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1) 바치초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1) 바치초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중국 선교의 꿈 품은 채 하늘로 간 하비에르
- 바치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75), 성 베난치오 성당, 아스콜리 피체노, 이탈리아.
유럽 대륙은 마르틴 루터를 시작으로 츠빙글리, 장 칼뱅을 거치며 독일, 스위스에 이어 토마스 크랜머와 헨리 8세에 의한 영국까지, 1500년도 초반은 연이어 일어난 종교개혁의 불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1527년의 로마 약탈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마 약탈의 수모를 겪은 클레멘스 7세 교황에 이어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1534년 10월 13일 바오로 3세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회 쇄신과 르네상스 진흥
바오로 3세 교황은 크게 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것은 ‘교회 쇄신’과 ‘르네상스를 진흥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답을 주어야 했고 그것은 교회 쇄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짓다 만 성 베드로 대성전 역시 완성해야 했기에 르네상스 문예 부흥의 선상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식에서 과거와 전혀 달랐다. 과거에는 명령하고 소환하고 단죄하는 형식이었다면, 바오로 3세는 재임 기간 내내 가톨릭교회의 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테아티노회가 발전하도록 도와주고, 성바오로여자시종회(1535년), 성체형제단(1539년), 예수회(1540년), 소마스키수도회(1540년), 오르솔리네여자수도회(1544년) 등 새로운 수도회와 교회 단체들을 인가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주도했다. 교회 차원에서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하기도 했지만,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선두로 많은 성인의 시대를 예고하기도 했다. 그중 예수회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바오로 3세는 예수회 설립을 인가한 것뿐 아니라, 초기에 회원 수를 60명으로 한정했던 것을 폐지하고, 설립자 이냐시오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의 「영신 수련(Esercizi spirituali)」을 공식 출판하도록 허가(imprimatur)해 주었다. 예수회원 라이네즈(Diego Lanez)와 살메론(Alfonso Salmern)을 트렌토 공의회 제1차 회기(1546~1547)에서 교황청 신학자로 참석하도록 하기도 했다. 예수회 역시 종교개혁의 폭풍우 속에서 탄생한 수도회였던 만큼, 단지 수도회의 발전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전체를 향한 비전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교회의 ‘영적 헌병대’이기를 자처했다.
아시아 선교에 나서다
바오로 3세는 앞서 1534년부터 인도를 중심으로 보편 교회의 아시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1622년 교황청 포교성성(오늘날 인류복음화성)이 설립되기 이전이라, 선교 책임을 선교수도회나 단체에 의탁했기 때문에 아시아 선교에 뛰어들 수도회를 물색해야 했다. 당시 아시아는 뿌리 깊은 고유한 문화가 있어 유럽 선교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을뿐더러, 항해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쉽지 않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오로 3세는 1539년 7월 8일 고아교구 설립을 인가했고, 이듬해 예수회 설립 인가와 동시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재위 1521~1557년)의 요청에 따라 그 일대의 선교 책임을 예수회에 요청했다. 예수회는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 서약에 ‘선교 서약(circa missionaris)’이라고 하는 4번째 서약을 넣어 교황의 이 요청에 응답했다.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1540년)으로 알려진 이 서약의 내용은 이렇다. “교황께서 모든 영혼의 유익과 신앙의 전파에 관련된 어떤 일을 명령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핑계나 망설임 없이, 즉시 이행해야 하며, 우리를 특정 지역으로 파견할 경우, 터키인들이나 인도라 불리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어떤 비신자들 혹은 이교인들이나 열교인들에게 보낸다더라도 즉시 떠나야 한다.”(바오로 3세 교황이 승인한 예수회 기본법 제3조)
여기서 터키, 인도, 이교인과 열교인들 사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아시아 지역을 일컫는다. 이냐시오는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와 보바딜라를 지목했다. 그러나 보바딜라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자, 하비에르(Francesco Xavier, 1506~1552)가 대타로 투입됐다. 로드리게스도 결국 리스본에 남는 바람에, 아시아로 가는 산티아고(Santiago)호에 오른 사람은 하비에르 혼자뿐이었다.
이냐시오보다 15살이 어리지만, 친구며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하비에르가 인도 고아(Goa)에 도착한 것은 1542년 5월 6일이었다. 이후 그는 약 13년간 인도양을 내 집처럼 여기며 일본과 중국 선교의 발판을 다졌다. 그가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만도 3년이 넘었다. 인도에서 진주조개잡이를 하는 불가촉천민들을 대상으로 코모린 곶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말루쿠제도를 거쳐 1549년 8월 15일, 일본인 안지로(安次郞)와 함께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중 한 불교 선사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선사 왈, “어찌하여 이렇게 먼 데까지 오셨습니까?” 하비에르 답, “진리를 전하러 왔습니다.” 선사 왈, “그대가 전하는 것이 진리라면, 어찌하여 중국이 모르고 있답니까?”
그랬다. 하비에르가 보기에 일본의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온전히 받고 있었다. 중국이 모르는 진리,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하비에르는 죽는 순간까지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당시 중국은 절벽이었다. 외국인을 극도로 혐오하고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절벽이었다. 결국, 그는 1552년 12월 3일, 중국이 보이는 광동성 남쪽 상천도(上川島)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
바로크 시대 수작 남겨
소개하는 작품은 제노바 출신의 바치초(Baciccio)로 알려진 가울리(Giovan Battista Gaulli, 1639~1709)가 그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75)이다. 300×201cm의 대형 유화 작품으로 이탈리아 아스콜리 피체노에 있는 성 베난치오 성당 제단화다. 이 그림의 초안은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크 예수회 작품 전시실에 있다. 이 초안에서 여러 개의 유사한 작품이 나왔다.
바치초는 고향에서 보르조네 밑에서 루벤스와 반다이크의 예술을 통해 자유로운 붓놀림과 다양한 색채를 배웠다. 1657년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난 뒤, 로마로 와서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옆에서 그의 가장 탁월한 협력자로 활동했다. 그의 최고 수작으로 알려진 로마 예수 성당의 천장화 ‘예수 이름의 승리’도 베르니니의 권유로 완성했다.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주제대를 덮고 있는 천개(天蓋, Baldachino)에 버금가는 회화와 조각과 건축이 한 몸을 이룬 환상적인 베르니니 풍의 회화 작품으로 비유된다.
가울리는 뛰어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베르니니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그 외 여러 지역에 제단화를 남겼는데, 이 작품도 그중 하나다. 베르니니와 함께 바로크 시대 최고의 수작들을 도처에 남기고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뒤로하고 케루빔 천사에 둘러싸여 이승을 하직하고 있다. 중국을 눈앞에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듯 힘겹게 귀천하고 있다.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성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손가락으로 멀리 중국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이후 선교 역사에 남긴 업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소개한다. 고아(인도)에서 중국으로 떠나기 6일 전(1552년 4월 9일)에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쓴 마지막 편지의 한 대목이다.
“(일본과 중국은) 많은 고생과 박해 속에서도 미사의 위로와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는 특별한 힘이 참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총장 신부님의 자비로 신부들이 일본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하는 많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공부한) 학자가 필요합니다. (특정 분야에) 탁월한 기술을 가진 사람도 좋습니다. 대화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아무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구에 대해서도 더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천체의 움직임, 일식과 달의 움직임과 빗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눈과 우박, 천둥, 번개에 대해서, 혜성과 유사한 자연 현상들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백성의 뜻을 알기 위해 이런 현상들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비에르는 예수회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를 남기고,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톨릭교회는 포교성성을 설립하던 1622년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1927년 리지외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9일, 김혜경 세레나(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