은 끝까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정조는 홍인호를 따로 불러 채제공을 직접 찾아가 지난 일에 대해 사죄할 것을 명하기까지 했다. 어렵게 찾아온 홍인호에게 채제공은 날씨 얘기만 하다가 눈길도 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 시기 정약용은 채제공의 돌격대로 활약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 이후, 1787년 정미반회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는 채제공의 그늘에 숨어 무사할 수 있었다. 천주교 활동에 온 힘을 쏟으면서도 부친과 함께 채제공을 옹위하는 전선의 앞장에 섰다. 성균관 유생의 자격으로 반대당을 저격하는 상소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젊은 날의 정약용은 동물적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때 얼핏 자신이 꿈꾸던 서학의 가치가 임금 정조와 채제공의 그늘 아래서 개혁의 이름으로 꽃피울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가졌던 듯하다. 1789년과 1790년 윤유일을 북경 교회에 특사로 파견할 때까지도 정약용은 천주교 최상부의 의사결정 구조 속에 들어 있었다.

1801년 2월 18일 이승훈이 의금부에 끌려갔을 때, 1789년 자신의 이름으로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가 사실은 자신이 쓰지 않았고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을 훔쳐서 쓴 것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 조처를 가져온 이승훈의 편지를 실은 정약용이 썼다고 말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 고발하려 하자, 정약용이 “조정에서도 이미 환히 아는 사실이니 제발 고발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했다는 말까지 보탰다. “정약용 3형제가 제 이름을 빌려서 서양인과 교통하는 섬돌로 삼았다”고도 했다. 「추국일기」에 자세하다. 처남 매부 간 막장 드라마 수준의 폭로전이었다. 이승훈의 처신은 늘 이랬다.



뜨거운 감자

이 와중에 1789년 3월 정약용은 식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서 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정약용은 이후 정확한 판단과 기민한 일 처리로 채제공 사단의 참모와 돌격대장 역할을 도맡았다. 명례방에 있던 그의 집은 소장파 채제공 옹위 그룹의 참모 본부나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임금 정조의 가려운 곳을 알아 한발 앞서 문제를 처리하는, 임금의 마음에 꼭 맞는 신하였다.

덕분에 정약용은 벼슬길에 오른 이후 승승장구했다. 1790년 3월 초계문신을 거쳐 5월에는 품계를 다섯 등급이나 뛰어 종6품 용양위 부사과에 올랐다. 급제 1년 만의 파격적 승진이었다. 이듬해 9월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실로 거칠 것이 없었다. 정조와 채제공의 전폭적 지원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뇌관 하나가 터졌다. 1791년 9월의 진산사건이 그것이다. 당사자인 윤지충은 정약용과 사촌 간이어서, 정약용은 이후 운신의 폭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여기에 1787년 정미반회사건 당시, 서학 타도의 집요한 문제 제기에도 헛발질로 물러났던 홍낙안이 진산사건의 배후를 물고 늘어지면서 천주교 문제가 정국을 강타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진산 사건 직전 채제공은 자신의 서자와 정약용의 서매를 혼인시켰다. 두 집안이 사돈의 인연을 맺은 것은 채제공의 입장에서는 어려울 때 자신의 편이 되어준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에 대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홍낙안은 진산 사건의 풍문을 채당의 신서파를 섬멸할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다. 당시 홍낙안은 7품의 임시직인 가주서(假注書)였지만, 대담하게도 한참 선배인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추궁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9월 29일에는 좌의정 채제공에게 공개적으로 장서(長書)를 올려 신서파 타도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홍낙안은 이 글에서 서학 집단을 사납고 흉포하며 불만이 가득한 무리란 뜻으로 ‘걸힐불령지도(桀不逞之徒)’로 규정하고, 천당을 믿어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즐거워하는 ‘오생락사지도(惡生樂死之徒)’라 하며, 윤리를 어지럽히는 ‘멸륜난상지배(滅倫亂常之輩)’로 규정했다. 그러고는 왜 이런 자들을 비호하여 그저 내버려 두느냐고 달려들었다.

장서를 받은 채제공은 경악했다. 직책 없는 하급 관원이 일국의 좌의정에게 할 수 있는 선을 훨씬 넘은 글이었다. 임금도 대신을 두드려 흔들려는 불순한 책동으로 보아 격노했다. 분위기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홍낙안이 밤중에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을 찾아갔다. 그가 다짜고짜 말했다. “대감께서 우리를 죽이시려는 모양인데, 우리가 어찌 혼자 죽겠소이까?” 채홍원이 놀라 바라보았다. “근자에 정약종의 서매(庶妹)가 좌상의 며느리가 되었다면서요?” 자신들에게 죄를 물을 경우, 사돈인 정재원 때문에 서학을 믿는 정약용의 무리를 두호하고, 정재원의 처조카 윤지충을 지켜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공격하겠다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벽위편」에 나온다.

이 때문에 채제공은 이튿날 임금께 올린 차자(箚子)에서 원래의 어조를 완전히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정약용이 채홍원을 찾아갔다. 역시 「벽위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정약용이 밤을 타서 들어가 채홍원에게 애걸하는 한편 채홍원을 공갈하고 위협했다. 또 ‘홍낙안의 이번 일은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듣건대 김종수와 심환지가 함께 비밀리에 모의하여 겉으로는 척사의 명분을 빌리면서, 안으로는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겨를 핥으면서 쌀에까지 미쳐, 아울러 대감을 해치려는 것이니, 이로 인해 의리가 깨진다면 다만 우리들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홍낙안은 같이 죽겠다고 위협했고, 정약용은 저들의 최종 목적이 우리가 아니라 채제공이란 말로 종다짐을 놓았다. 어쨌거나 성호학파가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으로 갈려 싸우는 사이에, 정계에서도 채제공을 둘러싼 채당과 홍당의 분기로, 겨우 소생한 남인들의 셈범은 한층 복잡해졌고, 정조의 정국 구상도 뒤엉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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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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