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3)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3)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 신학자의 토론식 수업, 인문주의를 키운 토양이 되다
- 작가 미상,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프레스코화, 산타 마리아노벨라성당, 피렌체, 이탈리아.
유럽 밖에서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때, 교회 권력은 서임권 문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지난한 힘겨루기를 하고, 수도회 중심의 학교에서는 새로운 철학 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 사상은 사실 9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샤를마뉴가 유럽 각지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도시의 교육과 문화가 그곳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시작되었다. 진리의 보관소로서 성경을 가르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길게는 16세기까지 이어진 사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중심을 둔 철학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당 혹은 수도원의 부속 학문기관인 스콜라(Schla)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스콜라주의’ 혹은 ‘스콜라 철학’이라고 했다.
철학, 신앙을 해석하는 도구
스콜라 철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에는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있고, 11세기에 안셀무스가 등장한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기 때문에 흔히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로 알려졌다. 그는 “하느님이 왜 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진리, 자유의지, 악(죄), 삼위일체, 하느님의 속성 등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하느님의 실존에 관한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이것을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이라고 함-은 이후 많은 철학자에 영향을 미쳤다. 스콜라 철학의 핵심은 신앙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철학을 활용한 데 있었다.
11세기 도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또 안셀무스의 활동에 힘입어 12~13세기에는 볼로냐, 옥스퍼드, 파리와 같은 수도원이 아닌 교사와 학생의 길드와 같은 형태의 대학이 새로운 교육체계로 자리를 잡아갔다. 대학들에서는 강의와 토론식 교수 방법이 채택되고, 교수 자격도 규정되었다. 13세기 탁발수도회로 탄생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이런 대학 조직을 운영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럽 밖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슬람의 자극을 받아 방대한 그리스 사상가들의 작품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중세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되었고, 신학자들은 크게 동요했다. 이전까지의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신앙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정점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맞는 것만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이상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하는 데 크게 무게를 둔 것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보에티우스와 같은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주해하고,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안셀무스까지 모든 연구를 검토한 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의 신학, 철학의 주제들을 논쟁 형식의 방대한 논문으로 집필했다. 「신학대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도 학문적으로 교회 안팎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라비아 및 유다 철학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요한 신학 이론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경험적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신적 조명설을 통해 신과의 직접적 일치를 말하는 신비주의를 주장했고, 옥스퍼드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등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아라비아 자연과학자들의 광학사상(光學思想)을 받아들이는 급진적 경향을 보였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전통을 지킨 중도파였다고 할 수 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알베르토 마뉴(Albertus Magnus, 1193~1280)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다. 그는 독일의 신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로, 파리와 쾰른에서 가르쳤고,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있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라비아와 유다, 신플라톤주의, 교부들의 저술로부터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당시의 철학 전반은 물론, 사변적인 신학과 성경해석 및 자연과학 등 방대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를 두고 마뉴, ‘대(大) 알베르토’라고 부른 것은 그의 학문이 그만큼 폭넓고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스콜라 학문이 유럽의 특정 지역에서만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다른 스콜라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처한 현실이 달랐고, 필요성과 목적, 생각과 방법이 다른 특징들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활발한 스콜라일수록 가장 보수적인 지식인과 가장 혁신적인 예술 분야 장인들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학문이 역동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시성 후 그린 제단화
소개하는 그림은 작가 미상의 ‘교단에서 가르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6개월 남짓 되었을 무렵에 그린 제단화로 추정된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의 중앙 복도 좌측 세 번째 경당의 제단화다. 이 대성당은 도미니코 수도회가 설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로냐에서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도미니코회가 자리를 잡고 있어 수도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20년 9월 7일은 도미니코회가 이 대성당에 자리를 잡고 재건하여 축성한 지 600년이 되는 해다. 그러다 보니 평소 공개되지 않던 많은 오래된 벽화(대부분 훼손됨)와 유물들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벽화도 그중의 하나로 2018년에 발견되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서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의 한 교단을 연상시키듯 있고, 학생들이 그 아래 있다. 이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오래전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때가 생각났다. 바티칸 도서관의 열람실에 앉으면 중앙 연단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 동상이 있다. 나는 물론, 많은 저명한 학자들까지 그분과 마주한 학생으로 책을 대하게 된다. 바로 이 그림과 같이.
그림은 매우 단순하지만 시성된 직후에 그린 최초의 토마스 아퀴나스 초상화이고, 천사들이 들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성인의 방대한 신학적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적 권위를 의미하듯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성경에 올려놓고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학생들의 태도는 작가 미상의 이 작품이 대략 어느 화풍이고 작가가 어떤 성향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학생들이 일관된 자세로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역동적인 토론식 수업의 한 장면이라는 것과 여러 면에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작품임을 추정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
스콜라 철학은 흔히 그리스도교의 교의 연구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식 학문 활동으로 인해 이후 과학 발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두 개 학파가 거리를 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학문의 길을 닦았는데, 하나는 알베르토 마뉴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파리학파로 이후 다양한 인문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다른 하나는 로저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학파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하면서도 현상을 통해 자연철학에 천착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현실에 대한 인식과 결부시켜 재구성했고,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 위에 천지만물, 곧 만유(萬有)를 포괄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동자(第一動者)’, 즉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를 만유의 창조 원인인 ‘신’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자연과 은총(Gratia)을 구별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대립시키지 않고,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고 생각했다.
요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함께 깊이 접합되어 있으며, 이후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었다고 하겠다. 인문주의의 발전은 이런 토양 위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면서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