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75. 주문모 신부의 등대, 이보현과 황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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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30
처남 매부 이보현과 황심, 주문모 신부 도와 조선 교회 명맥 이어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5. 주문모 신부의 등대, 이보현과 황심
2021.11.21발행 [1638호]
▲ 포졸들이 배교를 거부한 이보현을 해미 장터로 끌고나가 죽도록 매질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
주문모 신부의 한양 탈출과 지방 잠행
1795년 4월 전주에서 윤유일과 최인길을 따라 상경했던 주문모 신부는 5월 한영익의 밀고로 큰 위기에 처했다가 강완숙의 집 뒤란 장작광에 숨어 7월까지 숨어 지냈다. 푹푹 찌는 삼복의 불볕더위를 지나 서늘한 가을 기운이 돋을 때까지 계속된 어두운 장작광 속의 도피 생활은 기도 밖에 아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절망적 시간이었다.
이후 전주로 보낸 편지에 응답이 올라오고 나서도, 신부를 추적하는 감시망이 계속 죄어오자 신부는 더 이상 서울에 숨어 지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1801년 3월 15일 의금부의 추국에서 심문관이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달아나 어디로 갔었느냐고 물었을 때, 신부는 강완숙의 이름은 대지 않고, 시골로 달아나 연산 이보현(李步玄, 1773∼1799) 프란치스코의 집에 몇 달간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심문관이 다시 그동안 먹고 잤던 곳을 자세히 고하라고 하자, “양근에서 한 차례 권가(權家)에 이르러 곧장 올라가 약 3일간, 연산에서는 한 차례 약 두 달 남짓 머물렀습니다. 대략 병진년(1796) 5월쯤 서울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양을 탈출해서 양근으로 신부를 모셔간 것으로 보아, 당시 신부와 동행한 것은 강완숙 집 인근 창동에 살았던 권상문(權相問, 1768∼1801) 바실리오(巴西略)였을 것이다. 그는 1791년에 죽은 권일신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이름이 이보현이다. 신부는 충청도 연산(連山) 사는 이보현의 집에서 두 달간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신부는 어떤 경로로 그의 집까지 가게 되었을까? 결과적으로 신부의 충청도행은 1795년 4월에 이어 1796년 봄에도 있었던 셈이다. 당시 신부가 이보현의 이름을 바로 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두 해 전 해미에서 순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신부는 아마도 1796년 봄 2월경에 한양을 탈출해 양근으로 피신했을 것이다.
이 무렵 신부는 잠행 중에도 비선을 통해 지방의 지도자들과 연락하며 교회 조직의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부가 한양을 벗어난 것은 포위망이 점점 촘촘하게 좁혀 들어왔기도 했겠지만, 북경에 보낼 문건을 작성하고, 조선 신자를 대표하여 북경 주교에게 올리는 청원서의 문안 손질 등 가까운 거리에서 지도부와 긴밀하게 소통할 필요 또한 절박했기 때문이다.
주 신부가 연산 이보현의 집에 머문 이유
신부는 다시 양근을 떠나 1796년 2월 말쯤 연산 땅 이보현의 집에 안착하여, 이곳에서 두 달 남짓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렀다. 이보현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집으로 신부를 안내한 것은 또 누구였을까? 여기에도 마치 기밀 작전을 수행하듯 당시 교계 수뇌부의 네트워크가 총동원되어 진행된 느낌이 있다.
우선 연산 이보현의 집으로 신부를 모시기로 한 결정은 서울 수뇌부 및 양근, 그리고 전주 유관검 등의 협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현은 1795년 7월 유관검에게 보낸 주문모 신부의 편지에 따라 윤지헌이 북경 밀사로 추천했던 황심(黃沁, 1756~1801) 토마스의 처남이었다. 이보현은 24세 때인 1791년경 자형인 황심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래 그의 집은 덕산 황무실에 있었다.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는 외곬수의 성격이 더해져서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고집불통이 되었다.
자형인 황심을 통해 천주교와 만난 뒤 그는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애초에 결혼에 뜻이 없었던 그가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결혼했고, 속죄와 고행을 통한 영성 수련에 온통 힘을 쏟았다. 그는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 황무실을 떠나 자형 황심이 살고 있던 몇백 리 떨어진 연산 땅 계룡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채소만 먹는 금욕 생활에 돌입해 신앙생활에 전심했다.
황심의 집 또한 원래는 덕산 용머리에 있었다. 황심이 먼저 연산에 정착했고, 이어 이보현이 합류하여 황심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꾸려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은 지금의 논산시에 자리한 연산면으로 이곳은 유관검의 전주나 윤지헌의 저구리와는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당시 신부는 북경으로 파견할 밀사와 북경 교회의 하회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소요 비용의 마련과 밀사의 선발, 청원서 작성까지 모든 작업이 전주 유관검과 윤지헌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연산은 적당한 위치였다.
「추안급국안」 속 1801년 4월 2일 자 주문모의 공초 속에 이보현에 관한 묘한 구절이 하나 더 나온다. “저는 1797년에 한 차례 북경에 머물러 사는 서양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9월 그믐에 동지사행으로 떠난 사람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중간에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동지사의 행차는 아마도 마땅히 11월 그믐에 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떠난 사람은 이보현으로 연산에 사는 사람입니다. 재작년에 해미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문맥이 다소 모호하다. 요컨대 주문모 신부가 1797년에 북경의 서양 신부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때 편지 전달의 심부름을 맡은 사람이 연산 사람 이보현이었다는 내용이다. 또 11월에 떠나는 동지사행에 앞서 9월 그믐에 이보현이 먼저 의주 쪽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는 중간에 먼저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사행단에 앞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보현이 중국을 다녀왔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때도 중국에 들어간 사람은 황심이었다. 그렇다면 이보현이 먼저 올라가서 황심의 북경행을 위해 필요한 준비 작업을 미리 했다는 이야기일까? 신부는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고 있던 황심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이보현의 이름을 댔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거나 이보현과 황심은 처남 매부간으로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신부를 두 달가량 자기 집에서 모셨고, 이후로도 황심은 신부의 북경 심부름을 도맡아, 북경만 세 차례를 다녀왔다. 꽉 막혔던 조선 교회의 숨통이 이를 통해 겨우 쉴 수 있게 되었다.
연산 신앙 공동체와 이보현의 죽음
다블뤼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에 따르면, 이보현은 금욕 생활 중에 늘 “천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원하려면 금욕생활을 하든가 순교로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천주의 참된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799년 충청도에서 교난이 크게 일어나자, 그는 오히려 이를 순교의 기회로 여겨, 가족과 마을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더욱 열중하였다. 매일 주님의 수난에 대해 얘기해주며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체포를 예감한 그는 신앙촌을 이루고 살던 온 마을 사람들에게 한턱내겠다며 술을 많이 담그게 했다. 술이 익고 이틀 뒤에 포교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포교들도 그가 담가둔 술대접을 잘 받았다. 그는 관장 앞에 끌려갔다. 서학책을 내놓으라고 하니 너무 소중해 바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연유를 묻자, 만유의 주인이신 천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외교인에게 맡길 수 없노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 괘씸한 대답 때문에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연산에 살던 그는 관할지로의 이송 명령에 따라 해미로 보내졌다. 해미의 천주교도에 대한 형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것이었다. 그곳 영장(營將)의 매서운 형벌 앞에서도 그의 태도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왜 고향과 조상을 버리고 굳이 먼 타지까지 가서 가증스러운 도를 따르느냐는 힐난에, 이보현은 생명을 주신 대군대부이신 천주를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박따박 대답했다. 함께 한 무리를 모두 대라고 하자, 스승과 제자가 사방에 널려 있지만, 그들을 고발하면 나리께서 나처럼 다루실 터이니 죽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몇 차례 기절하고 깨어나면서 갖은 고문을 당했어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옥에 들어가서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함께 갇힌 이들을 권면하고, 예수의 수난을 증언했다.
이튿날 관장은 더욱 분이 나서 천주를 배반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보현은 주리를 틀고, 1만 대의 매를 맞더라도 아무것도 고하지 않겠다며 완강히 버텼다. 그는 천주의 이름으로 죽기를 작정한 사람이었다. 관장은 “저게 사람이냐”며 펄펄 뛰면서 갖은 극악한 고문을 더하게 했다. 그렇게 하고도 관장은 그에게서 아무런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튿날 관장은 이보현을 장터에서 조리돌림 하게 한 뒤, 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게 했다. 아무리 때려도 그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이 엎드렸던 그의 몸을 뒤집어 몽둥이로 그의 급소를 세게 치자, 그제서야 그가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는 고작 27세의 젊은이였다. 며칠 뒤 그의 시신을 거둘 때 마을 사람들이 가서 보니, 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외교인 몇 사람이 입교했다.
한편 「추안급국안」 중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의 공초에 따르면 “주문모가 갈륭파의 집 안에 있었는데, 바야흐로 매우 위급한 지경에 처했을 때, 한 남자 천주교인이 재빨리 시골로 가서 숨어 지내는 한 천주교인을 만나 두 곳의 적당한 장소를 미리 마련했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심문관이 둘의 이름과 피신 장소를 대라고 추궁하자, 황사영은 황심에게 들은 이야기이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황심은 1795년 이래로 주문모 신부의 체포 직전까지 측근에서 보좌하며 신부를 곁에서 지켰다.
이보현과 황심! 처남 매부 간인 두 사람은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총체적 난국에 빠져 방향을 잃었던 조선 교회의 명맥을 잇게 하는데 소중한 역할을 했다. 당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주문모 신부가 이들의 손길과 도움을 통해, 1800년 이후 명도회를 설립해 다시 신앙의 불길을 들불처럼 번지게 한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