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차 왕림성당, 남양성모성지, 요당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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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차 왕림성당, 남양성모성지, 요당리성지

20170429일(토) 이번 제18차 순례는 나 홀로 06시에 1호선 도봉역을 출발 병점역에서부터 왕림성당, 남양성지, 요당리 성지를 둘러보고 송탄역에서 복귀하는 비교적 빡센 거리의 순례길이다.

병점역 2번출구로 나와 첫번째로 찾아간 곳은 당초 계획에는 없었던 용주사,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 22대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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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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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는 두번째 순례인데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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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에 기왕 온김에 가까이 있는 불꽃 같은 열정과 효행의 본보기 대왕, 정조대왕 아버지 사도세자와 본인의 릉이 있는 융건릉(隆健陵)으로 페달을 돌린다.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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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에 들어가 보니 >정조가 얼마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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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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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에는 잘 가꾸어진 산림 수종이 많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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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융릉 근처에는 아름다운 미송들이 쭉쭉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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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주변에는 보기드물게 참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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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륭을 찾아가니 소풍나온 학생들과 탐방객들이 많다. 단체로 방문하면 문화 해설사가 배속되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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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는 1,000원이며, 융릉에서 다시 건릉으로 걸어서 돌아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40여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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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와 융건릉을 돌아보고 나오니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였지만 다시 망설여진다. 근처에 있는 보통리 저수지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결정한다.

젊은시절 직장 생활을 할 때에 MT를 자주 갔던 곳이라 추억이 떠올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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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리 저수지 둘레길은 이제 테크길과 임도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도보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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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경관도 아름답다.

저수지 둘레길을 한 바퀴돌고 굴다리로 빠져나와 봉영로를 따라 언덕길을 내려가니 왕림교차로가 나온다. 신호를 받아 바로 직진하면 수원가톨릭대학교 정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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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최근 새로 축성식을 마친 교문, 디자인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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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양성의 못자리, 수원가톨릭대학교가 올해로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수위 아저씨의 제동으로 교정은 들어가보지 못하고 뒤돌아서 바로 옆골목 안쪽에위치한 왕림성당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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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좌측에 아담하게 가꾸어진 성모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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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죽과 적단풍이 예쁜 성당내로 들어가 잠시 기도를 올린다.

"오늘도 순례길에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안전한 라이딩을 하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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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에 비치된 "왕림"이라 새겨진 스탬프를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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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된 갓등이 공소로 시작된 왕림(旺林) 성당은 상징은 ‘갓등이’, 즉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사제를 의미하는 박해시대 왕림 교우들이 사용하던 은어였다. 갓등이 지방의 복음 전파 시기와 교우촌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39년 앵베르 주교의 일기에 ‘갓등이 공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8년 7월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 본당에 이어 한국 교회의 세 번째 본당이자 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으로 수원교구의 뿌리가 된 왕림 본당은 조선시대 선교사들이 충청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으로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다.

1889년 앙드레 신부가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 성당을 지었고, 1890년 알릭스 신부는 본당 주보를 ‘예수 성심’으로 명명하고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한문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습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학교와 성당이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63년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본당이 수원교구로 편입되었고, 1985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 성당 및 사제관과 수녀원을 기공하여 1988년 11월 1일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 및 성당 봉헌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왕림 성당 일대에는 수원 가톨릭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수도회가 밀집해 있고, 성당 옆 갓등이 박물관에는 초기교회 전례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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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등이를 뒤로 하고 다시 유혹이 인다.

오늘은 혼자라서 인지 더욱 자유로운 심리 때문일까? 

좀 돌아가기는 하지만 남양성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홍난파 생가를 둘러보기로 한다.

기천저수지를 지났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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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업공업단지에서 좌회전하여 화성팔탄1공장 앞 창곡리에서 김치찌게로 점심을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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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팔탄3공단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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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낚시터로 진입하여 한적한 자안천 뚝방길을 따라 파릇한 봄날의 자연을 호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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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어느 곳이나 제방뚝길은 자전거 순례자에게는 늘 편안하고 행복감을 안겨준다.  참 고마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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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교를 건너 현대기아차 연구소 정문 앞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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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뚝길로 진입하여 효원납골공원묘 앞을 지나니 전형적인 아름다운 시골 마을길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바로 홍난파선생이 나고 자란 활초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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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폐가가 이곳 저곳에 보이지만 꽃과 초목들은 여전히 우리 마음을 초봄으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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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일이 시작되어 일손들이 점점 바빠지는 밭에서 일을 하는 아저씨에게 홍난파선생 생가가 어디냐고 물었다.

"저 언덕위 마을회관 맞은 편에 있는 방앗간에서 골목길로 들어가세요 ~~"  말이 끝나기 전에 비닐 하우스 안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꼭대기로 올라가지 말고 방앗간을 끼고 쭉 가라고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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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왔던 길의 마을 회관 앞에서부터 내리막 길이라서 미처 "난파길"이란 도로 표지판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운했기에...

다시 300여미터를 업힐을 하여 우측 방앗간 건물을 끼고 우측 청파로로 진입하여 골목을 돌아서니 멀리 초가집이 나타난다.

바로 저기가 난파선생이 출생한 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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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성이에서 잠시 멈춰 생가를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본다. 저절로 고향의 봄 노랫말이 흥얼거리는 풍광이다.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동요. 1927~1929년경 일제강점기 때에 만들어졌다.
일제 식민 시절 한일 합병 이전의 조선을 그리워하며 조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지식인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곡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 1925년에 이원수샘이 자기 고향을 그리며 쓴 것을 소파 방정환샘이 1907년에 창간한 잡지 어린이 35호 1926년 발행판에 시 문학 문예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실린 것을 보고 맨 처음 산토끼를 작사/작곡 한 이일래가 작곡하였지만, 마산 지역에서만 불리다가 난파가 발견하고 다시 작곡을 하여 대중들이 즐겨 부르게 되었다.
그후 1999년에 이를 기리기 위한 고향의 봄 창작동요제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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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낡고 오래된 집이지만 둘러본다.

10여년 전에 당시 정권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된 바 있는 작곡가 홍난파(洪蘭坡.1897∼1941)를 기념하는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을 강행키로 해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 어디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어거지로 친일 활동에 가담한 사람이 난파 뿐이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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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 일제잔재 청산 등을 위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金希宣)은 지난 2002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확정, 발표하면서 홍난파가 친일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의 상무이사를 역임하고 친일가요 '정의의 개가'를 작곡했다며 명단에 포함했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도 친일자들의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도 어쩌랴 싶다. 매년 몇 번씩 서울의 인왕산 자전거 코스에서 자주 만난게 되는 홍파동에 있는 홍난파 가옥은 한국 근대문화유산인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 되어 있고, 가옥 앞에는 난파동상도 있다. 더구나 이곳은 서울시교육감 지정한 평생학습협력기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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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초리에서 내려와 남양성모성지로 가는 길목에서 우측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만 좌측길로 접어들어 4km넘는 거리를 알바를 하고서야 다시 언덕 길을 올라서 두번째 성지 남양성지 주차장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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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성지가 계속 개발중에 있지만 박지환(요한) 신부님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지로 발굴 하면서부터 가족들과 단체들이 함께 찾아 아름답게 초대 교회 교우촌이자 처형지의 20단 묵주기도 길을 따라 신심을 키울 수 있는 곳이며,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바닷길이 열렸듯이 매일 썰물 때면 육지까지 바다가 열려 길이 생기는 제부도의 신비스런 광경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있었고,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는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 양지 골배마실 · 안성 미리내 · 진천 배티 · 아산 갈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 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문을 통과하면 예전 로사리오 동산 자리에 조성된 대형 잔디 광장이 나오고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단이 멀리 보인다. 

광장 양 옆으로는 보행로와 쉼터 및 식당 등 부속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야외 제단 옆을 지나면 제일 먼저 두 팔을 들어 순례자들을 축복하며 환영하는 강복 그리스도상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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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복 그리스도상을 지나가면 눈에 확 들어오는 '묵주기도 길'은 남양 성모 성지의 자랑이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다. 빛의 신비를 포함해 총 20단의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어 있고, 그 길을 하늘에서 보면 블라디미르(자비)의 성모 이콘 모습과 흡사해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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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길 왼편 잔디밭에 있는 남양 성모 마리아상(높이 3.5m)은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마리아상과는 크게 다르다. 남양성모성지를 대표하는 이 성모상은 ‘우리 엄마’와 같은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조각가 오상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씨 작품으로, 어린 예수가 엄마 마리아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친근한 형상이다.

성모 마리아께 매달려 있는 아기 예수가 순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며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너도 너의 모든 어려움과 슬픔, 근심과 걱정을 말씀드리며 엄마에게 매달려라.” 그래서일까. 아기 예수님처럼 성모께 다가가 만지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신자들 모습이 하나도 이상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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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이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1991년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며 수원교구 설정 기념일이기도 한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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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경당 위 야산 정상에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을 새로 조성해 봉헌하였다. 

이 날도 포크레인이 공사중이라 올라가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 동산은 성서에 따른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산 정상에 넓은 잔디 광장과 함께 조성되었고, 동산 가운데 하느님 자비의 상을 세우고 그 한 편에 피에타 성모상을 그리고 동산 둘레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구하는 5단 묵주기도 길을 조성하였다. 동산 아래에는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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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성지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한 곳을 의미한다.  

현재 전 세계에 1천 8백 여곳이 있는데 그중 성모가 발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에 적게는 한 곳에서 많게는 여섯 곳 정도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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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십자가의 길은 예수와 성모가 겪은 수난과 고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바닥에 돌을 깔아 맨발로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각 처마다 아들 예수의 고통을 느끼는 성모의 마음을 1인칭으로 표현한 묵상글을 담았다.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에서 경당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과달루페 성모상.낙태 아기들 무덤은 낙태에 대해 속죄하며 보속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이곳에는 생명수호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꾸몄으며, 생명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상을 모셨다. 낙태를 부추기는 사탄과 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묵주기도의 터전에서 생명수호를 위한 기도를 바치는 것처럼 의미 있는 일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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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지에 계시는 이상각 신부님은 몇 년 전에 본당 교우들이 성지순례로 처음 찾았을 때 에리사벳과 함께 내가 3사관학교 충성당에서 온가족이 1982년에 영세를 받을 때 군종사병으로 박도식 신부님과 윤민구 신부님을 도왔던 신학생이어서 더욱 반가운 성지이다. 그 때 성지개발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오늘 다시와서 보니 상전벽해 처럼 변하하고 있다. 


‘남양성모성지=이상각 신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난 20여 년간 성지개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이가 이 신부다.

“단체로 어쩌다 한 번 다녀가고 마는 그런 성지가 아니라 한 번 와본 이는 꼭 다시 찾는 영혼의 쉼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성모님 품에 안겨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성지’가 바로 남양 성모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신부는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께 매달릴 때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다”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남양 성모 성지를 찾아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혼의 양식을 얻어갈 것을 권했다. 묵주기도만으로 부족한 이는 성지 한 켠에 마련된 성체조배실을 찾아 침묵 중에 하느님을 만나도 좋을 듯하다.

남양 성모 성지는 매일(월요일은 사무실에 확인) 오전 11시에 미사를 봉헌하며,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오후 3시 30분 특별고해소를 운영한다. 

사무실에 들러 순례확인 도장을 찍고 주차장을 나와서 좌회전하여 100m 쯤 거리에서 좌회전, 조그만 교량을 건너 한가울길을 따라 업힐길로 마을로 접어든다. 제발뚝길을 따라 내려가다 쌍송교에서 좌회전하니 신남로 ... 차량 통행이 없는 길로 경로를 설정하다 보니 거리는 약간 늘어나지만 차도에서 흔히 발생 할 수 있는 펑크 위험이나 스트레스가 없어서 너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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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저수지를 지나 서해로 39번도로로 진입하여 누런휴게소 건너편에서 신호를 받아 건널목을 건너 이온음료로 목을 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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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옆골목 고렴길을 따라 가면 오늘 마지막 순례지 요당리성지 서북쪽 주차장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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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에 핀 철쭉과 그 위 담벼락에 심어진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아름다운 길을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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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통제 레일가드가 잠겨져 있다. 다시 동쪽 문으로 빠르게 내려갔는데 역시 출입문은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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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이 다시 북쪽 주차장으로 뒤돌아 와서 대형 표지석 옆에 자전거를 파킹하고 기둥 사이의 좁은 틈을 이용하여 주차장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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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방과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장주기(요셉) 성인 신앙의 요람터다. 

200년 넘게 우리들 기억에서 잊혔던 곳, 하지만 이곳만큼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얼과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도 드물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 성지는 장주기(요셉, 1803-1866년) 성인이 태어나 신앙 기반을 다지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 장씨 집성촌으로써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장 토마스(1815-1866년, 장주기 성인의 6촌)를 비롯해 장씨 일가의 터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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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도가 일목요연 하다. 미사는 평일 주일 11시이다.

성 장주기 요셉 회장 영정.장주기 요셉 성인은 이곳에서 성장하며 세례를 받고(1826년) 가족과 일가친척에 복음을 전했다. 

박해를 피해 배론 성지(원주교구)로 이주(1843년)한 후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이후 병인박해(1866년)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1866년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 현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황석두 루카 회장 등과 함께 참수 치명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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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흥원여(가롤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또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년)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지낸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년) 성인이 신앙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체포되어 순교한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이를 도운 손경서(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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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마침 철쭉계절이라 성지는 온통 철쭉 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주차장에서 성지 정원으로 올라서니 이곳이 기도의 광장이다.
선조들의 숨결과 얼과 박해의 피로 이룩한 요당리의 철쭉이 마치 순교한 선조들의 피 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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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광장 한 가운데에는 성모자상이 보이는데 어딘지 낯이 많이 익다 싶더니 남양 성모성지의 성모상과 같은 것이다.
요당리 성지 개발 초기에 남양 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왼쪽으로는 묵주기도 길(로사리오 길)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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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한 ‘십자가의 길 14처’로, 조각가 이숙자(체칠리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가 만든 작품. 

많은 기도와 묵상 끝에 나온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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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십자가 아래로 요당리와 관련된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물론 시신이 안장돼 있지 않은 의묘(擬墓)이지만 성지에서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순교선조들을 현양하고 있다. 

성인과 순교자 묘역을 참배한 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잔디밭 너머로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8년 3월에 착공해 1년 3개월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4일 입당미사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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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옛 지명 : 양간공소)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바닷물이 유입돼 뱃길이 열렸던 당시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며,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이라고 전해진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 흔한 십자가나 성모상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천막 성전과 컨테이너 사무실, 화장실이 전부이던 성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요당리 성지 초대 전담 김대영 신부는 2006년 12월 24일 이곳에 천막을 세우고 첫 미사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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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소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역시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아, 서울 중림동 본당)씨가 1998년 2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 성당의 불에 탄 목재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불에 타다 남은 목재에서 아름다운 성물을 조각해 낸 것은 모진 박해를 겪고도 굳은 신앙의 싹을 피워낸 선조들의 숨결과 닮았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에 성지미사가 봉헌된다. 

단체 순례객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별도의 미사봉헌과 하루 피정(묘역 참배, 미사, 유해 친구, 영성 강의, 성시간)도 가능하다. 

사무실에 미리 요청하면 식사(한식 뷔페)도 주문해 준다.

2014년 5월 6일에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대성당 앞에 장주기 요셉 성인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저녁 노을 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요당리 성지를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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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처 기도의 길을 따라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송탄역을 향하여 달리는 페달질은 더욱 가볍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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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할 송탄역으로 서둘러 달리는 길목에 황구지교에서 진위천에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다보니 뚝방 건너편에 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는 두 사람이 보인다. 250년 전에 이 길을 선조 신앙인들은 걸어서 땟목이나 배로 건너 전교활동을 했으리라. 송탄역에서 순대국으로 만찬을 하고 1호선전철을 타고 복귀하니 23시가 다 되었다.

 

※ 상단 첨부 : 18차_왕림_남양_요당리_Merged.gpx

※ 경로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91462?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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