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차 추자도 황경한(황사영 알렉시오,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묘
20170928(목) 원정 순례 3일차 일정은 다행히 어제와는 달리 해상의 파고가 잔잔해져서 추자도행 여객선에 올라 황사영(알렉시오)와 정난주(마리아) 사이에 출생한 아들 황경한의 묘를 찾아가는 날이다.
50차 추자도 황경한묘 순례는 제주도 뿐만아니라 목포, 우수영, 완도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지만 제주도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은 두 곳에서 서로 다른 사업자가 운영하는 여객선이 하루에 오전, 오후 두 차례 각각 출항 하는데...
오늘 우리가 제주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이용 할 퀸스타2호가 출항 대기 중이다.
제주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한 승선표를 주민증을 제시하고 창구에서 발권을 받는다.
첫째는 2부두 연안여객 터미널의 씨월드고속훼리 퀸스타2호(2,4주 수요일 휴항) 제주 2두부 오전 09:30~추차도 10:30~해남 우수영여객터미널 12:30을 이용하는 방법과,
둘째는 7부두 국제여객터미널의 한일고속 레드펄호(1,3주 수요일 휴항) 제주 7부두 오후 13:45~추자도 15:15~완도여객터미널 17:45을 이용 하여야 추자도에서 숙박을 하지 않고 당일에 자전거로 순례를 마치고 육지에 도착 할 수 있다.
추자도는 기상에 따라 매일 아침 업무개시 시간 이후에 당일 출항 여부를 결정하여 발표하기 때문에 홈페이지나 전화로 확인하여야 하며, 일기에 따라 추자도에서 육지나 제주도로 나오는 것도 제한을 받을 수 있으니 스케줄을 잡을 때는 항상 기상을 보아가면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어제밤 묵은 숙소에서 07:30에 나와서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연안여객터미널로 향하며 바다를 보니 다행히 파도는 심하지 않다.
임항로 용진교를 건너서 연안여객터미널로 가기 위해 정발렌티노가 사진을 찍은 나를 잠시 기다리고 있다.
연안여객 터미널은 추자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다.
자전거는 화물전용 통로를 이용하여 여객선 1층에 먼저 싣고나서 다시 밖으로 나가서 2층 사람이 승선하는 검색대를 이용하여 배 안으로 들어가 티켓에 지정된 좌석에 앉는다. 09:30에 출발 후 약 1시간 후 상추자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배가 출항하여 약 10분이 경과하니 문제가 생겼다. 생각보다 너울이 심하여 정발렌티노가 구토증이 생겨서 결국 화장실로 가서 상추자항에 입항 시간이 다되어서야 기진맥진 상태로 자리로 돌아와 하선을 위해 자전거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가는데 얼굴 색이 좋지를 않다.
서쪽 상추자항에서 동쪽 신양항 방향으로 라이딩을 하게 되고, 황경한묘를 순례 후에 다시 신양항에서 15:30에 레드펄을 승선하여 완도항에 17:45에 도착하게 된다.
드디어 상추자항에 하선하여 주변을 둘러 본다. 발렌티노는 여전히 어지러워 해서 잠시 쉬게 하고 주변 촬영을 해 본다.
상추자항에 대기중인 작은 배들이 아기가지 하다. 주로 낚시배로 이용되는 듯 하다.
상추자항 여객선 대합실
대합실은 티케팅도 하지만 홍보관 역할을 한다.
제주시 추자면에 속해 있는 추자도는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2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하추자도는 추자대교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추자도의 면적은 1.3㎢, 하추자도의 면적은 4.15㎢이며, 면사무소는 상추자도에, 관내 하나뿐인 중학교는 하추자도에 위치한다.
추자면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이 두 섬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1991년 4,708명에서 2016년 1,906명으로 59.5% 감소했다. 인구 감소로 부속 유인도서에는 20명 남짓이 살고 있고, 추포도는 1983년, 횡간도는
1991년 분교가 폐교되어 추자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둘 중에선 태양광 발전소가 있는 횡간도가 그나마 좀 구색이 갖춰져 있다.
추자도 주민들은 풍랑주의보에 상관없이 운항이 가능하고, 보다 많은 승객과 화물을 한번에 운반할 수 있는 대형여객선 투입을
계속 요구해 왔다.
추자도로 들어가는 선박편은 제주-상추자-해남 우수영 항로의 퀸스타2호(450톤급), 제주-하추자(신양항)-완도
항로로 운항하는 한일고속의 레드펄호(3,000톤급)가 각 일 1회씩 운항한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서 정발레티노와 함께 추자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최영장군 사당을 향하여 언덕 위로 업힐을 한다.
최영장군 사당은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데 계단 옆에 최영장군이 목호의 난을 정벌하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렀고 이를 기념하여 최영장군 사당이 지어졌음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삼별초에 의한 대몽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원종(元宗) 14년(1273년) 이후, 원은 삼별초가 점거했던 탐라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에는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해 목장을 설치하였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인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
고려사에는 목호(牧胡), 하치(哈赤), 달달목자(達達牧子), 달단목자(韃靼牧子), 탐라목자(耽羅牧子)로도 등장한다.
목호의 수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목호들은 공민왕의 즉위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펴자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이 공민왕의 명에 따라 2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이를 '목호의 난'이라고 한다.
최영장군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공민왕 때에 제주목사를 죽이는 등의 커다란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에게 전함 300여 척과 2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에 원정해서 목호들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 잠시 추자도에 대피했는데, 그때 최영이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방 사람들이 세운 이 사당에서는 매년 백중날과 음력 섣달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풍어와 풍농을 빈다.
정발렌티노가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 신양항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두 살에 유배 당한 황경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추자도의 성당은 2003년 축복식을 가진 공소 건물.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 등에 의하면 황경한이 추자도로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아들을 남겨 놓았고, 다행히 오씨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추자성당에 남쪽 마당에 있는 성모상.
1900년에 제주 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1909년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 사실을 전교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주었다.
추자성당 2층 현관에 있는 방명록과 순례확인 스템프, 황경한 묘지 순례객은 이곳에서 스템프를 찍어야 한다.
동쪽에서 바라본 성당 건물 외부 모습.
1908년 5월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한 기록이 남아있는 추자도에는 1956년부터 제주중앙 성당 관할의 공소가 시작되었다.
1988년 추자 공소는 서문 성당 관할로 이관되었고, 상추자도 항구 인근에 위치한 추자 공소 신자들은 황경한 묘소를 돌보아 왔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 600여 평을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다.
추자 공소는 매 주일 오전 공소예절을 하며, 미사는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한 달에 한 번 서문 본당 신부가 방문해 집전하고 있다.
제주교구는 추자도의 전교와 육지에서 방문해오는 신자들을 위해 새 공소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새성당 건물 옆 골목에 있는 옛공소 건물의 십자가탑.
1975년 건립된 낡은 공소 건물이 2001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그 해 7월 기공식을 갖고 건축을 시작해 2003년 6월 30일 지하 1층 · 지상 2층 규모로 완공된 새 성당의 축복식을 가졌다. 새 공소 성당은 어린이 집과 영안실을 갖추고 있고, 20여 명이 머물 수 있는 방과 식당도 마련되어 육지에서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
약간의 업힐을 따라 정발렌티노와 함께 황경한 묘를 찾아가기 위해 하추자도를 향하여 달린다.
추자대교를 건너면 좌측의 오지박길과 우측의 추자로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배멀미로 힘들어 하는 정발렌티노와 함께 추자대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추자로를 따라 경사도가 심한 업힐을 올라간다.
고갯마루에 올라 휴게소 전망대에서 바다를 내려다 본다.
반대쪽 묵리에서 고갯마루로 올라오는 공영버스가 보인다.
제주해양경찰서 추자팔출소를 지나니 신양항과 하추자도 마을이 보인다.
하추자도 마을이 꽤 커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하추자도에는 식당이나 모텔이 없다. 오직 편의점 1개만 신양항 앞에 있을 뿐 ~~
친구는 편의점에서 잠깐 휴식을 하도록 하고 나 홀로 언덕길을 올라가 신양4길에서 우회전하여 황경한묘로 올라가는 시멘트 임도를 따라간다.
모진이 해안가에 이르니 비좁은 도로의 전체폭을 꽉차지한 중장비가 가로 막고 있다. 하수처리 배수관 공사가 진행중인 것 처럼 보인다.
하는 수 없이 언덕으로 멜바, 끌바를 어렵게 해서 중장비가 있는 건너편으로 겨우 넘어가서 사진을 촬영 한다.
곧바로 오르막길이 나온다. 뒤로돌아 모진이 해변과 중장비가 있는 도로쪽이 보인다.
급경사가 지속되어 가장 낮은 기어로 변속을 해서 올르는데도 한계가 있다.
너무 급경사가 지속되어 끌바를 시작한다. 두 살짜리 아들이 엄마품을 떠나야 했던 황경한과 정난주 마리아를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인생이란 것이 도로가에 무수히 핀 들풀 보다 못한 것일지라도 ~~ 짠한 생각에 가슴이 찡하다.
끌고 달리다 보니 모정의 쉼터 정자가 보인다.
정자 앞에 최경한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새겨놓은 표석이 보인다. 그런데 이 표석을 만들 때까지 황경한의 본래의 이름도 고증이 제대로 안되었던 모양이다. 이름을 황경헌으로 명기하고 있다. 하기야 오씨 성으로 살았을테니 오건섭.오태섭의 아버지로 일생을 살다가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황경한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모정의 쉼터.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은 황경한의 묘.
지금은 천혜의 관광지로 빼어난 풍광과 온화한 날씨로 찾는 이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끼게 하는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 중죄인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으로 상 · 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1271년(고려 원종 13년)까지 후풍도(候風島)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하면서 추자도로 개칭하고 1910년 제주에 속하게 되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추석산 등산로 이정표.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가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으면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정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황경한 묘에서 바라본 모정의 쉼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하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지 뒤 좌측 언덕에 한 여행사에서 세워둔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의 슬픈 이야기를 적어 놓고 있다.
묘비 뒤쪽에도 황경한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다.
추석산 등산로 이정표 앞에서 바라본 황경한 묘. 앞쪽에 또 다른 묘가 있는데 누구 묘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경한의 자식이 아닐까 싶다.
모정의 쉼터 정자 옆에 있는 추자십경 안내판.
정난주 마리아가 갓난아기를 내려놓고 간 예초리 갯바위로 가는 길.
황경한 묘를 참배하고 예초리 쪽으로 내려가 하추자도 한 바뀌를 돌아서 신양항으로 내려오려고 계획 했으나 시계를 처다보니 12시40분이 되었다.
홀로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발렌티노를 생각하니 빨리 내려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라갔던 길로 뒤돌아서 내려온다.
묘소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내내 많은 생각과 저절로 기도를 하게 된다. "+ 주님 불쌍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두 살짜리 황경한 영혼을 위해 기도 드리오니 그들의 영면을 허락시고 하늘나라의 복락을 얻게 하소서"
중장비가 가로막고 있는 곳에서 모진이 해변의 몽돌 바닷가로 내려와 끌바를 하다가 자전거를 내려놓고 황경한묘로 올라가는 임도길 방향으로 촬영을 한다.
편의점에서 간단한 죽과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기다리니 완도로 타고 갈 레드펄호가 들어온다.
도선하는 과정과 화물 콘테이너, 자동차를 하선. 승선 하는 과정이 끝난 후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 세운 뒤에 다시 배 밖으로 나와서~
사람이 승하선 하는 계단을 이용하여 배안으로 들어가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배가 커서인지 전혀 로링이 없다.17:45에 완도항에 도착했다.
완도가 가까와져서 3층 갑판으로 올라가 석양 일몰을 촬영한다.
멀리 완도타워가 보이고 노을 빛에 미끄러지듯 달리는 쾌속선이 긴 파문을 일으키며 달린다.
하선 준비 방송을 듣고 자전거가 있는 1층으로 내려와 하선 준비를 한다.
오늘도 비록 배멀미에 힘든 정발렌티오도 주님의 은총으로 다행히 다시 기력을 회복했고 ~
여객 터미널에서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해변공원로쪽으로 달려서 근처의 모텔을 잡아 숙박을 한다.
길목에 있는 약국에 들려서 속을 편안하게 해줄 약을 구입해서 복용한다.
오늘 저녁도 완도의 가을 밤 불빛은 아름답다. 3박4일 원정 순례 마지막 날인 내일 일정을 위해 세탁 후, 탈수 해서 방안에 세탁물들을 널어놓고 깊은 잠을 청해 본다.
※ 상단 첨부 : 50차_제주여객터미널_상추자항_황경한묘_완도_20170928.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04468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