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차 순례- 장수 수분공소, 전주 초남이 성지, 치명자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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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차 순례- 장수 수분공소, 전주 초남이 성지, 치명자산 성지

20170921(목) 아침 장수읍 숙소에서 일찍 잠을 깬다.
어제에 이어 1박2일 둘째날 시작은 장수에서 출발하여 장수 수분공소 - 의암 주논개 사당 - 전주시외버스터미널 - 전주 초남이 성지 - 치명자산 성지 순례로 이어진다.

초남이 성지는 지난 16차 때에 시간부족으로 둘러 보지를 못했고, 치명자산 성지는 주차장까지는 찾아갔지만 자전거로 정상에 있는 성당과 묘소를 찾아 갈 수가 없어서 포기 했던 곳이라서 이번에 재도전을 하는 성지이다. 특히 초남이는 44차 순례 때에 새로이 발견한 유섬이 동정녀의 아버지와 유항검(아우구스티노)가족들이 함께 9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터이며, 치명자산은 호남의 사도라 칭하는 유항검 일가의 가족 유해가 있는 성당이 있는 곳이라서 더욱 애뜻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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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첫 순례지 장수 수분공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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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반 전에 숙박업소가 있는 장수교 근처 식당에서 우거지갈비탕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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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수분공소까지는 약 8km의 느슨한 오르막길이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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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는 사과와 오미자가 한창이다. 길가에서 아침 햇살에 자태를 뽐내는 사과와 오미자를 잠시 사진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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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 장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남쪽으로는 남원이 30여km, 서쪽으로는 임실, 동쪽으로는 함양으로 가는 751번 도로와 연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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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 뜸봉샘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진입하면 동남향으로 아름다운 마을이 보인다.
아침 시간인데 스피커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퍼지고 있고, 이 동네에는 뜬봉샘생태공원이 있다.

뜬봉샘은 이성계가 이곳에서 봉황새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뜬 것을 보고 천지신명으로부터 개국의 계시를 받았다는 설화가 있는 곳으로 금강 발원지이며, 서해 바다 하구까지 397.25km를 흘러간다. 금강테마전시관, 수족관, 금강생태전시관, 물역사관, 야생화 군락지, 꽃사슴 사육장을 갖추고 관광객을 맞는 곳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둘러보지는 않고 곧바로 수분공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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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위에 수분공소가 보인다. 전통 한옥 양식에 서양의 바실리카식 평면을 결합한 성당으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이다.

물뿌랑구(물뿌리) 마을이라고도 하는 수분리(水分理) 마을이다.
비가 내리면 고갯마루를 경계로 빗물이 갈라져 한 줄기는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른 한 줄기는 금강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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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공소 입구로 올라가 마을 쪽으로 내려다 보면 성당 앞에 정자가 있고 마을회관과 스피커 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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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 공소 입구에서 본 전경.  왼쪽 건물이 성당, 오른쪽 건물이 옛 사제관이다. 옛 사제관 앞에서 공소 성당 쪽을 바라본 모습.

공소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건물이 2동이다.

2005년 6월 18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장수 본당 수분 공소는 마을 앞쪽 산자락에 붉은 색 함석 슬레이트 지붕을 하고 있다.
공소 뒤뜰에 세워져 있는 대형 예수성심상은 멀리서도 이곳이 천주교 건물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성심상은 2003년 공소 신자들이 공소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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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안내판.
 

1920년 초 대구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공소를 신축할 경우 방 2개가 딸린 강당을 더 짓도록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공소에 사제를 파견해 본당으로 승격시킬 요량으로 사제관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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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 양식으로 건립된 수분 공소의 내부 모습.
수분리가 속한 장수 지역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850년대경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토마스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수분리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도 교우들이 피신해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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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에 부착된 십자가의 길 액자 


그러나 수분리에 공소가 지어진 것은 1913-1915년쯤이다.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 본당 초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1876-1957년) 바르톨로메오 신부와 진안 어은동 본당 초대 주임 김양홍(金洋洪, 1874-1945년) 스테파노 신부는 두 본당의 인접지인 무주 · 남원 · 임실 등지의 선교를 위하여 중간 지점인 장수면 수분리에 사제가 쉬어갈 강당과 사제관(침실)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이후 본당 설립의 기틀이 되었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서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자 1921년 공소 건물을 전면 개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소 신자들은 28km 떨어진 함양에서 흙기와를 구해 고개를 세 번이나 넘어가며 지게로 날랐고, 목재는 4km 떨어진 금천 앞산에서 육송을 구해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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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우측 벽면에는 수분공소에 대한 신문기사 스크랩, 문화재 등록증, 전주교구장 표창장, 성모성심 액자 등이 나란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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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보강된 공소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6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 양식이다.
시멘트로 바닥을 고르게 한 후 주추를 놓고 나무 기둥을 세웠으며, 벽에는 좌우로 밀어서 여닫는 미세기창을 냈다.
정면 가운데와 양 측면에 출입구를 냈으며 주 출입구는 왼쪽 측면으로 냈고, 제대 뒤쪽에는 고해실과 제의실을 두었다.
고해실은 창틀을 통해 무릎을 꿇고 고해를 보는 신자석과 사제가 고백을 듣는 사제석이 완전히 구별되어 있고, 사제석 윗벽에는 ‘기렴’이라고 쓴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수분리와 송산리 두 공소 신자들이 힘을 합쳐 성당 침실을 중수한 것을 기념해 1956년 5월 16일에 쓴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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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내부의 마룻바닥은 물론 기둥과 벽, 제대까지 모두 처음 공소를 지었을 때 것 그대로이다.
제대는 원래 벽에 붙여져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떼어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나무 기둥들을 철근으로 고정시켜 놓은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흙기와로 만든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기둥이 무너질 염려가 있어 조치한 것이다.
공소 지붕을 함석 슬레이트로 바꾼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원래는 흙기와였으나 1970년대에 시멘트 기와로 바꿨다가 다시 1980년대에 함석 슬레이트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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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앞마당에는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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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공소 신자들이 성금을 모아 봉헌한 예수성심상이 성당 뒤 언덕에 있다.

1920년대 공소 건물을 중수하고 그 옆에 네 칸짜리 사제관을 마련한 수분리 공소는 1926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초대 주임 김필곤(金泌坤, 1898-1928년) 바르나바 신부는 3년 동안 신설 본당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고, 1928년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1899-1974년) 바오로 신부는 문맹퇴치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소화(小花)학원을 세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어린이들과 글을 알지 못하는 주민들을 교육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1935년경 수분리 본당은 한때 교우 수가 1300명(본당 300명, 공소 1,00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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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옛 사제관 건물.

 

그 후 장수 본당 관할이 된 수분 공소에는 2007년 현재 19가구 50여 명의 교우가 살고 있다.
수분리 마을 주민의 70% 정도가 교우로, 공소 운영은 한 달에 두 번은 공소예절을 드리고 한 번은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한 번은 본당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매월 첫째 주 오전 8시에 수분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그런데 공소 경당이 오랜 세월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자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2011년 4월 준비작업을 시작으로 1년 6개월 동안 전반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였다. 경당 뒤 기둥 다섯 개는 안전상의 이유로 교체하고 나머지 기둥과 대들보 등은 모두 옛 모습대로 복구했다.
그리고 2013년 4월 13일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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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리 공소를 뒤로 하고 장수읍내 방향으로 빠르게 내리막 길을 달려 논개사당길로 접어든다. 이곳에 온김에 논개 사당을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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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은 논개의 호, 의암사당이 이곳 두산제(의암호) 위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논개 생각지는 대곡리에 별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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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기념관 앞에서 두산제 방향으로 건나다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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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는 기생이 아니넜으며, 성씨가 신안주씨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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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의 영정은 장수지역 신안주씨 문중을 촬영하고 유전인자를 추출.분석하여 논개의 가까운 얼굴 모형을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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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참배 후 사당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푸른 하늘과 안산, 의암호의 전경은 도열한 국화꽃 길과 어울려서 아름답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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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호(두산제) 주변에서 사과축제를 준비 중이라 빠르게 호수 주변을 돌아나와 장수성당을 잠시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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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읍내 중심가 시장로 로타리 옆에 있는 장수성당은 1973년 2월 장수읍에 있던 장수 공소의 기존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현 장수 본당 소재지(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454-11)의 부지(500평)를 매입한 뒤,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0평 규모의 장수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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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월 30일 전신인 장수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며 초대 신부로 왕수해 세례자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장수 지역의 관할 본당이었던 장계 본당의 지원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1973년 9월 공소 강당을 완공하였다. 장계 본당 주임 신부가 매주 공소를 방문하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자 수가 점차 증가하여 장수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며, 현재의 성당은 1994년 4월 제6대 주임신부 때 신축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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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성당 아래 쪽에 있는 장수공용버스 터미널에서 전주행 버스를 탑승하여 약 1시간20분이 소요되어 전주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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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주 일대의 순례 경로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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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점심은 전주비빔밥으로 한다. 시원한 콩나물국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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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교 다리 아래 천변 도로로 내려가 백제교를 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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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교에서 내려다본 전주천 북쪽 방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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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교 다리에서 처다본 서곡중학교 옆 온고을로의 느슨한 오르막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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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발된 도시지역 만성지구를 지난다. 어디를 가던 새로 개발된 외곽 도시에는 자전거도로와 도보가 차도와는 분리되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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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를 가로 지르는 통로를 지나 양동 시골길을 달려~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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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초등학교 앞에 이르니 초남이성지 표지판이 반갑게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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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는 시골이라서 그런지 순례길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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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지판이 있는 곳 옆에 감밭이 있는데 바닥에 떨어진 홍시가 의뢰 많다. 상하지 않은 홍시 몇 개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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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초남이 성지가 가가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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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주차장에 이르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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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주차장에 커다란 200주년 기념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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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주차장 맞은편에는 대형주차장이 있고, 조금 돌아가니 동정부부 생가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 뒤로 행랑채와 야외강당이 보인다.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년)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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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사도 유항검 생가터 입구의 안내판

 

1756년 이곳 초남이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柳重哲, 1779-1801년)은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1782-1802년)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았던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과 1802년에 신유박해로 치명할 때까지 4년여 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와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이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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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들어가니 성체조배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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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조배실 내부, 잠시 조배를 하며 묵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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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 생가터 파가저택지의 야외제대와 야외강당.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전 등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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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웠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가 독성죄에 해당됨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가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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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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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 교리당터의 사도 유항검과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과 야외제대.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柳文碩, 1784-1801년), 동생 유관검 등 그의 일가친척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고향인 초남이 땅에 묻지 못하고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에 가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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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 교리당터의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 내부.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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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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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破家?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 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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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 교리당터에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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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8일 사랑채 옆 교리당 부지에 30여 평 규모로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하여 봉헌했다.  

경당 안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주문모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지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3칸짜리 한옥으로 지어진 행랑채는 유항검이 왕손을 며느리로 맞으며 황송한 마음에 따로 별채를 지어 아들 내외가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곳으로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의 시복을 준비하며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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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柳重誠, 1784?-1802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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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를 뒤로 하고 오늘 마지막 순례지 치명자산을 향하여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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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꼭 올라가 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전거를 끌고 사제관 쪽으로 올라가서 등산로를 따라 자전거를 밀고 메고를 반복 하면서 도착한 곳이 성직자 묘소에 이르렀다. 겨우 150M 올라왔는데 온 몸은 땀으로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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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겠다고 판단하여 성직자묘소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돌 계단을 따라 치명자산 성지 성당을 향하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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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가면 십자가의 길이 나오고 성모상 앞을 지나 우측으로 올라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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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순교성지 안내판이 나오고 성당건물이 보인다. 산상 기념성당 입구. 

 

치명자산(중바위산) 정상은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柳恒儉)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부부 유 요한과 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주 시내를 굽어보는 중바위는 전주 8경 중 손꼽히는 기린봉 능선에 위치해 호남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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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성당 외부 모습.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둘째 아들 유문석(柳文碩) 요한과 조카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제수 이육희(李六喜) 그리고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등 7명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Baudounet)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이어 1949년 전동 성당 신자들은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세웠다.  

1993년 11월 29일 이 묘소를 개장한 후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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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위에 건립된 산상 기념성당 내부.

잠시 묵상을 하며 감사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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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벽면을 모두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하였다.
진주 유씨 소재공파(素齋公派) 8대손인 유항검은 1784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현재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내려와 호남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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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건물 좌우에 옆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순교자 묘소 가는길 안내표지가 있어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 위는 성당건물 옥상인 셈인데 넓은 공간이 있어서 이곳에서 야외 미사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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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단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니 유항검과 일가족 7인의 순교자 묘가 나온다. 잠시 참배를 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한 유항검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능지처참형을 받고 전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이복동생 유관검에 이어 11월 14일(음력 10월 9일) 두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그리고 다음해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과 제수 이육희가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저택’(破家?宅)의 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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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좌측에 안내판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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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동정녀 이루갈다 유혜, 그 형제 유요안 종선의 묘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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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묘를 서쪽 계단 쪽에서 멀리 본 모습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신앙의 후손들은 생명은 물론 가문의 단절까지도 감수하며 천주를 섬겼고, 그 흘린 피의 대가로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유항검 일가의 고결한 신앙을 굽이진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며 되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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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내려다 본 전주시내

치명자산 성지 성역화 작업은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처음 시작되어 1985년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고 1988년 십자가의 길과 산행로 정비작업을 완료했으며, 1994년 5월 9일 산 정상 순교자들의 합장묘 아래에 기념성당을 봉헌했다.
1997년 입구 조경을 위한 몽마르트 광장을 조성하고 이어 주차장과 진입로 등을 차례로 진행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로 불리는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를 현양하는 요한 루갈다제를 2001년부터 매년 개최하여 순교자 현양행사를 지역문화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편 이곳 합장묘에 묻힌 유항검 일가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문석 요한,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치명자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전주시 풍경. 전동 성당과 풍남문, 성심여자고등학교와 경기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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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사무실에서 사무장님에게 두번째 자전거 순례의 경과를 얘기 했더니 춘향로 승암교 쪽 주차장으로 오지말고 자전거는 견훤로와 낙수정1길과 2길로 진입해서 동쪽의 동고사 쪽으로 올라오면 성당 바로 위까지 자전거로 올라올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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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 첨부한 경로 gpx파일은 동고사 방향으로 수정하여 올려 두었으니 자전거 순례를 하는 사람은 나 처럼 시행착오가 없기를 기대한다.e6819367fc65b18b8889b620d2875b2e_1506340597_0712.jpg

기왕 올라왔으니 내려갈 때는 우측방향의 십자가의 길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로 맘을 먹고 출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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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든다. 클릿슈즈 바닥에는 쇠로 만든 믈릿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바위 계단 위를 걸어 내려가는 것은 몹씨 미끄럽고 위험하다.
후회하면서 십자가 길을 힘들게 내려와서 주차장 위의 갈림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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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성모상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길은 십자가의 길, 우측은 성직자 묘소길이다. 150m을 다시 우측길로 올라가서 자전거를 끝고 내려와서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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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성모상 갈림길에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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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는 보이지 않았던 성모상과 기도하는 사람들이 새로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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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역으로 달려 원정 순례 1박2일을 마무리 하며 이번 순례길에도 주님께서 끝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 기도를 올리며 17:37 ITX새마을호에 올라 20:33 용산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복귀하는 복된 순례길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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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9살 때 관비로 거제도로 유배되어 최근에야 발견되 유섬이에 관한 더 많은 사료들이 하루 빨리 더 많이 발견되어 유항검 사도의 일가족 모두가 복된 시복.시성으로 하늘 나라의 복락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 상단 첨부 : 47차_장수수분공소_의암사_전주초남이_치명자산_20170921.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0449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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