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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차 순례#1 - 왜관 가실성당, 칠곡 신나무골, 팔공산 한티순교성지

20170719(수) 37차 순례는 서울역 06:40~왜관역10:06 도착하여 가실성당, 칠곡 신나무골, 팔공산 한티 순교성지, 계산주교좌대성당, 관덕정,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 복자성당~동대구역에서 마무리하는 폭염 36도C 속의 힘든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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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순례#1의 대표 사진은 팔공산 한티성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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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체 코스맵 상단 첨부파일 A인데 여부재 임도에서 동명으로 넘어가는 경로이다.

그러나 폭염과 더불어 통상 임도는 업힐을 어렵게 하면 다운에서 보상이 있기 마련인데 여부재 임도는 로면 상태가 불량하여 자전거 다운에서 전혀 보상이 없기 때문에 이 경로를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도보로 순례를 하는 분들은 단축코스이기 때문에 이 코스로 가야 하고 여부재 정상에 정자 옆에는 대구교구에서 만든 한티로 가는 45km 성지도보순례 스탬프 함이 비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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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로가 첨부 코스맵 파일 B인데 수정된 코스맵으로 약 600m의 등산로 끌바가 있고, 여부재 보다는 우회하는 길이 있지만 자전거 코스로는 더 빠른 시간에 한티로 접근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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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무궁화호 출발 시간이 06:40이어서 06:18에 역에 도착하여 출발 전에 설렁탕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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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이식 자전거를 무궁화호 객실과 객실 사이의 통로 화물보관함에 접어서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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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역에 도착하여 출구로 나가 좌회전하여 성지는 아니지만 경로에서 한 블럭 좌측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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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구로 들어가니 왜관 베네딕도회 구 성당 건물이 보인다.
 

베네딕도회(Ordo Santi Benedicti)란 가톨릭 교회 내의 수도승 수도회들(Ordines monastici)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이태리 누르시아(Nursia) 출신 성 베네딕도(St. Benedictus, 480-547경)가 저술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 이하 RB)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聯合, Confederatio)을 일컫는다. 과거에는 분도회(芬道會)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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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건립된 성당 건물의 외부 모습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의 '대화집' 제2권에 따르면, 베네딕도 성인은 480년경 이탈리아 누르치아(Norcia)의 한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학업을 위해 유모와 함께 로마로 유학갔던 베네딕도 성인은 환락과 퇴폐가 만연했던 로마생활에 염증을 느껴 곧 로마를 떠난다.

 그는 로마에서 멀지 않은 엔피테(Enfide)라는 작은 산골 마을로 간다. 

거기서 기적을 행한 후 사람들을 피해 더욱 고독한 삶을 살려고 수비아코(Subiaco) 계곡의 천연 동굴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에 은거하여 철저한 고독 속에 3년간 은수생활을 하게 되고, 거기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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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인근의 비코바로(Vicovaro)라는 수도 공동체의 원장이 되어 수도생활의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자 수도승들의 반대에 부딪혀 다시 수비아코 계곡으로 돌아와 각각 12명으로 구성된 12개의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설립한다.

그 후 인근 본당신부의 시기심으로 인해 또 한 번 곤경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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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반대와 불행을 극복한 베네딕도 성인은 수비아코를 떠나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카시노 산)로 간다.
이 산 위에 수도원을 세워 본격적으로 공동체를 지도한다. 여기서 생애 말기에 몬테카시노 수도 공동체를 위해 규칙서를 하나 저술한다.
이것이 바로 '베네딕도 규칙'(Regular Benedicti)이다. 이 규칙은 이후 서방 수도승 생활의 초석이 되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547년경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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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는 자치수도원(Monasterium)들의 연합 형태인 21개의 연합회들(Congregationes)과 어떤 연합회에도 속하지 않은(Extra Congregationes) 5개의 자치수도원들과 2개의 예속수도원(Prioratus simplex)들로 이루어져 있고 약 9,000명정도의 수도자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베네딕도회 총연합을 대표하는 분은 수석 아빠스(Abbas Primas)이며, 각 연합회마다 연합회 총재 혹은 총아빠스(Archiabbas)가 있다. 
그리고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 대수도원)이건 원장좌 자치수도원(Prioratus conventualis)이건 각 자치 수도원들을 대표하는 아빠스들과 원장들이 있다. 그리고 베네딕도회 총연합 안에 전 세계 베네딕도회원들의 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해 1888년에 설립된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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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ti)와 같이 보통 베네딕도회 다음에 연합회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전 세계에 산재(散在)해 있는 베네딕도회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아래와 같이 도표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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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도회 총연합(Confederatio)]

왜관수도원은 설립일은 1952년 7월 6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으로 와 있던 북한 덕원수도원과 만주 연길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왜관에 모여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수도원이 발족되었다. 1953년 대구교구장으로부터 3개 군(郡)의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었고, 1955년 수도원 건물이 세워지며 수도원 인원이 크게 증가하고 본당수도 증가 되었다. 

1956년 1월 9일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되었으며, 같은 해에 또 다른 3개 군(郡)에서의 사목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중학교와 순심고등학교를 인수하고, 1960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여 기도서·전례서 등의 서적을 출판하였으며 철공소와 목공소, 농장 등을 경영하여 수도원의 자급자족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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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뒤로 하고 도심을 빠져나와 낙동강 자전거 도로를 진입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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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로에서 가실성당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곳에서 강변대로로 진입하니 낙산교차로가 있다. 신호등을 따라 도로를 건너 가실성당으로 우회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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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전하여 조금 내려가니 도로변 좌측에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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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에서 바라본 투르뇌 신부가 1920년대 초 건립한 벽돌조 가실 성당 전경.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로 200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순교자의 집터 위에 세워진 경상북도 선교의 요람이다. 가실(佳室) 본당은 경북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대구대교구 소속이며 설립일은 1895년이다. 초창기의 이름은 가실 본당으로 후에 행정구역명을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가실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주보는 성녀 안나이다.

 

박해가 끝난 뒤 경상도 지방의 전담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에 거주하다가 1887년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로 이주한 뒤, 신나무골에는 그의 보좌인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한때 거처하다가 각각 전주와 부산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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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 우측에 한티가는 길 스탬프 함이 별도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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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 1894년에 입국한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가밀로 신부는 그 해 6월 신나무골에 와서 머물며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하였으며, 9월경 가실(佳室, 왜관읍 낙산동 蘆湖)로 이주, 김회두(金會斗, 베드로) 소유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성당으로 삼고 전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파이야스 신부가 담당한 전교 지역은 칠곡을 비롯하여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안의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지였으며, 공소는 17개소. 신자수는 777명이었다. 파이야스 신부는 이후 1898년 6월까지 이곳에서 전교하다가 황해도 장연의 두섭[道習] 본당으로 전임되고, 제2대 본당 주임으로 김성학(金聖學) 알릭스 신부가 부임, 3년 간 전교 활동을 하다가 1901년 김천 본당을 분리 설립하면서 그곳으로 이임하였다.

 

가실 성당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략을 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병원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훼손되지 않아 옛 유물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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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정면 마당에는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봉헌한 ‘순교자 성순교가문의 신앙유적비’(成舜敎家門 信仰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가실 성당 자리가 본래 경신박해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 갔다가 체포되어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한 성순교의 기와집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성순교는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성섭의 증손자로 추사 김정희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는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홀로 남아 세계 일주를 했는데, 이스라엘까지 다녀왔다는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상주로 가기 전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겼는데, 주인이 순교하자 집은 주인을 잃어 버렸다. 

1894년 신나무골에서 가실로 옮겨 온 파이야스 신부가 이를 매입해 첫 번째 가실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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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우측의 성녀 안나상은 본당 주보로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수입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안나상이다.

 

조선교구장을 맡고 있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이해 초에 입국한 소세(Saucet, 蘇世德) 히폴리토 신부를 제4대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고, 그는 5월에 가실로 부임하였다. 이후 가실 본당은 1911년 4월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 설정됨에 따라 새 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소세 신부는 이 해 7월 3일 대구 계산동 본당의 로베르 신부가 치료차 프랑스로 출국하자마자 계산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가실을 떠나 대구로 이임하였다. 

그렇지만 계산동 본당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가실 본당의 신자들도 계속 방문하였으며, 그러다가 1912년 5월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던 투르뇌(Tourneux, 呂東宣) 빅토리노 신부가 제5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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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색유리작가 에기노 바이너트가 제작한 성당 유리화 중 하나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표현한 것이다.

 

투르뇌 신부는 1912년 5월 29일 가실 본당에 부임한 뒤 1924년 몇 개월 동안 임시로 교구 당가를 겸임함으로써 델랑드(Deslandes, 南大榮) 루이 신부에게 잠시 가실 본당을 맡긴 외에는 1944년 3월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일제 시대 대부분을 이곳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1922년에는 문경의 점촌(店村) 본당과 상주의 퇴강(退江) 본당 분할로 김천 본당과 함께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고, 게다가 신자들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신자수가 줄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28일에는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Giardini)의 집전으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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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투르뇌 신부는 왜관(倭館) 지역의 전교에 힘써 1928년 2월부터 공소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축을 시작, 11월에 이를 준공하고 다음해 5월에는 왜관 본당을 분리하였다. 세 번째의 자본당인 왜관 본당의 설립은 가실 본당의 위축을 가져오게 되었다. 왜관은 새 중심지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지만 가실은 시골 본당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 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또 투르뇌 신부가 1935년부터 베르트랑(J. Bertrand, 韓聖年) 줄리앙 신부를 대신하여 자주 교구 당가 일을 보면서 본당 일이 종종 소홀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943년 2월 지병으로 은퇴하여 주교관에서 휴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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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의 은인을 기억하고자 201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스승예수공원에 설치한 예수상
 

투르뇌 신부가 은퇴하면서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마산에 있던 베르몽(Bermond, 睦世永) 줄리앙 신부였는데, 이때부터 ‘가실 본당’은 ‘낙산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일제 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대구 남산 본당에 감금했으므로 4월 13일자로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왜관 본당에 부임, 낙산 본당의 제7대 주임 신부를 겸하였다. 이때부터 해방, 6.25 동란을 전후하여 본당의 주임 신부는 자주 교체되었으며, 한때는 왜관 본당 주임이 낙산 본당 주임을 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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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된 구 사제관, 현재는 유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베르트랑 신부가 다시 제8대 주임으로 부임(1945. 8)하였다가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이임(1946. 1)하면서 진주 장재리(長在里) 본당에 있던 안국목(安國牧) 마가리노 신부가 제9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안 신부가 경주 본당으로 전임(1947. 6)되면서 계산동 본당 보좌였던 신상조(申相祚) 스테파노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신 신부가 1년 만에 다시 계산동 본당 보좌로 전임(1948. 6)되고, 함양 본당에 있던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가 왜관 본당에 부임하여 낙산 본당의 주임을 겸하다가 낙산 본당 주임으로 임명(1949. 10)되었다. 이어 김 신부가 밀양 본당으로 전임(1951. 4)되고, 밀양에 있던 류선이(柳善伊) 요셉 신부가 제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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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한 성모동굴.


낙산 본당은 이후 1952년 6월, 왜관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시에 류 신부가 구마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베네딕도회의 최영호(崔榮浩) 비안네 신부가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53년 11월, 점촌 본당으로 이임하였다. 이때 본당의 제14대 주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휴전 후 재입국한 베네딕도회의 뮐러(A. Muller, 모안세) 안스가리오 신부였으며, 동시에 새로 서품된 김성동(金聖道, 모이세) 신부가 초대 보좌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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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선교의 요람 가실성당을 뒤로 하고 달리다가 자전거도로가 인접한 곳에서 가드레일을 넘어 자전거도로를 진입하여 페달링을 하다 강변대로에서 묘동길로 좌회전 하기 위해 지하통로를 통해 육신사.사육신기념관 앞을 지나 (시간이 허락 한다면 들러 볼 것을 추천) 대롱꽃이 화려하게 핀 도로에 충절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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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채 유료 낙씨터를 지나 하빈지를 따라 연화교차로에서 우회전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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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성지 표지판을 보고 우측으로 진입하여 칠곡대로 아래 지하 통로길로 올라서자마자 정면에 신나무골 성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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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품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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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앞 도로에 세워진 한티가는길 45.6Km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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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언덕 우측에 있는 신나무골성지 대형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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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엘리사벳 묘 -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이룬 이래 영남 지방 선교의 요람이 된 신나무골에는 1860년 경신박해 당시 큰아들과 함께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다.

이선이 엘리사벳 묘소 뒤에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그 뒤로 대구 교회 첫 본당터에 복원된 사제관 등이 보인다.
묘소 주위에 새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와 묘소 한쪽에 잘 보존되어 있는 옛 제대가 풍취를 더해주는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여린 아낙이면서도 장정들 못지 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녀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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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우측에 있는 성모상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그녀가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 21번지에 위치한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한 것이다.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읍은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을 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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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에 안장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역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속칭 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은 가슴을 후벼 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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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엘리사벳 순교자 묘비.
 

대구대교구 왜관지역 5개 본당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9월 순교자 성월 동안 매일 신나무골 성지에서 차례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지를 관리하고 있는 신동 성당은 1984년부터 신나무골 성지에서 해마다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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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뒤에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앞에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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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뒤 십자가상 뒤에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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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에리사벳묘 전면 우측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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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우측 주차장 앞에 담벼락에 있는 성지순례 스템프 안내판, 화살표 방향으로 가면 아래의 대구교회 첫 본당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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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첫 본당터 앞마당에 세워진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崔良業) · 다블뤼(Daveluy) · 리델(Ridel)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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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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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위에 현판에는 '대구교회 첫본당터'라고 새겨져 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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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교회 첫 본당터 전경. 전면 사제관, 오른쪽에 명상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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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교회 첫 본당터 마당에 세워진 김보록(로베르) 신부 흉상.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 로베르 신부는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이 지역에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성 학교의 전신인 한한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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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의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명상의 집) 등을 복원했으며 로베르 신부의 흉상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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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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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마루 좌.우 벽 모습, 현재는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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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김도율 신부가 그린 이선이 엘리사벳과 배도령 스테파노 모자 초상화가 사제관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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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마루에 있는 성지순례 스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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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회터 앞에 있는 주차장과 우측에는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좌측에는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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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 주차장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이제 첩첩산중 팔공산 한티순교성지를 향하여 페달링을 한다.  

위 사진의 산이 여부재가 있는 자갈길 업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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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 초입에는 비교적 로면 상태가 좋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차량들이 다니면서 길에 패이고 빗물에 싯긴 돌탱이들이 흘러들어와서 라이딩을 어렵게 한다. 더구나 계속된 5% 이상의 경사로가 더위에 지치게 만든다. 당초 계획 보다 2시간이상이나 시간을 소모한 이유는 내리막 길이 훨씬 더 로면 상태가 불량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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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니 산악자전길 안내도가 있는데 오늘 오르는 길이 바로 2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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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면 상태에 따라 자전거 안장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끌바를 하면서 정상에 오르니 턱까지 숨이 차고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 생쥐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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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부재 정상에 있는 정자와 한티가는길 순례 스템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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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명으로 다운하지만 로면이 위험한 곳이 많아서 속도를 10km이상을 달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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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체하였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한 후 동명에 이르러 경북대로를 건너 한티로로 진입하니 좌측 동명성당 앞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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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저수지를 끼고 송림길로 들어서니 송림사가 도로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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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 폭염에 한티로 가는 길은 기온이 가장 상승한 15시라서 더욱 힘이든다. 더구나 여부재에서 진을 뺏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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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경사는 높아가고  ~~ 길목에 유일한 마트 기성농협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이온음료로 수분을 보충한다. 화장실로 가서 수돗물로 머리에 열을 식힌다. 캡, 버프, 반장갑 등에 물을 젹셔서 땀을 빼고 다시 착용한 후 시원한 생수병을 목과 등사이 속옷에 끼운 뒤에 다시 마지막 집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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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오르막길 10km중에서 이제 절반 정도를 지나간다. 가산산성 야영장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물로 다시 머리와 얼굴의 열을 식힌 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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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티순교성지 입구에 도착했다.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 왼쪽이 908번 지방도로이고, 오른쪽 내리막길이 성지로 가는 길이다.
현수막 작업을 하신 분들 중에 신부님 같아 보인 분이 계셔서 신부님이냐고 여쭸더니 그렇단다. 내일 행사가 있어서 현수막을 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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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산괴의 주령인 인봉(891m)에서 가산(901m)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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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로 내려가니 차량 차단기가 나오고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대형 표지석이 반긴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고,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측 아래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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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에 세워진 한티순교성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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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에는 조그마한 안내소가 있다. 좌측 창가에 스템프가 비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여러가지 팜프렛과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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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안내판 좌측 계단을 올라가면 순교자 묘역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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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성지의 순교자 묘역 입구. 위로 올라가면 대형십자가와 야외제대, 순교자들의 묘를 순례하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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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지로 올라가는 길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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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대형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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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역의 조 가롤로 가족 묘.

순식간에 평화롭던 마을은 피바다가 되었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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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차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이다. 

 

그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상주 구두실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한티에 정착한 조 가롤로와 그의 아내 최 바르바라와 누이동생 조 아기 그리고 문경에서 체포되어 상주 진영에서 순교한 후 맏형 서인순(徐隣淳) 시몬과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시신을 거둬 한티에 안장한 서태순(徐泰淳, 1823-1867년) 베드로뿐이다. 이렇듯 4기를 뺀 나머지 33기는 모두 무명 순교자 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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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역의 서태순 베드로 묘.
총 37기의 묘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4명 순교자 중 한 명이다.
동명면 시내에서 한티 방향으로 조금 가면 송림사가 있고 그 앞에는 한국 성모의 자애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 요양원’이 있다.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여 말끔히 포장된 한티로를 걸어서 성지 입구에 이르게 된다. 또한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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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차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이다.

그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상주 구두실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한티에 정착한 조 가롤로와 그의 아내 최 바르바라와 누이동생 조 아기 그리고 문경에서 체포되어 상주 진영에서 순교한 후 맏형 서인순(徐隣淳) 시몬과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시신을 거둬 한티에 안장한 서태순(徐泰淳, 1823-1867년) 베드로뿐이다. 이렇듯 4기를 뺀 나머지 33기는 모두 무명 순교자 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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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우측에 세워진 한티성지안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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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축복식을 가진 순례자 성당. 2층에는 성체조배실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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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부와 앞마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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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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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복원한 한티마을(옛 공소) 모습.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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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의 여파로 1861년 신나무골에까지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피신했지만 결국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잡혀 그곳에서 순교했다. 현재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는 신나무골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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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았다. 

3년 가까이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1868년 한티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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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공소터의 여러 한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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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서순태 베드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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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공소터 뒤쪽에 있는 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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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관 피정의 집으로 올라가는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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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우측에 복원된 예공소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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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의 집으로 올라가 길 좌측에 있는 영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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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의 집 입구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대형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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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진 한티 피정의 집.

1980년대 초부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여 정비하고, 1991년 9월 29일 피정의 집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를 세우고 1998년 부활절에 옛 공소였던 한티마을을 복원했다. 2000년 2월 17일 성지 내에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을 축복하고, 2004년 12월 10일에는 성체조배실을 갖춘 순례자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는 2012년 9월 1일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세례명과 순교 연도 등을 바로 잡은 새 비석을 제작해 묘지에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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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를 마치고 한티성지 입구로 다시 올라오니 신부님이 현수막 작업을 끝내고 ... 신부님과 작별 인사를 마치고 대구지하철 3호선 칠곡 경대병원역으로 빠르게 다운을 하면서 이곳 팔공산 한티순교성지는 조용히 하루 쯤 피정을 하면서 순교성인들과 하느님을 만나야 하는 성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에 올 때에는 하루 저녁 묵어가야 하겠다.   

 

※ 첨부 : 37차순례_왜관가실_신나무골_한티_계산_관덕정_성모당_복자성당_170719_A.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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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 지도 보기 : https://connect.garmin.com/modern/activity/186354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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