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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차 순례- 진산성지, 이치대첩지, 송광사, 대승리(전동성당 발상지), 진안 어은동공소

20170920(수) 1박2일 46차 원정 순례는 용산역 06:15 KTX에 친구 계인과 함께 올라 서대전역에 07:18 하차,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앙을 증거한 진산성지, 순례 길목에 있는 권율장군의 이치대첩지, 송광사, 대승리(전동성당 발상지), 진안성당과 어은동공소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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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표 순례지 진산성지 성당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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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체 경로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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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느 때 처럼 고마운 접이식 MTB 26인치 자전거를 정비하여 도봉역 05:16 첫차에 승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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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1호차가 휄체어 칸이라서 통로 좌우에 의자 없는 공간이 넓다. 빈 공간에 자전거를 접어서 세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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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전역 동쪽으로 하차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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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대로로 진입 후 가장교에서 하천의 자전거 도로를 타고 안영교를 건너서 대둔산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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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교 남단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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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교의 북단쪽 자전거도로를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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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m 되는 길이의 샛고개 터널은 우측에 가드레일 옆으로 도보 갓길이 있어서 차량 통행과는 상관 없이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고 통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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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로를 따라 21km를 페달링 하다보니 도로변에 첫번째 순례성지인 진상성지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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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이는 성당이 옛 지방리 공소 건물이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珍山)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한 곳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어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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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폐한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인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인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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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 우측 앞마당에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권상연 야고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92년)와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년), 이존창 루도비코(李存昌, 1759-1801년), 최창주 마르첼리노(崔昌周, ?-1801년) 등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 후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신해박해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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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령을 듣고 피신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숙부를 감금하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의 회유와 협박을 용감히 이겨낸 그들은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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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부지 주변에는 십자가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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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 앞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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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자연부락인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사제관이 있는 곳)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진산 지역에는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고산 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가새벌도 그 중 하나였는데 병인박해 이전부터 길게는 기해박해 전부터 몇몇 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김영삼이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고, 1877년에는 김영삼의 동생인 김 사도 요한이 한양에서 옥사하고, 1878년에는 김춘삼 사도 요한이 가새벌에서 잡혀 한양에서 옥사하여 순교하였다. 병인박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던 1876년에도 이곳에는 신부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렀다. 1885년에 프랑스 선교사 조스(Jean B. Josse, 1851-1886년) 신부가 방문한 이후 가새벌에서는 매년 공소가 치러졌고, 1910년을 즈음해서는 진산과 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공소로 성장하였다. 공주로부터 이사해 온 이씨 일가의 활동은 이 공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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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새벌에는 일찍부터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6년에 이르러 첫 번째 공소 건물을 갖게 된 가새벌 공소는 신자 증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였다.  

1927년에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현재의 지방리 공소가 마련되었다.  

공소 건물이 완성된 후 이의규 회장과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9년에 초대 주임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931년 대구대목구로부터 현재의 전주교구가 분리됨에 따라 성직자 부족으로 지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지방리에 신부를 파견할 것이 검토되었으나 금산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군청소재지인 금산에 1935년에 본당이 설립되자 지방리는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공소였음에도 금산 지역보다 신자가 많고 기존의 성당과 사제관을 가지고 있던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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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공소에서 성지성당으로 승격된 성당 내부.  

성당 제대 옆에 순교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시 성체조배를 하며, 오늘도 안전하고 기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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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전라북도에 속했던 진산 지역은 몇 차례의 행정개편 대상이 되었고, 1963년에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전주교구 관할이던 진산 지역이 대전교구로 편입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고 많은 순교자들의 땅이며 호남 선교의 요람이었기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1980년 8월 29일 당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금산 본당에 속한 모든 것을 대전교구로 이관하였다.  

진산이 속한 금산군의 지리적 여건과 대전에 가까운 생활권, 신자들의 편의와 보다 효율적인 신앙지도를 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금산 본당 관할의 지방리 공소도 대전교구의 한 공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09년에는 다시금 공소에서 진산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어 교회사적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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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앞에서 뒷마당의 야외제대와 교육관인 충연관을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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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첫 참수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나고 자라서 신앙을 증거한 곳일 뿐 아니라, 진산 지역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기는 거룩한 곳이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한국을 사목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 한터라 사무실 앞 벤치에 앉아 간식을 하는데 교우 몇분과 주임신부님이 나와서 인사를 나눈다.

다행히 진산성당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곧 성당내부를 옛 모습으로 복원 할 예정이라고 해서 몹씨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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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성지를 뒤로 하고 대승리 전동성당 발상지를 향해 다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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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문 앞에서 오늘 동행한 이계인 친구가 기념 사진 한 컷.
 

68번 도로를 따라가다 17번 대둔산로를 만나 우회전하여 이치고개에 이르니 우측 언덕에 있는 권율장군 이치대첩비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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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또는 배티재라고 부르는 고개는 대둔산을 넘어 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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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권공 이치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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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大芚山) 남쪽 사면의 배티재[梨峙:해발고도 340m]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는 교통의 요지이다. 산골짜기가 길고 깊어 매우 험한 이 재는 임진왜란 때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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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거느린 2만 병력의 왜군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뒤 군량미 확보를 위해 호남평야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이 배티재를 넘으려 하다가 권율(權慄)에게 대패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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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키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수적으로는 왜적이 우세하였으나 권율이 이끄는 전 병력은 결사적으로 싸워 전주성(全州城)과 호남평야를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장식한 이 싸움을 이치대첩 또는 이치싸움이라고 하며, 여기에 힘입어 이후 권율은 행주대첩과 웅치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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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지를 둘러보고 배티고개 정상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에서 잠시 뒤로 보이는 대둔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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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는 대둔산 자연휴양림이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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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티재 휴게소를 중심으로 남쪽은 완주군, 지나온 북쪽은 금산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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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휴게소를 지나 빠른 속도를 보상 받으며 다운힐을 하여 우측에 있는 대둔산도립공원과 야영장을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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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골재를 넘어 완주 용정휴게소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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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기리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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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 이르러 이른 점심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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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국밥으로 라이딩 중 잦은 물보급으로 냉해진 속을 달래며 점심식사를 마친다. 이곳 고산은 지난 8월 38차 순례 때도 들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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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리를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려면 삼기리에서 전북재활학교-대아저수지를 거쳐 732번 도로와 55번 도로를 이용하거나, 봉동읍을 지나 신지송광로를 이용하여 송광사 방향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계인 친구가 전주역에서 오후에 서울로 복귀해야 하기에 동행하여 봉동읍까지 달리다가 송광사 쪽으로 주행하기로 결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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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 삼거리에서 친구와 헤어져 좌회전하여 나 홀로 신지송광로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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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길가의 코스모스는푸른 하늘과 어우려 흔들 흔들 온몸을 흔들며 가녀린 목을 빼고 따라사로운 가을 햇볕에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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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재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는데 길가에 용진성당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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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목도 축이고 쉬어갈 겸 성당 마당으로 들어가 성당 내부를 살피려 했더니 현관 문이 잠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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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길을 달리다 보니 길목에 전주이강주술역사박물관 표지가 있어 들어가 보니 출입문에 열쇠가 잠겨져 있다. 폐관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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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는 벌써 까치들이 홍시를 쪼아먹느라 부리가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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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에 이르러 잠시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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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보조 체징선사에 의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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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전라북도가 지정한 순례길에도 천호성지와 함께 포함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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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산 송광사에는 동종(松廣寺銅鐘)이 충청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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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은 1716년(숙종 42)에 제작되었으며, 송광사 십자각 2층에 봉안되어 있다. 총높이 107㎝, 종 높이 84㎝, 아랫부분 지름 73㎝, 두께 4.5㎝로, 전라남도 무등산(無等山) 증심사(證心寺)에서 주조되었고, 1769년(영조 45)에 보수되었다.
종의 윗부분에는 입화식(立花飾) 무늬 60개가, 아랫부분에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를 양각하였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梵’가 새겨진 지름 6㎝의 원 8개를, 그 아래쪽에는 가로 18㎝, 세로 2.5㎝의 유곽을 4개 만들었으며, 유곽 사이의 3면에는 길이 24㎝의 보살입상을 양각하였다. 보살입상은 머리 뒤에 광배(光背)가 있고, 보관(寶冠)을 썼으며, 밑에는 지름 6㎝의 실상화당초(實相華唐草) 무늬를 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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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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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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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를 뒤로하고 전북체육중.고등학교 교문 앞까지 달리는 동안 계속 이어진 벚꽃길은 말로만 듣던 유명한 벚꽃터널이란 것을 비록 봄이 아니지만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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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고교 교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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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천호 성지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소양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면 26번 국도가 나온다.  동양 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화심교 앞에서 좌회전해 2킬로미터 남짓 가면 '대승가든'이라는 간판이 서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아랫길로 약 600미터 정도 가면 바로 보두네 신부가 사목을 하던 자리가 나온다.

화심삼거리에서 잠시 마트에 들러 이온음료를 보충하고 좌회전하여 대승리를 향하여 달리다 보니 대승한지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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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X가 가르키는 지점을 찾다보니 바로 비닐하우스 끝단에 희미하게 표지석이 보인다.

다시 뒤로 돌아서 내려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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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있는 집 마당 앞을 지나 비닐 하우스 옆을 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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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리에 건립된 전주 전동 천주교회 발상지 기념비 전경.  

마침내 전주전동천주교회발상지 표지판이 보인다. 아~ 여기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는가?

 

전동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대승리 부지를 마련해 1991년 전주 전동 천주교회 발상지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천호 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대승리는 전주 지역 선교의 요람인 전동 성당이 세워지기 전 복음의 씨앗이 움튼 곳이다.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전동 성당을 세우기 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보두네(Baudounet,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59-1915년) 신부가 1889년 봄부터 1891년 6월 23일까지 2년여 간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전동 성당은 본당 설립 1백주년을 맞아 1990년 6월 이 부지를 매입해서 다음해 12월 8일 '전주 전동 천주교회 발상지'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이곳 대승리의 역사와 부지를 매입하게 된 경위가 간단하게 적혀 있어 찾는 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기념비 뒤편으로는 대나무숲이 울창해 보두네 신부와 당시 신앙의 선조들이 지녔던 대쪽같이 굳건한 신앙을 전해 주고 있는 듯하다.

대승리는 전동 성당이 세워지기 전 보두네 신부가 2년여 간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보두네 신부가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 조선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8월이었다. 불과 1년 전인 1884년 9월 사제품을 받고 불같은 신앙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온 그는 입국 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갔다가 마침내 전라도 지방까지 발길을 옮겼다.
입국한 지 무려 10년이 지나서야 조선에서 박해가 멎어 비로소 그는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 선교의 요지로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때가 바로 1891년으로 보두네 신부는 그 이전 2년 동안 대승리에서 사목을 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임지로 내려온 그는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키로 하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 모두 팔아 성당 건립에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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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리 전동성당 발상지를 뒤로 하고 회심교를 건너 전진로를 접어들자마자 우측 소로로 빠져 모래재를 향하여 지루한 업힐을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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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령 보다는 훨씬 빡세고 힘이든다. 이런 언덕길을 오를 때면 늘 나도 모르게 주모경을 외우고,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자작의 찬송노래가 절로 흥얼거리면서 ~ 힘든줄 모르고 업힐을 하고 있다.
드디어 모래재 터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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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돌리며 지나 온 화심리 쪽을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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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지나 다운힐을 하다 보니 적천제를 지나니 메타세쾨이어길이 나타나고 도로 좌우에 대형 카메라를 세워두고 사진작가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나를 찍느라 바쁘다. 본의 아니게 그 분들의 연기자가 된터라 중간에 자전거를 세워서 사진을 찍는 것도 포기하고 끝점에 이르러서야 자전거에 오른 상태로 달리면서 전방을 찍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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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멀리 마이산이 보이고 이정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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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 서쪽 사면과 노령산맥 동쪽 사면의 사이의 산간고원지방에 위치한다.
동부는 소백산맥의 서쪽 사면과 이어진 높이 300m 내외의 진안고원이 있다.
서부는 노령산맥의 주능선인 운장산(雲長山, 1,126m)·만덕산(萬德山, 762m) 등의 비교적 높은 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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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마이산은 푸른 창공 아래서 유난히 봉긋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에 걸쳐 있는 산, 명승 제12호. 두개의 큰 산봉우리로 속칭 수마이산(667m), 서쪽을 암마이산(673m)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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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고원과 산지의 중앙에 진안읍과 마령면의 경계를 이루는 마이산(馬耳山, 685m)이 있다.  

남동부의 소백산맥 서쪽 사면에는 성수산(聖壽山, 1,059m)·팔공산(八公山, 1,151m)·덕태산(德泰山, 1,113m) 등의 높은 산들이 있다.  

그 밖의 산으로는 구봉산(九峰山, 919m)·부귀산(富貴山, 806m)·대덕산(大德山, 875m)·내동산(箂東山, 887m) 등이 있다.
호남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진안 고원은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이다.
금강은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수분령(水分嶺, 530m)에서 발원하여 진안읍·정천면·용담면을 거쳐 무주군으로 흘러 들어간다.
섬진강은 백운면의 팔공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마령면·성수면을 거쳐 임실군으로 각각 흘러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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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읍 로터리에 이르니 한창 공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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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지.사적지는 아니지만 잠시 진안성당을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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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마지막으로 순례할 어운동공소가 진안성당 관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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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진안성당도 전라북도 아름다운 순례길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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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성당 내부는 들어갈 수 없도록 잠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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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본당은 1999년 12월 전기 누전으로 성당이 전소되어 새 성당 건립 공사를 추진하였고, 2000년 10월 29일 어은동 공소에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또한 2002년 4월 연면적 600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콘크리트 건물인 신축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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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성당을 나와서 진무로를 따라 읍내길을 달리다가 진장로를 진입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18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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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장로에서 우측에 오천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 하여 죽산로를 따라 계속되는 오르막길 4km를 달려 어은동공소를 기진맥진 하면서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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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 공소로 올라가는 골짜기는 하늘과 산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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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을회관 앞 다리 건너편에 1900년 진안 지역 첫 본당으로 설립되었던 유서 깊은 어은동공소가 보인다.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공소.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해발 1059m의 성수산(聖壽山) 북쪽 자락 끝에 있는 어은동(魚隱洞) 마을이다.
어은동 노인정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마당 위로 왼쪽에 종탑을 둔 붉은 함석지붕 건물이 보인다.  

1900년 본당으로 설정된 어은동 공소이다.  

공소 앞마당 한쪽 끝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 보면 공소 건물이 건립된 해는 1909년이지만 그 이전인 1900년에 이미 본당으로 설립된 곳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달려왔지만 한눈에 산속 오지임을 알 수 있는데 100여 년 전이라면 정말로 깊은 산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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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사” 또는 “진안본당 105년사” 같은 자료를 보면 이곳 어은동은 이미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다.  

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전라도 산중으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삼바실, 절골, 모시골, 절번덕이 등에 흩어져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어은동 공소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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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앞에서 만난 성모상.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어은동을 비롯한 진안 지역 일대로 전라도의 다른 지역 교우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자수가 현저히 증가하였고, 1888-1889년 이 지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40명에 이를 만큼 교세는 날로 발전하였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1897-1898년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최고였다. 이후에도 신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보두네 신부가 담당했던 12년 동안 냉담교우가 없었으며, 1886년에서 1900년 사이에 무려 27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에 보두네 신부는 진안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남원, 무주 지역의 많은 공소들을 관할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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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공소 역시 아름다운 순례길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보두네 신부에게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할 것을 제안하였고, 한국인 신부 한 명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뮈텔 주교는 신설 본당 소재지로 남원읍을 추천했으나, 보두네 신부는 당시 교세로 미루어 남원 지역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어은동 지역에 본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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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뒷벽에는 목조로 된 감실과 목제 촛대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벽을 향해 전례를 거행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1915년 6월 김양홍 신부가 제주도로 전임되고, 임시 주임으로 타케(Taquet, 嚴) 에밀리오 신부가 임명되어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진안에는 군상 천주당(진안면 군상리), 진안 천주당(진안면 죽산리), 반송 천주당(백운면 반송리) 등 3개의 포교소가 개설되었다.

 2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1921년 6월 장재동 공소로 옮겨 거처하다가, 1922년 6월 다시 마령면 연장리의 한들 공소로 옮겼다.  

한들 공소에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편입된 가장 큰 이유는 어은동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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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공소 내부 모습.

공소 내부는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남녀 구분을 위해 좌우가 구분되어 있다.
새 성당은 정면 6칸 중 오른쪽 2칸의 일부를 제대로, 나머지는 제의방과 사제관 등으로 사용했다. 또 왼쪽 1칸은 남녀가 따로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건물 내부 평면은 ‘아’(亞)자 형식을 이루고 있고,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남녀 교우석을 구별했던 표시이다. 제대 뒷벽에는 목조로 된 감실과 목제 촛대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제대를 감실 바로 밑 벽에 바짝 붙여서 설치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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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파견하였다.  

김양홍 신부는 보두네 신부의 관할 구역 가운데 진안을 비롯한 11개 지역 공소를 이관 받아 이를 다시 18개 공소(진안 4, 무주 1, 용담 1, 장수 9, 남원 3)로 나누었는데, 당시 이관 받은 신자수는 999명이었다.
이 중에서 삼바실, 모시골, 절골, 절번덕이를 합친 어은동 공소는 신자수가 189명에 이르렀다.
당시 어은동 본당은 본당으로 설립되었지만 행정상으로는 공소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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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9월 김양홍 신부는 옛 공소집을 수리 · 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의 성당으로 완공하였다.
1903년 신자수가 1,400명에 이르자 기존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이듬해 마을 아래쪽에 15칸의 새 성당을 신축하였다.
1905년에는 성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뮈텔 주교의 지시로 여교우들이 앉는 자리에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그 후로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1909년 3월 마침내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여, 9월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02년 5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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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너와 지붕의 목조 성당으로 건립하여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진 공소 건물.

 

지붕은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八作) 지붕에 너와로 이었다. 너와는 기와용으로 사용하는 얇고 넓적한 점판암이었다.  

교우들은 지붕으로 사용할 너와를 구하기 위해 30리나 떨어진 백운면 백암리까지 가서 지게로 날라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목조 건물이 돌너와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교우들은 1967년 너와지붕을 가벼운 함석지붕으로 바꾸었다. 
새 성당이 완공되던 당시 진안읍에는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김양홍 신부는 1909년 2월 이들을 위해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국어, 한문, 수신, 산수 등을 가르쳤다.
설립 당시 학생수는 30명이었으나 곧 60여 명으로 늘어나자 1911년 9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 영신학교의 운영은 교육뿐만 아니라 전교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교우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 공소 교우만도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 · 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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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에 정착한 후 7월부터 이상화 신부는 박덕화(朴德和) 다미아노의 주선으로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1924년 10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30년에 종각을 세웠다. 이상화 신부가 한들로 본당을 옮길 때 어은동의 일부 신자들도 신부를 따라 한들로 이사하였다. 그때 한들의 박덕화는 이주한 신자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논을 구입해 주었다.

1941년 4월 13일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의 이기수(李基守) 야고보 신부가 진안읍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한들 본당에는 허일록(許日錄) 타대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기수 신부는 진안읍 군상리 866번지의 초가를 구입하여 기와지붕의 강당으로 개수하여 사목활동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2년 말 진안읍의 본당이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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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숨은 형상이라고 해서 어은동(魚隱洞)이라고 부르는 마을,
물고기는 로마 교회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이다.
마을 이름 자체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와 살았던 우리네 신앙 선조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래선지 이 마을사람 대부분이 교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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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은동 공소에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이 신설되어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과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며 전교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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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1951년 4월 허일록 신부 후임으로 한들 본당에 부임한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는 그 이듬해에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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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석 신부는 이기수 신부가 사용하였던 군상리의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당시 이기수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군하리 전답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과 각 공소 회장들로 성당 신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6년 10월 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1957년 7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어은동 · 진안읍 · 군상리 · 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의 본당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고,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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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여러 곳에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해 당시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최고였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해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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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공소를 둘러보고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와 다시 에너지를 모아 업힐을 하면쇼ㅓ 마지막 마무리할 숙소를 찾아 장수읍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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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휴게소 언덕을 넘어서니 방곡재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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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넘은 재가 무려 9개다. 해가 저물어 헤드라이트와 후미등을 켜고 장수읍의 한 식당에 이르러 청국장을 주문하고 계란부침을 추가하여 저녁을 먹고, 두 개 밖에 없는 읍내 모텔 중에 한 곳을 찾아 오늘 145km의 장거리 순례의 피로를 해소하는 여장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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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사히 오늘 순례를 마치도록 도와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린다.

※ 상단 첨부 : 46차_서대전_진산_대승리_진안어은동_장수_20170920.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connect.garmin.com/modern/activity/1987976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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