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순례 - 광희문, 명동, 서소문, 경기감영, 포도청터, 종로성당,가회동성당, 혜화동 성신교정
[070112(목) 서울 대교구 2차 #성지순례는 광희문, 명동, 김범우 집터, 서소문, 경기감영, 형조터, 의금부터, 전옥서터, 좌포도청터, 이벽 집터, 종로성당,가회동성당, 혜화동 성신교정으로 이어진다.]
8시30분 아직 간밤에 내린 눈이 덜녹은 중랑천길을 달려 옥수역에서 두 분을 도킹 금호나들목으로 진입하여 좌측 인도와 일반도로 우측 차선을 따라 ~신금호역~청구역~광희문(시구문)성지부터 찾아갔다.
오늘 2차 성지 순례 맵.
서울, 수원, 용인에서 신자들이 도성으로 끌려와 배교를 강요 당하다 참수 치명한 순교자 시신을 내다 버리던 곳, 서쪽에는 서소문, 동쪽에 있는 이곳 광희문이다.
동쪽 길 건너에 있는 임시 순교현양관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아직 성지 조성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미사시간에는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출입문 우측에 있는 스템프를 찍어야 한다.
퇴계로 좌측 인도를 따라 명동성당을 향했다. 가는 길목에 있는 남산한옥마을에 들러서 서울천년타임캡슐 광장을 구경하고 ...
이곳은 남산타워가 바로 처다보여서 사진 찍기에 아주 좋은 포토존이 여러군데 있다.
자전거로 둘러보니 빠르게 한 바뀌 돌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이고 평일이라서 사람이 적어서 ... 가능한 일이다.
명동성당입구, 경비 아저씨의 제지를 받았다. 자전거를 도로의 자전거 거치대에 두고 가란다. 큰 일 날 소리임다!!
"비싼 잔차 분실하면 아저씨가 책임지시렵니까? 자동차는 통과 시키면서 자전거는 왜 들어간다는거요. 주차장에 세울거예요."
성물방에서 성지순례 핸드북을 구매하고, 동행하신 분에게 선물도 하구 ~~사무실에 들러 스탬프도 찍는다.
동행한 정교수와 늘푸른님, 성당 마당에서 멋진 포즈로 기념 촬영을 했다.
묵상과 참배하는 분들이 여럿이 있다. 잠시 성체 조배만 하고, 너무 어두워 아쉽게 유해모신 곳은 확인도 못하고 돌아나왔다.
동쪽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님 동상
지하성당에서는 평일날도 고백성사도 할 수 있나 보다.
일행 중에 비신자도 있기에 명동성당 내부를 처음 구경을 위해 ... 잠시 들렀다.
한글, 영어, 일본어 소개 팜플릿이 있어서 성당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외환은행 본점 앞에 있는 장악원터 표지판, 여기가 실제로 김범우 집터로 추정되고 있다.
김범우의 집터.(장악원터, 중구 을지로2가 181)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었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또는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의 집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1998년 한계례 신문 기사>
순례하실 분들은 이곳도 빼먹지 말고 찾아가 보시길 권합니다.
수표교에 있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터, 이벽의 집터(종로구 청계천로 105 두레시닝(주)건물 앞) 표지를 확인하고 가야 하는데 ...
우린 그냥 건너 뛰어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갈치조림집으로 가서 배고픔 부터 해결 했다.
남대문시장은 언제 가봐도 정말 복잡하다. 그래도 자전거를 끌고 찾아가 시장 구경도 하고 특히 상인들에게 소문난 맛집에서 식사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외국인들도 이 비좁은 시장안에 있는 식당을 즐겨 찾는다.
점심 후 일행은 은행 일을 잠시 보고난 후 남대문 옆을 지나서 서소문순교성지를 찾았으나 공사중이어서 역시나 출입금지다.
멀리서 인증샷을 찍고 돌아서 적십자병원 앞에 있는 경기감영터를 향한다.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도로변에 이곳이 경기감영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의정부(議政府=현재의 국무총리실), 이조(吏曹= 지금의 내무부), 한성부(漢城府 =지금의 서울 시청), 호조(戶曹 =지금의 재정경제원)가 차례로 있었고, 서쪽에 예조(禮曹= 지금의 외무부,교육부), 병조(兵曹= 지금의 국방부), 형조(刑曹 =지금의법무부),
공조(工曹= 지금의 건설부)가 차례로 있었다.
옛 六曹 거리는 민심의 공감이 분출되는 시위의 현장이였으며, 정부에 항의하는 4.19와 6.3의 학생데모가 이곳에서 벌어졌음도 우연이 아니다.
6조 거리엔 큰 구경꺼리가 있었는데 만인산(萬人傘) 행열이었다.
시골의 현감과 군수들이 자신의 치적들을 六曹의 벼슬아치 들에게 과시 하고자 벌이는 헤프닝인 것으로 커다란 양산에 수령의 치적을 적은 베 나부랭이를 주렁주렁 매어 달고 이를 성장한(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에게 들려 말을 태운 후
<아무개 고을 마무개의 만인산 나들이요!> 하며 삼현육각을 앞세워 이 6조거리를 수십차례 왕복했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 돌간판이 있는 바로 앞 인도 바닥 아래의 위치에 한국천주교신앙증거터 표지석이 있다.
수 많은 신앙선조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었던 신앙증거 터 표지석도 만난다.
수 많은 신앙선조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었던 신앙증거 터 형조터도 여기서 만난다.
종각역 쪽으로 내려가면 의금부터가 있다. 현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의 SC제일은행 화단에 표지석이 서 있다.
종각역 6번출구 앞에 있는 전옥서,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
계속해서 옛 단성사터로 내려가면 좌포도청터를 만나게 된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포도청에서 옥사했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우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는데, 병사(病死) 또는 물고(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고의가 아닌 죽음’이란 말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장살(杖殺)에 속함)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볼 때 좌·우포도청 자리는 박해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종로성당을 향해 내려간다.
종로성당 지하에는 포도청(좌.우) 순교자 현양관이 잘 정비되어 있다.
순례 핸드북에는 아직 종로성당과 가회동성당 자료가 들어 있지 않지만 현양관에는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다.
명동주교좌성당 지도 아래에 있는 순례를 마치며 메모장 공란에다 스탬프를 찍었다.
종로성당 현양관 입구에는 순교하신 분들의 초상화를 잘 진열하고 있다.
마침 해설을 하시는 분이 계셔서 현양관을 둘러보면서 설명을 잘 들을 수 있어서 좋다.
해설을 잘 듣고 종묘 뒷골목을 거쳐 북촌에 있는 석정골 보름우물을 보고 난 후 가회동 성당으로 페달링을 서두른다.
보름우물은 주문모 신부가 세례를 줄 때 사용했던 우물이라고 한다.
가회동 성당은 첫 미사 봉헌 기념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에 의해 최초 미사 봉헌 터인 "계동 최인길의 집 터" 관할 성당이고
가회동 성당 현양관은 디지털영상관도 마련되어 있어서 보다 실감나게 순교역사를 볼 수 있어서 좋다.
김대건 신부님 성해를 만날 수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 스탬프를 찍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코스인 혜화동 가톨릭신학대 성신교정을 가기 위해 북촌로 오르막길을 따라 업힐을 하다가 삼청동우체국 앞에서 우회전하여 와룡공원길로 접어든다. 비교적 가파른 업힐이라 힘들게 성균관대학교 후문을 통과하여 대학교정을 거쳐 정문으로 빠져나가 성균관대입구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받아 성신교정 경비실에 도착하니 방문자 기록을 요구한다.
방학 때만 출입을 허용하면서 방문자 명찰을 착용토록 하고 있다.
운동장과 도서관 사잇길로 올라가 2층 대성당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감실 아래에 모셔진 김대건 신부님 성해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고 기도를 드렸다.
성당 뒷쪽 좌측벽에 있는 성당 유리화 안내판도 살펴본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일찍이 마카오 신학교 시절에 온갖 난관을 인내와 용기로서 극복하고 마침내 1845년 8월 17일 한국 교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모든 신학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신교정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 놓은 거룩한 곳,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신학생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사제 성소 증가에 힘껏 노력하도록 은총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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