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관리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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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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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 년이 겨우 넘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 반을 차지하는 1백여 년은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박해의 고난기였다. 전국 방방곡곡 순교자들의 피가 튀지 않은 돌이 없었고 포졸들의 눈길을 피해 방황하던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가 닿지 않은 산과 골짜기가 없었다.
목자도 없이 스스로 복음을 찾아 나섰고 천주의 말씀을 자진해서 수용했던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하느님께서 주신 고난의 십자가가 지닌 의미를 우리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천진암, 주어사에서 시작돼 한양 땅에서 꽃피운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은 그저 천주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목을 잘리고 매를 맞아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처형지에는 그 때의 처참했던 순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서울시 중구 광희동 2가에 묵묵히 서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1711년에 개축하였다. 성문 위 문루는 1710년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광희문이라는 편액도 이때 써 붙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어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목자도 없이 스스로 복음을 찾아 나섰고 천주의 말씀을 자진해서 수용했던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하느님께서 주신 고난의 십자가가 지닌 의미를 우리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천진암, 주어사에서 시작돼 한양 땅에서 꽃피운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은 그저 천주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목을 잘리고 매를 맞아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처형지에는 그 때의 처참했던 순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서울시 중구 광희동 2가에 묵묵히 서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1711년에 개축하였다. 성문 위 문루는 1710년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광희문이라는 편액도 이때 써 붙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어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광희문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 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이 문을 통해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성녀 우술임 수산나 · 김임이 데레사 · 이간난 아가타 · 정철염 가타리나, 그리고 복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며느리인 복녀 이 안나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버려졌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 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 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84년에는 신당동 천주교회에서 성인 유해 순회 기도회를 바로 이곳에서 지내기도 했다.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3년 9월 2일 성지 순례길을 선포하면서 광희문을 순례길 1코스(말씀의 길)에 포함하였다. 그리고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한정관 바오로 신부를 초대 성지담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9일)]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이 문을 통해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성녀 우술임 수산나 · 김임이 데레사 · 이간난 아가타 · 정철염 가타리나, 그리고 복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며느리인 복녀 이 안나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버려졌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 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 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84년에는 신당동 천주교회에서 성인 유해 순회 기도회를 바로 이곳에서 지내기도 했다.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3년 9월 2일 성지 순례길을 선포하면서 광희문을 순례길 1코스(말씀의 길)에 포함하였다. 그리고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한정관 바오로 신부를 초대 성지담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9일)]
광희문은 장충단과 한강 사이의 수구문(水口門)으로 본래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린 광희문은 천주교인에게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박해로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을 통해 내다 버려졌습니다.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한정관 바오로 신부를 초대 성지담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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