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어은동 공소
관리자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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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17:58
대전 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통영 방면으로 내려가다 장수 나들목에서 내려와 진안 방향으로 26번 국도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오천 삼거리가 나온다. 오천 초등학교를 끼고 좌회전해서 산골을 4km 남짓 가면 산 막다른 골짜기에 마을이 나타난다.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해발 1059m의 성수산(聖壽山) 북쪽 자락 끝에 있는 어은동(魚隱洞) 마을이다.
어은동 노인정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마당 위로 왼쪽에
종탑을 둔 붉은 함석지붕 건물이 보인다. 1900년 본당으로 설정된 어은동 공소이다. 공소 앞마당 한쪽 끝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 보면
공소 건물이 건립된 해는 1909년이지만 그 이전인 1900년에 이미 본당으로 설립된 곳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달려왔지만 한눈에 산속 오지임을
알 수 있는데 100여 년 전이라면 정말로 깊은 산골이었을 것이다.
“전주교구사” 또는 “진안본당 105년사” 같은 자료를 보면 이곳 어은동은 이미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다. 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전라도 산중으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삼바실, 절골, 모시골, 절번덕이 등에 흩어져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어은동 공소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어은동을 비롯한 진안 지역 일대로 전라도의 다른 지역 교우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자수가 현저히 증가하였고,
1888-1889년 이 지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40명에 이를 만큼 교세는 날로 발전하였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1897-1898년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최고였다. 이후에도 신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보두네 신부가 담당했던 12년 동안 냉담교우가 없었으며, 1886년에서 1900년 사이에 무려 27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에 보두네
신부는 진안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남원, 무주 지역의 많은 공소들을 관할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보두네 신부에게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할 것을 제안하였고, 한국인 신부 한 명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뮈텔 주교는 신설 본당 소재지로 남원읍을
추천했으나, 보두네 신부는 당시 교세로 미루어 남원 지역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어은동 지역에 본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파견하였다. 김양홍 신부는 보두네 신부의 관할 구역 가운데 진안을 비롯한 11개 지역 공소를 이관 받아 이를 다시 18개
공소(진안 4, 무주 1, 용담 1, 장수 9, 남원 3)로 나누었는데, 당시 이관 받은 신자수는 999명이었다. 이 중에서 삼바실, 모시골,
절골, 절번덕이를 합친 어은동 공소는 신자수가 189명에 이르렀다. 당시 어은동 본당은 본당으로 설립되었지만 행정상으로는 공소로
취급되었다.
1901년 9월 김양홍 신부는 옛 공소집을 수리 · 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의 성당으로 완공하였다. 1903년 신자수가 1,400명에 이르자 기존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이듬해 마을
아래쪽에 15칸의 새 성당을 신축하였다. 1905년에는 성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뮈텔 주교의 지시로 여교우들이 앉는 자리에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그 후로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1909년 3월 마침내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여, 9월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02년 5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새 성당은 정면 6칸 중 오른쪽 2칸의 일부를 제대로, 나머지는 제의방과 사제관 등으로 사용했다. 또 왼쪽
1칸은 남녀가 따로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건물 내부 평면은 ‘아’(亞)자 형식을 이루고 있고,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남녀 교우석을 구별했던 표시이다. 제대 뒷벽에는 목조로 된 감실과 목제
촛대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제대를 감실 바로 밑 벽에 바짝 붙여서 설치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은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八作) 지붕에 너와로 이었다. 너와는 기와용으로
사용하는 얇고 넓적한 점판암이었다. 교우들은 지붕으로 사용할 너와를 구하기 위해 30리나 떨어진 백운면 백암리까지 가서 지게로 날라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목조 건물이 돌너와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교우들은 1967년 너와지붕을 가벼운 함석지붕으로 바꾸었다.
새 성당이 완공되던 당시 진안읍에는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김양홍 신부는 1909년 2월 이들을 위해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국어, 한문, 수신, 산수 등을 가르쳤다. 설립 당시 학생수는 30명이었으나 곧 60여 명으로 늘어나자 1911년 9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 영신학교의 운영은 교육뿐만 아니라 전교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교우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 공소 교우만도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 · 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15년 6월 김양홍 신부가 제주도로 전임되고, 임시 주임으로 타케(Taquet, 嚴) 에밀리오 신부가 임명되어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진안에는 군상 천주당(진안면 군상리), 진안 천주당(진안면 죽산리), 반송 천주당(백운면 반송리) 등 3개의 포교소가
개설되었다. 2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1921년 6월 장재동 공소로 옮겨 거처하다가, 1922년 6월 다시 마령면 연장리의 한들 공소로 옮겼다. 한들 공소에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편입된 가장 큰 이유는 어은동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들에 정착한 후 7월부터 이상화 신부는 박덕화(朴德和) 다미아노의 주선으로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1924년 10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30년에 종각을 세웠다. 이상화 신부가 한들로 본당을 옮길 때 어은동의 일부 신자들도 신부를 따라 한들로 이사하였다. 그때 한들의 박덕화는
이주한 신자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논을 구입해 주었다.
1941년 4월 13일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의 이기수(李基守) 야고보
신부가 진안읍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한들 본당에는 허일록(許日錄) 타대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기수 신부는 진안읍 군상리 866번지의
초가를 구입하여 기와지붕의 강당으로 개수하여 사목활동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2년 말 진안읍의 본당이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한편 어은동 공소에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이 신설되어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과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며 전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6 · 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1951년 4월 허일록 신부 후임으로 한들 본당에 부임한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는 그 이듬해에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였다.
김반석 신부는 이기수 신부가 사용하였던 군상리의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당시 이기수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군하리 전답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과 각 공소 회장들로 성당 신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6년 10월
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1957년 7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어은동 · 진안읍 · 군상리 · 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의 본당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고,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고기가 숨은 형상이라고 해서 어은동(魚隱洞)이라고 부르는 마을. 물고기는 로마 교회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이다. 마을 이름 자체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와 살았던 우리네 신앙 선조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래선지 이 마을사람 대부분이 교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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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여러 곳에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해 당시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해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를
파견했습니다. 1901년 9월 김양홍 신부는 옛 공소집을 수리 · 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의 성당으로 완공했습니다. 1903년 신자수가 1,400명에 이르자 이듬해 마을 아래쪽에 15칸의 새 성당을 신축했고, 그 후로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1909년 3월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여 9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입니다. 2대 주임 이상화 신부는 1922년 6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마령면 연장리의 한들 공소로 본당을 옮겼습니다. 어은동 본당이 한들 공소에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편입된 가장 큰 이유는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1년 4월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의 이기수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 진안읍의 본당이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습니다. 한편 어은동 공소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송남호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과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며 전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6 · 25 전쟁으로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공소로 환원되었습니다. 1952년 한들 본당의 김반석 신부는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한 후 1956년 10월 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이듬해 7월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어은동 · 진안읍 · 군상리 · 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의 본당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고,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미사시간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주일미사 | 일 | 06:00 | 미사 일정은 진안 성당 것입니다. |
10:30 | 교중미사 | ||
평일미사 | 월 | 06:00 | |
화 | 20:00 | ||
수 | 10:00 | ||
목 | 20:00 | ||
금 | 10:00 | ||
토 | 16:00 | 교중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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