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李鉉) 안토니오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교회 서적을 얻어보고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삼촌 이희영(루가)이 김건순(요사팟)의 집에서
살게 되자 자주 그곳을 왕래하였으며,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에게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안토니오는 점차 천주교의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아갔고, 이곳에서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정광수(바르나바), 최필제(베드로), 김종교(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기도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안토니오는 같은 교우인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홍필주와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1800년 겨울에 그는 양친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이현 안토니오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내 포도청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에 앞서 그의 삼촌 이희영도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을 당하였다.
문초가 시작되자 안토니오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계속 문초와 형벌이 가해지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이후 형조로 이송된 안토니오는 포도청에서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그리고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그러므로 박해자들이 아무리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지킨 다음, 안토니오는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그가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4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읽으면서 여기에 깊이
빠졌습니다.……여러 해 동안 천주교에 빠져 이를 믿어 왔으니, 이제 아무리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