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차 순례-연풍성지, 진안리성지, 마원성지, 여우목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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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차 순례-연풍성지, 진안리성지, 마원성지, 여우목 성지

20170518(목) 수락산역에서 05:53 첫차를 타고 건입입구역에서 환승 두 정거장을 가면 강변역, 동서울터미널에서 미리 예매한 괴산행 06:50 첫차에 오르기 전에 기사들이 아침을 먹는 대합실 내의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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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코스는 청주교구 연풍성지와 안동교구의 진안리 성지, 마원성지,여우목성지 4곳이다. 근처에 한실, 건학 등 두 개가 더 있지만 당일에 자전거로 돌아보기에는 너무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거리가 멀어서 제외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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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연풍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교통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2시간만에 괴산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09:00에 연풍을 향하여 페달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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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낯선 곳에 가서 처음 동서남북 방향을 찾아 들머리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장 쉽게 의존하는 것이 GPS앱을 이용하여 미리 그려 놓은 로그 파일의 따라가기 기능을 이용하여 시작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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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오늘 코스는 오천 자전거길을 종주할 때에 한번 지나갔던 길이기 때문에 터미널 앞 큰 길로 나가서 괴강로를 따라가다 GS동부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하여 500m에서 교량을 건너자마자 좌회전을 하면 오천 자전거길로 진입하여 연풍쪽으로 달리게 된다.

몇 군데에 도로 보수 공사중이어서 약간의 우회를 해서 괴강삼거리로 건너가는 교량 위에서 만남의 광장 쪽을 처다보며 사진을 한 컷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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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괴강인증센터 부스를 만났다. 부지런한 한 친구를 인증센터에서 만났는데 반대 반향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왠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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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라이딩을 비는 인사를 하고 싱그러운 아침공기와 신록에 반짝이는 햇살을 즐기면서 ... 연풍성지 까지 26km를 달려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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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화령 새재를 넘어야 하고 여우재을 올라가야 하기에 업힐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 시간 저축을 위해 빠르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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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길은 언제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감사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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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돌아가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고 안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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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칠성면에서 연풍면으로 들어서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건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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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해놓은 들판을 처다보며 멀리 약희봉과 구왕봉 능선을 처다보니 아름다운 산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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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로에 들어서자 우회전하여 행촌교쪽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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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교 좌측에 연풍성지 간판 화살표를 따라 내려가다 아름다운 기와담장길로 따고가니 주차장이 나온다. 단체로 순례를 온 관광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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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버지의 작두날을 이겨 낸 황석두 루까 성인의 고향이자 안식처 연풍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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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정문에 들어서니 무서운 작두날은 간곳이 없고, 한 눈에 아름다운 성지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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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에 봉헌된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과 정원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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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측으로 소성당이 있다. 해발 1,017m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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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과 소성당 사이에 모셔진 성모님이 반겨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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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성당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린다. "오늘 순례길도 동행하여 주시고 황석두 루까 성인의 천상 영면을 빕니다. 기쁜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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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당에서 나오니 대성당 유리창에 스테인그라스 성화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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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며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지만 산이 높은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선인들이 새재로 불린 험한 길을 처음 내고 넘나들면서부터 고갯길 굽이굽이 서린 슬픈 내력들에 구름인들 차마 어찌 그냥 넘어설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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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과 우측의 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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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 루카는 신앙에 눈뜬 뒤 줄곧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고(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위앵 민(閔) 신부, 오메트르 오(吳) 신부,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 등과 함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 해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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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내부 모습, 버스로 온 단체 순례자들이 11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성당현관 좌측에 사무실이 있고 맞은편에 순례 확인 스템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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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의 스테인글라스 성화들이 유난히 아름다운 성전이다.

 

성당을 나와 앞마당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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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 쪽 치명터에 설치된 성 황석두 루카상.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1790년대 후반, 교우들이 새재를 넘나들 무렵부터 한두 명의 교우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교우촌을 일구고 포졸들에게 쫓기는 교우들을 받아들여다. 또 훗날 최양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경상도의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으며, 그것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으레 성벽 아래의 수구문(水口門)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문경 새재와 연풍은 복음의 연결 통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새재를 넘나들었고, 그 아래의 연풍 주막에 묵으면서 신자들을 색출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1866년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칼래 신부는 연풍 주막을 지나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웃지 못 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3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래 강(姜)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제가 연풍 주막 앞을 막 지나치려고 할 때 포졸들이 의심을 품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서 뒤따라와 이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토마스가 심하게 시비를 걸자 포졸들이 모두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서 저의 전대가 떨어져 돈이 튀어나오자 포졸들은 저를 잊어버리고 돈을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칼래 신부의 1866년 6월 10일자 서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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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터 야외제대 / 대형십자가와 성모상(좌) 도요한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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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터 야외제대 옆에 설치된 순교현양비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며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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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내 표지석도 형구 아래에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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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맞은편 소나무 둘레길에는 14처상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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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향청 앞에 있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상과 반석.  

 

왼쪽부터 황사영, 오메트르, 다블뤼, 위앵, 장주기 성인 순이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天險)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1, 2, 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로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과로로 지친 상태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1861년 6월 15일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옮겨져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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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 성지 조성과 관련하여 고 오기선 요셉(吳基先, 1907-1990년) 신부의 공로와 미국 부모로부터 사재를 가져다가 형방 건물과 성지 부지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 성지의 주추를 놓고 30년간의 수안보 성당 주임에 이어 1992년 성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여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친 메리놀회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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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1963년 매입한 옛 향청 건물.  

 

매입 후 주변을 정리하면서 이곳이 순교터임을 알게 되었다.

매년 3만여 명의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다섯 성인상과 반석(오성바위)을 재현하여 1986년 축복식을 가졌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m의 대형 십자가는 순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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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청 공소 앞에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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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황석두 루카 묘.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밝혀지면서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었고, 1979년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임시로 수안보 성당에 모셨다가 1982년 이곳으로 천묘하였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모진 반대를 받았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2년 이상을 벙어리처럼 산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도록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위앵 민(閔) 신부, 오메트르 오(吳) 신부,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 등과 함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 해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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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터(사형장)에 설치된 세 번째 형구돌. 

 

연풍에서 총 세 개의 형구돌이 발견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절두산 성지에 기증되었고, 두 번째 것은 황석두 성인 묘소 앞에 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되었다. 그중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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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

([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물처럼 흐르는 그의 호교론에 관장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고,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결국 그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으며, 임금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포졸들은 선교사와 장주기와 함께 그를 옥에서 끌어내 닷새가 걸려서야 보령의 갈매못 형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그곳 백사장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당시 황석두의 나이는 54세였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에서 황석두의 시신은 가장 먼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68년에 황석두가 복자품에 오르면서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는 마침내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성지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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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에 나타난 황루까 성인 말씀을 음미하면서 성지내 현수막에 쓰인 대군대부, "만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되뇌이면서 연풍성지 후문으로 나와 이화령을 향해 기쁨과 숙연함을 안고 페달링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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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을 빠져나오니 행촌삼거리에 있는 오천자전거길 인증부스가 보인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수안보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새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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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길 이화령 정상으로 가는 중턱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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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직 아카시꽃이 한창이다. 이 향기는 주님의 선물인가! 순교 성인들의 향기인가! 

자전거로 세 번째 넘는 이화령~ 새재!
5년 전 싸이클로 앞 사람을 쫓아가느라 힘들었고, 두 번째는 추월하려는 아가씨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패니어에 짐 잔뜩 싣고 기를 쓰며 올랐던 추억이 생각나는데, 오늘 짚신을 신고 이 길을 넘나들었던 순교 성인들과 동행하다 보니 왠지 언덕길로 느껴진다. 나이 들어 체력은 더 나빠졌을텐데 ... 하노이 북쪽 2,700m 마피랭 협곡을 다녀와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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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힘들지 않게 정상에 도착하여 차량으로 올라온 다른 분에게 부탁하여 기념으로 사진을 ...

가져온 빵으로 간식을 한 후에 신나는 내리막을 속도의 완급 조절하면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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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 영남대로다. 예로부터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다.

소백산맥 자락의 문경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6m), 조령산(1017m), 백화산(1063m), 대미산(1115m) 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이다. 이 산들 사이의 조령(642m), 이화령(548m), 하늘재(525m)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 숱한 전설과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서울로 과거(科擧)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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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달리다 보니 길 우측에 진안리성지 표지석이 보인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陳安里)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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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을 알리는 안내판.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순교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와 순교 복자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15세 때 모방(Manbant, 羅, 1803-1839년) 신부에 의해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1820?∼1837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1837년 11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부제 때인 1846년에는 한국의 첫 사제이자 동료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후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 서가회(徐家匯) 성당에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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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에 조성된 진안리 성지의 야외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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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 옆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 언양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에서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 해 12월 변문을 떠나 어렵게 조선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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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안내판 옆에 순례확인 스탬프 함이 별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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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의 남쪽 방향에서 본 성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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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Berneux, 張, 1814-1866년)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15일에 문경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최양업 신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Pourthie, 申, 1830-1866년) 신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임종을 지키며 병자성사를 주었다. 선종 후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푸르티에 신부에 의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제천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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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둘레의 14처상을 둘러보고 문경 시내로 들어가서 마원성지로 다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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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성지는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는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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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게시판이 보이고 그곳에 순례 확인 스탬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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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언덕위에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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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도의 언덕위로 올라가니 성지 표지판이 좌측 방향을 가르킨다.
조선 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었던 터라 ‘마포원’, ‘마원’ 또는 ‘마판’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동면 우어리 일부를 병합해 ‘마원리’(馬院里)라 하고 문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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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에 도착하자 언덕위에 성지가 나타난다.
문경읍 마원 1리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빼앗긴 박상근 마티아 등 40여 명 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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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 박상근 마티아 묘 전경, 묘 아래 야외제대가, 위로 예수 부활상과 순교복자 박상근 마티아와 칼래 신부의 우정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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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구사목위원들이 1996년에 세운 두 개의 비가 보인다.
성지 개발 배경과 동상 건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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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상 도안에 대한 설명이다. 칼레신부와 박상근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참된 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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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1985년 9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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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쓰면서도 칼래 신부를 지키고자 했던 순교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 아래의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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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상과 순교복자 박상근 마티아(우)와 칼래 신부(좌)의 우정상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의 일이다.
서슬 퍼런 탄압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 닥치게 되었고, 이때 마을의 교우 40여 명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1837-1867년)의 묘가 이곳에 남아 있어 생생한 신앙의 숨결을 되새기게 해준다.
문경 토박이로 아전(하급 관리)이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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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상 뒤에서 내려다본 성지와 주변 풍경.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白華山, 1063m)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신자 집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래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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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래 신부의 기록(1867년 2월 13일자 서한)에 있듯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상근 마티아는 3월 중순경 좁쌀을 사기 위해 매형과 함께 한실(현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 갔다. 그곳에는 칼래 신부가 숨어 있었는데, 교우들은 한실보다는 문경 읍내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박 마티아와 매형은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그러나 이내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다. 
둘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생하면서 험한 산길을 걸었고,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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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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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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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아름답고 우정어린 순교를 생각하면서 문경 시내로 다시 되돌아온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길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 고기집이라 선택폭이 별로 없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삽결살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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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옥돌삼겹살, 그런데 왜이리 양이 많은지, 자그만치 600g이나 되고 벽에 붙은 가격표는 2만원이나 된다.

다 먹지를 못해서 결국 남은 고기는 은박지에 싸서 집까지 가져와야 했다. 계산서를 보니 추가로 공기밥과 상차림 값, 음료 값으로 3만원이나 된다.
항상 낯선 지역에서 식사 장소와 메뉴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는 점심이었다. 그래도 고기 맛은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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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14시30분!
또 다시 오르막 여우목성지로 출발한다. 가는 길목에 문경성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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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급해서 성당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찍고 서둘러 여우목로를 따라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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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에 들도 넓고 경관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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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을 지나 중평리 마을앞에 이르니 4%가 넘는 오르막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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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면서 목을 축이는데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눈을 반짝이면서 기쁘게 순례길을 반겨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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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번 지방도로를 타고 힙겹게 오르니 드디어 여우목성지 안내판이 보인다.
지도상에 표시된 지명 보다는 실제로 미처 못가서 좌측으로 또다른 오르막 길이 있어 올라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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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좌측 숲길로 들어가라는 표지석이 있다. 따라내려 가다보니 돌탱이 임도이고 오락막 내리막이 200m를 들어가게 된다.
순례를 마치고 나오는 한 부부를 만나 인사를 하니 미소로 맞아준다. 축복 받는 순례길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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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에 순례확인 스탬프 함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가정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으며 산지를 개간해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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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석 돌제대와 강론대가 있고 맞은편 산 언덕에 예수님상, 그 우측에는 성모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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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뒤편에 건립된 대형 십자가

 

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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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보 요셉(왼쪽)과 그의 장남인 순교자 서인순 시몬의 묘. 

 

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치보는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 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 뒷산)에 묻혀있던 서치보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묘소를 마련하여 병인박해 때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장남 서인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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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인 서인순 시몬(徐隣淳, 1808-1868년)과 서익순 요한(徐翼淳, ?-1868년),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는 병인박해 때 모두 순교하였다.
 

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

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4남인 서익순은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남인 서태순은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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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 맞은편에 묘역과 대형 십자가, 성모상이 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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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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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한 바뀌 돌아서 내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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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아래 큰 돌판과 주위에 놓여진 돌들이 그 옛날 이곳 선조 신앙인들의 야외 미사 제대처럼 느껴져 애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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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경 돌아오는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올라갈 때 들리지 못했던 표지판 앞에서 멈춘다. 바로 중평리 돌표지석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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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홍베로카 치명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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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80여세의 할머니였던 홍베로니카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교우촌의 이윤일 공소회장과 30여명이 체포되어 문경현으로 끌려가다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자 안 믿는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풀어주겠다는 포졸의 권유에 "믿고 있는데 왜 안믿는다고 하는냐, 그럴 수는 없다." 그러자 포졸이 죽고 없는 것을 왜 믿는냐고 핀잔을 주자 "살아있는 천주님을 왜 죽었다고 하느냐?"며 항의 하자 화가난 포졸이 패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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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베로카 할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갈평삼거리에서 내려다 본 댐 상류 주변 경관을 찍고, 다시 하는 페달링은 가볍고 아름다운 산천은 오늘 순례길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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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버스터미널로 달리는 주변의 청보리 밭도 신록의 산야도 당시의 순교 성인과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심 만큼 푸르고 아름답다.

오늘도 나홀로 순례길을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문경터미널에서 예상 보다 훨씬 빠른 17시에 동서울행 버스에 올라 23차 순례길을 마무리 한다. 다만 한실과 건학 마을 성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진안리, 마원, 여우목 성지를 비롯 주변의 성지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신 관련자 분들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린다.

 

 

※ 상단 첨부 : 23차_연풍_진안_마원_여우목_170518.gpx

  

※ 경로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8496?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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