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차 순례 - 지세포 성지, 지세포성당, 공곶이 순례길, 동정녀 유섬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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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차 순례 - 지세포 성지, 지세포성당, 공곶이 순례길, 동정녀 유섬이 묘

20170825(금) 2박3일 원정순례 3일차, 44차 순례는 어제에 이어서 거제지역 성지를 둘러보는 날이다.

오늘 순례코스는 지세포 성지- 지세포성당- 공곶이 순례길- 유섬이묘- 고현시외버스터미널 약 52km인데 그 중 3.2km는 공곶이 수목원 도보 순례길이 포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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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 거주하는 토스마아퀴나스님과 실바노님이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시원한 복국으로 속풀이를 잘 하고 상쾌한 순례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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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첫번째로 찾아간 곳은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일대에 1만6000평 규모의 윤봉문 요셉(1848년~1888년)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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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에 도착하니 대형 표지석과 성지 안내판이 그 규모를 미리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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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름다운 동남해 바다가 바라보이고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는데다 해안을 따라 4시간 정도 걸을 수 있는 순례길도 조성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윤봉문 묘지를 비롯해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 길, 경당, 연못, 폭포와 맹종죽 대나무 숲과 편백나무 숲이 성지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성지가 대부분 수도권에 조성돼 있어 남해의 끝 거제도에 성지가 조성된 것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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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성당 허철수 주임신부의 주도로 각 지역 성당을 비롯한 신자들의 성금을 받아 조성되었다.
거제 옥포 쪽파골에 있던 묘지를 지세포리 산 103-12 번지로 옮기면서 성지의 모습이 자리를 잡았고,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신앙의 뿌리는 증조모인 홍씨(1780-1849)로부터 시작됐다. 홍씨는 경북 영일면 기계리에서 천주학을 배워 두 손자를 가르쳤다.
이 두 형제는 후일 거제도의 사도가 되는 윤성우 스테파노(1824-1886)와 윤사우 스타니슬라오(1827-1883)이다.
 
이들이 성장해 동래 안락동으로 이사해 스테파노는 강 가타리나와 스타니슬라오는 이 막달레나와 결혼,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형인 성우는 자식이 없고 동생 사우에게는 경문 베드로와 순교자인 동생 봉문 요셉이 있었다. 바로 동생 봉문이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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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지세포리의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 입구


2013년 4월 순교자의 유해가 옥포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던 순교 복자 윤봉문(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 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해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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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문 요셉 순교자 기념비

이곳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본명 정명련) 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났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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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성모자상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 갔다고 한다. 이 가운데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은 2014년에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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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지세포 성지는 인위적인 조성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개발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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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십자가상
 

신유박해로 맺어진 거제도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졌다.
복음의 씨앗이 처음으로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복사였던 순교 복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도에서 버드내[柳洞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현 거제시 옥포 2동 국산)에 정착한 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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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현양비로 올라가는 계단길,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순교자 현양비.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서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가타리나가 태어났다.

1852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봉문 요셉은 나중에 부친이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거제의 사도’로서 형과 함께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1887년 겨울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주임이었던 로베르(Robert, 金保綠)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윤봉문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도왔다. 로베르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 해 거제도에서는 윤씨 형제가 가르친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윤봉문은 다른 교우 두 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몸값으로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음에도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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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순교자 현양비 하단 부분에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곳 지세포리로 이장하기 전에는 옥포의 산중에 있던 순교자의 묘에 있었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부사의 체포령을 갖고 포졸들이 다시 왔고, 이에 형 경문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이틀 후 읍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처음에 윤봉문을 체포하고도 돈을 빼앗지 못한 통영 관리가 영장을 찾아가 윤씨 형제에 대한 체포령을 받아냈다.
결국 윤봉문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은 약탈당하고 소 22마리도 빼앗겼다.
영장 앞에 끌려간 그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영장은 대구 관찰사로부터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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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 우측 언덕에 세워진 윤봉문 요셉 순교자 안내판 및 현양탑에 대한 안내판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다. 결국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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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 우측 언덕에 있는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생애 안내판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 족박골(足泊谷)의 선산에 안장했다. 그 후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菊山)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로 다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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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현양비 옆 남쪽에 마련된 전망대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24일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의 신앙인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거제ㆍ통영 지역의 본당들은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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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위 십자가의 길에서 바라본 전망대에서 통영 북신동 성당의 토마스아퀴나스님이 포즈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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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리와 포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아쉽게 아파트 건물이 신축을 하면서 조망권을 일부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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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길로 올라가는 초입에 핀 꽃
 

그런데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진입로가 없어 포기했던 곳이었지만 인근 농로를 매입해 시의 도움을 받아 진입로를 만들면서 성지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탓에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인 성지 조성 부지를 찾아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헌신적인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울창한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을 우선 조성했고, 중앙 부분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하였다. 순교자 현양비는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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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여 순교자 현양비 뒤편에 모셨다.
이장을 위한 발굴 작업을 통해 온전히 보존된 순교자의 유골을 확인하고, 의학전문가로부터 오른쪽 골반에 장독(杖毒)에 의한 골절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마산교구는 앞으로 지세포리의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사제관과 수녀원, 피정의 집과 식당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15년 12월 30일 교구 인사발령을 통해 허철수 신부를 거제지구 성지전담으로 임명하였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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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의 13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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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의 12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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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게 우거진 편백나무와 대나무 숲 사이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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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숲속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 연못과 돌다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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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이 있는 편백나무 길을 따라 내려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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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울창한 왕대나무 숲길이 나오는데 계속 되는 아름다운 숲에서 순교자의 속삭임과 하느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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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으로 올라가면서 멀리 보인던 십자가상을 다시 가까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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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 아래에는 야외 제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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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경당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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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의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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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은 숲속에 여러 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조건을 잘 이용하여 아름답게 조성된 지세포 성지를 뒤로 하고 주차장 옆에 있는 사무실로 내려와 순례확인 스템프를 찍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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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대로로 내려와 도로 옆에 있는 지세포 성당을 잠시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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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성당의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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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 성당 마당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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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 성당은 2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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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의 모습, 토마스아퀴나스님과 실바노님이 잠시 성체조배를 하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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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성당 현관 앞에 있는 종탑이 매우 인상적이다. 지세포 성당은 주변 관광지를 찾은 신자들이 미사를 드릴 때에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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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성당을 뒤로 하고, 14번 거제대로를 따라 와현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예구마을을 찾아간다.
와현해수욕장을 지나 예구마을에 가면 마을 한 가운데에 공소가 있다. 자전거를 맡길 수 있는 편의점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민 70%가 신자인 예구마을은 교우촌이라 할 수 있다. 매 주일 오전 8시30분 예구공소에서 미사가 봉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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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 가는길 입구

거제도 일운면 예구마을 포구에서 산비탈을 따라 20여분 올라가면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공곶이’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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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로 올라가는 언덕 오른쪽에 있는 펜션 주인도 천주교 신자인지 펜션 언덕에 성모상을 세웠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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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라는 이름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 때문에 붙여졌다.
동백나무, 수선화, 조팝나무 등 아름다운 숲길이 나오는데 이곳은 강명식(바오로)와 지상악(갈라) 부부가 평생 동안 일군 꽃동산은 찾아오는 이들의 시름을 달래고 어루만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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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르니 탐방로라는 숲길이 니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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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가 잘 가꾸어져 있어서 힐링하기에 제격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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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숲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공곶이 숲길 좌우 곳곳에 두 부부가 평생 동안 정성을으로 가꾼 나무들 사이로 앞바다와 섬이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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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유지인 이곳이 어떻게 해서 천주교순례길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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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에 도착하자 외줄 레일과 특이한 장비가 나타난다. 비탈진 언덕으로 농기구들을 이동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차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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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피어난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도 처음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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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 안주인 갈라 할머니(81세)를 만나 순례중이라고 인사를 하니 반가이 맞아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 준다.
예구마을에서 태어나서 진주에서 장가온 남편을 만나 6남매를 낳아 성장.교육시켜 객지로 출가시키고 공곶이에서 매일 같이 땀방울 쏟아 이룬 아름다운 숲, 특히 봄철이 되면 수선화 꽃은 갈라 할머니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꽃길로 순례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 잡는다. 더우기 이 길이 무료입장이라는 것이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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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밭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큰 아들이 외국에서 살다가 귀향하여 이제는 부모의 대를 이어 공곶이를 가꾸고 있다고 한다. 내년 봄에는 저 밭에도 수선꽃이 가득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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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아퀴나스님과 갈라 할머니는 구면으로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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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뿌리를 정리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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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이르니 공곶이수목원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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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바라본 동쪽 끝자락에 서이말등대가 있다.
일본 대마도가 바라보이는 거제도 동쪽 끝자락인 이곳에 거제도에 복음을 처음 전파한 윤사우와 그의 장남 윤경문 베드로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세월이 지나 그들이 사용했던 움막과 밭은 흔적만 남았지만 우물은 지금까지 잘 나오고 있다. 지세포성당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살던 신자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이곳에 정기적으로 순례를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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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건너다 보이는 섬이 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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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내도 뒤쪽으로 유람선을 타고 뱃길을 따라가면 관광지 섬 외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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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몽돌 위를 한발 한발 걸으면서 다시 예구마을로 돌아가는데 파도는 속삭이듯 거제로 유배온 옛 신앙 선조들의 한 많고 슬픈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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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계단을 올라 숲길을 따라 가면 예구마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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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파도 소리을 등지고 훌쩍 떠나기가 아쉬워 마지막 포토타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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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 순례길을 한 바뀌 돌아 나오는데는 2시간 가량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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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길 입구로 내려가는 계단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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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치 문을 나오면 언덕 길 바닥에 "길없슴"이란 글자가 있다.
이 길로 공곶이를 들어가는 것 보다는 돌아서 나오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리 예방 하고자 써놓은 것 같다. 

공곶이 순례길 트레킹을 마치면서 아쉬운 점은 시간 여유가 있다면 거제도에 천주교 복음을 가져온 윤사우와 그의 장남 경문(베드로)이 움막을 짓고 살던 서말이 등대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다음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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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곶이 수목원 순례길을 빠져나와 다시 거제대로를 따라가다 북병산로-동부로-거제남서로로 진입하여 내간리 송곡마을1길을 따라 오늘 마지막 순례지 유섬이 묘를 찾기 위해 내원암 주차장까지 달려간다. 내원암까지는 약 24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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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암 주차장을 30여m를 남겨두고 도로가에 유처자묘(유섬이 묘소가는길) 이정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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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교각으로 만들어진 작은 다리를 건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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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끝에 방명록함이 비치되어 있다. 방명록을 작성하고 그동안 왔다간 사람들을 살펴보니 가까운 거제도 통영 교우들과 단체들이 가장 많고 의외로 전주교구 교우들과 단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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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유섬이 아버지가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전주의 초남이 출신이고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했기에 전주지역 신자들이 많이 찾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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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섬이는 복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순교자 신희(申喜)의 딸로 1793년 전주 초남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신유박해로 가족을 잃고 9살에 홀로 거제도로 유배되어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다 71세에 선종한 슬픈 사연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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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를 마치고 70cm 가량의 이 작은 묘비가 있기에 140여년만에 우여곡절 끝에 유섬이 처자의 삶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을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온다.

  

아직 봉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섬이 묘는 교회사학자이자, 개인적으로는 살레시오고교 1학년 때 필자의 담임선생이었던 하성래(아우구스티노·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 박사가 거제도호부사를 지낸 하겸락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 중 ‘부거제’(附巨濟)에 유섬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내는 「교회와 역사」 2014년 4월호에 상세한 내용을 발표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유섬이가 3살 무렵인 1795년 한국천주교회 최초 선교사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집을 방문했고 일주일간 머무르며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다. 마산교구 배기현 주교는 “유섬이의 세례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때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 일가는 순교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가족을 잃고 먼 땅으로 홀로 유배와 관비가 된 9살의 유섬이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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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유섬이 묘비에는 사헌유집 기록과는 달리 "유처자 묘"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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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섬이 묘 주변에 세워진 사헌유집에 대한 안내판
 

관비로 유배된 유섬이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던 여인에게 보내졌고 그 여인은 유섬이를 수양딸로 삼았다.
유섬이는 관아에 돈을 바치기 위해 양모에게 바느질을 배워 하루 하루를 연명한다. 13~14세가 된 유섬이는 동정을 지킬 것을 선언한다.
마산교구 평신도협의회 시복시성분과 최종록(대건 안드레아, 창원 사파동본당) 위원장은 “당시 시대상을 생각할 때 여성이 독신 선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며 “동정부부인 오빠 유중철(요한)과 올케 이순이(루갈다)를 따라 자신도 믿음의 뜻을 세웠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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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섬이 유배생활에 대한 안내판

유섬이의 동정 결심은 16~17세가 되어 더욱 굳건해진다. 유섬이는 양모에게 흙과 돌로 집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것은 독방과 같은 구조였다. 음식을 넣을 구멍과 작은 창만 내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모에게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는 청을 한다. 유섬이는 25년 여 동안 스스로 갇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40세가 넘어 흙돌집에서 나온 유섬이는 한 자 길이의 칼을 몸에 지니고 동정을 지켰다. 고을 사람들도 그 정절을 알고 ‘유 처자’라 부르며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정을 지킨 유섬이는 1863년 7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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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섬이 가족에 대한 안내판

마산교구는 지난해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유섬이의 삶을 집중 조명하며 ‘순교자의 딸 유섬이’ 시극을 발표하고 특강을 펼치는 등 유섬이의 삶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교구의 관심은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가 유섬이에 관한 자료를 접하면서 시작됐다. 2014년 당시 총대리로 재직 중이던 배 주교는 하성래(아우구스티노·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 박사가 쓴 유섬이에 관한 자료를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배 주교는 “세계 어느 대문호도 이런 삶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라며 “유섬이의 삶은 물질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반성을 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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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아퀴나스님이 유섬이 묘를 참배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2014년 5위의 순교복자가 마산교구에서 탄생했다. 그런데도 배 주교는 세례명도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배 주교는 유섬이의 삶이 우리에게 뜻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섬이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너무 맑고 귀합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중심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따라 사는 이 세대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배 주교는 유섬이의 삶은 가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섬이는 9살의 나이에 부모 형제를 잃고 홀로 거제도로 유배 와 관비의 신분으로 살아갔지만 마음의 중심을 지키며 고결하게 삶으로써 당대 지식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큰 신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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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습을 통해 배 주교는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다른 이들을 이롭게 이끌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유섬이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러한 점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먼저 기억할 때 그리스도교의 가난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 10~11월 열리는 세미 뮤지컬 ‘순교자의 딸 유섬이’를 준비하며 배 주교는 “처절한 삶을 살다간 유섬이를 드러내는데 우리의 공연이 너무 화려해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전하며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이것이라 생각하며 더 나은 공연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배 주교가 바라보는 유섬이의 삶은 맑고 검소하며 겉치레가 없는 진솔함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유섬이 묘도 비움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주차장 등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준비할 계획이다.
세미뮤지컬 ‘순교자의 딸 유섬이’는 10월19일 서울 마포구 맥아트홀 초연을 시작으로 11월 11일까지 8차례 순회공연을 한다. 


감동적인 유섬이 묘를 둘러보고 깊은 순교자 가족들 삶에 대해 생각에 빠져 고현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2박3일의 원정 순례를 모두 마무리 하고 서울로 복귀한다.
끝으로 내내 함께 하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통영의 토마스아퀴나스님과 실바노님의 내외분들의 배려에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1. 참조 : 가톨릭평화방송 기사 => 마산교구 50주년 특별공연 <순교자의 딸 유섬이> 제작발표회
         => http://www.cpbc.co.kr/CMS/news/view_body.php?cid=692177&path=201708

2. 참조 : 강희근 저, 순교자의 딸 유섬이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053167


 

※ 상단 첨부 : 43_44차_대산성당_사봉성지_문산성당_옥봉동_거제성지_20170824~25.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79583450?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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