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8)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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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8)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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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8)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페스트 광풍이 몰아치다… 해골과 춤추는 사람들

 

 

 

베른트 노트케, ‘죽음의 무도회’(일부)(1475/1499년), (에스토니아) 탈린의 성 니콜라스 성당 소장(에스토니아 교회 박물관).

 

 

교황청이 아비뇽에 가 있던 1308~1378년 70년 동안 유럽은 실로 엄청난 풍파를 겪었다. 그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이후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을 들면 1348~1351년의 ‘페스트’를 들 수 있다. 그와 관련한 교회사적인 이야기와 흥미로운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이은 대기근, 쇠약해진 유럽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과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는 국가주의가 확산하고 군주국가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1095~1291)의 후유증은 교회를 안팎에서 힘들게 했고, 교황을 지지하던 겔프와 황제를 지지하던 기벨린의 오랜 싸움도 십자군 전쟁 못지않게 유럽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세 봉건주의의 몰락과 도시 국가로의 이행 과정에서 겪는 진통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많았다. 국지적인 많은 전쟁과 함께,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 간 분쟁은 백년 전쟁(1337~1453)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도시 국가들이 탄생했고,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닥친 기후 변화(1310~1346)는 유럽을 대기근으로 몰고 갔다. 1314년 한여름에 내린 폭우는 오랫동안 많이도 내렸다. 농작물은 모두 주저앉고, 열매는 뭉개지고 줄기는 썩어갔다. 늦은 가을걷이는 수확할 것이 별로 없었다. 이듬해 상황은 더 나빴다. 제방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들판과 목초지를 덮쳤다. 몽골인들의 침입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원인 모를 전염병(아마도 탄저병)은 가축들마저 덮쳤다. 각국은 밀 가격의 폭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1316년에도, 1317년에도 비는 다시 내렸고, 유럽은 사상 최악의 기근을 경험해야 했다. 흉흉한 이야기도 나돌았다. 인육을 먹었다는 둥, 유랑하는 농민이 많아 인간 사냥꾼이 생겼다는 둥, 썩은 음식을 오랫동안 먹어 정신병이 생겼다는 둥, 기근이 몰고 온 강도와 무법 상태와 전쟁은 그 시기를 정의하는 단어가 되었다.

 

대기근의 원인은 온난기에서 작은 빙하기로의 느린 전환으로 진단했다. 그 시기, 농업 생산력은 바닥을 쳤고, 인구는 감소했다. 유럽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진 심각한 영양실조와 기아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리에는 온통 야윈 얼굴들뿐이었다. 동유럽 사람들은 거의 굶다시피 했다. 쇠약해진 건강은 각종 질병에 취약했다.

 

 

페스트의 창궐

 

1348~1351년의 페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불어닥친 광풍이었다. 1320~1330년대 북경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는 1340년대에 이르러 서진하는 몽골군과 함께 감염 지역이 확대되었다. 1346년 크림 반도 교역의 중심지였던 카파(Caffa)는 제노바의 식민 도시이자 유럽 상인들의 중요한 무역 항로였다. 몽골 제국의 군대는 카파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유럽군은 카파 성을 지키기 위해 성문을 닫았다. 몽골 군인들은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안으로 던졌고, 대재앙은 시작되었다.

 

1347년 10월, 흑해를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 메시나 항구에 도착했다. ‘죽음의 배’로 알려진 이 상선들에 탑승한 선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고, 몇몇 생존자들은 전신이 고름으로, 피부는 검게 변해 있었다. 죽은 선원들뿐 아니라, 정박한 배에서 나온 쥐로 인해 시칠리아 섬은 순식간에 죽음의 섬으로 바뀌었다. 이후 페스트는 피사와 제노바, 마르세유 등 지중해 무역을 전담하고 있던 항구들을 통해 유럽 전역에 신속하게 번졌다. 2500만 명,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의사들은 덥고 습한 기후 탓으로 보고, 감염된 도시를 떠나라고 권했다. 교황은 열흘간의 격리 기간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고, 클레멘스 6세 교황(재위 1342~1352)은 아비뇽에서 백성들에게 참회를 촉구했다. 여기저기서 ‘속죄의 형제단’이 만들어졌고,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행복을 입고 쇠로 된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치며 참회에 동참했다. 민간에서 대응하는 방식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원인이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쥐는 항상 있었고, 침대와 옷장에 이도 항상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병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평소 미운털이 박힌 유다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서 그렇다며 유다인 집단 학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유다인 보호에 나서며 같은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 화가 판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베른트 노트케(Bernt Notke, 1435~1509년)의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다. 14세기 중반 페스트 펜데믹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작가인 노트케는 르네상스 시기, 독일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가, 화가, 판화가다. 강렬한 표현력으로 독일의 조각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독일의 후기 고딕 양식의 조각가 헨닝 반 데르 헤이드(Henning von der Heyde, 1460~1521년)가 그의 제자다. 독일, 체코, 발트 해 연안, 스웨덴 등지에서 살며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이후 북유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많은 전쟁으로 소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알려진 그의 작품들로는 뤼베크 대성당에 있는 ‘승리의 십자가’(1477년, 조각), 덴마크 오르후스의 ‘중앙 제단화’(1479년, 조각에 채색), ‘탈린의 제단화와 프리즈’(1482년, 조각에 채색), 1489년 스톡홀름에서 제작한 ‘용에 맞서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리비아 여왕’(조각)이 있다. 후에 뤼베크(Lubeck)에서 사망했다.

 

 

페스트와 신앙

 

페스트는 이후에도 1300년대가 끝날 때까지 10년 주기로 한 번씩 돌아와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그 결과 종교와 문화, 교육과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유럽을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구 격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농민들의 부역과 과세 부담을 가중해 반란과 봉기를 초래했고, 종국에는 봉건 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년), 이탈리아의 촘피의 난(1378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 등은 그것을 입증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농민들은 도망하여 신분을 바꾸기도 했다. 사회ㆍ경제 차원에서 지위가 향상되고,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며, 독립 자영 농민층의 형성이 뚜렷해졌다.

 

1300년대의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을 거치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가지 극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타락한 사람들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 속죄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행과 단식, 채찍질과 같은 사적인 차원에서 자선 사업과 기부 등 공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교회에 대한 기부는 성화, 제단화 등의 미술품 기증으로 이어져 미술품 수요가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대재앙에 직면하고 보니, 종교가 너무 무기력하다고 느낀 것이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회의는 맹목적인 신앙보다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이성주의의 발달을 부추겼다.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해지면서 개인으로서 인간상이 제시되고, 현세적인 가치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다.

 

 

그림 속으로

 

‘죽음의 무도회(The Danse Macabre)’로 알려진 이 작품은 기근과 전쟁, 페스트 등 죽음의 불가피함과 공포를 알레고리(개념이나 사실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풍자적으로 표현)로 묘사했다. 죽음으로 표현되는 해골들이 산 자들과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여기에는 교황, 황제와 황후, 추기경과 왕, 주교, 공작, 수도원장, 기사, 수도사, 귀족, 시장, 의사, 고리대금업자, 사제, 상인, 교회 행정관, 장인, 청년, 소녀, 요람 속 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출동한다. 죽음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고귀한 사람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한다.

 

분위기는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축제하는 것처럼 흥겹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전체적인 주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다. 생명이 얼마나 허무한지, 현세에서 누리는 삶의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일깨우려는 것 같다.

 

그림이 있던 에스토니아의 성 니콜라스 성당(Niguliste kirik)은 1523~1524년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2년에 있었던 공습으로 성당이 부서지면서 작품도 완전히 사라졌다. 15세기 말에 그린 최초의 30m짜리 그림 중 남은 일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20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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