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차 김기량 순교현양비, 황사평, 제주 중앙성당,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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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차 김기량 순교현양비, 황사평, 제주 중앙성당, 관덕정

20170927 제주 원정 순례 2일차는 어제 숙소인 위미 친구의 별장 주택에서 08:30에 출발한다.

49차 순서는 위미를 출발해서 남원을 거쳐 사려니숲을 지나 함덕으로 내려가 김기량 순교현양비, 제주의 황사평, 제주 중앙성당, 관덕정을 순례하고 2일차 숙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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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위미항으로 내려가 잠깐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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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기념 사진 샷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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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주 2일차 코스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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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동로를 진입하여 달리다 남원 성당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 후 남한로를 타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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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에는 감귤밭을 지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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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로에서 중산간동로-서성로914번 임도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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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도로 보다는 임도가 훨씬 아름다운 경관과 달리기에 좋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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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로 914번길에서 1119번 도로로 나와서 우회전하여, 다시 1118번 남조로 사거리에서 좌회전 후 사려니숲 입구로 업힐 하면서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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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번길이 쭉 뻗어 있지만 은근히 빡센 오르막이 계속된다. 제주도의 남-북을 있는 모든 도로는 이와 같은 업.다운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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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오늘 업힐은 끝나는가? 업힐 때의 고통은 금방 잊어지고 사려니숲 입구에서 즐거운 기념 샷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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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 맵, 우리는 동쪽의 붉은오름 입.출구에서 근처 2km 정도를 잠시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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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은 삼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평균 고도는 550m이다.
'제주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로 훼손되지 않은 청정 숲길로 유명해 특히 트래킹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에 인기가 높다.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쓰이는 살 혹은 솔은 신성한 곳이라는 신역의 산명에 쓰이는 말이다.
즉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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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 숲길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존 지역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본격적인 탐방로를 조성해 국제 트레킹대회를 치르면서 현재 제주를 대표하는 숲길로 사랑받고 있다.
완만한 경사로 15km 정도가 이어지는 사려니 숲길은 어린이나 노인들도 쉽게 완주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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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 숲에서 빠져나와 다시 남조로을 달리다 우회전하여 1112번 비자림로 타고 내려가다 미래로를 달리는데 이슬비가 뿌린다.
우의를 꺼내입고 빠른 속도로 함와로를 이용하여 다시 일주동로와 만나 좌전하여 함덕중학교 옆에 있는 오늘 첫번째 순례지 복자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순교현양비 안내판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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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 중학교 옆에 건립된 순교 현양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항해 중 표류하다가 홍콩에서 신앙을 접한 것을 기념하여 순교 현양비가 배 모양으로 건립되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현양비 앞 바닥에 세원진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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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의 사도로 복음을 전한 제주 출신 첫 순교자이다.

 

김기량(金耆良, 1816-1867년)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극동대표부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1832-1900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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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량 펠릭스베드로의 천주가사.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롱(S. Feron, 權)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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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례길 안내판.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1859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무렵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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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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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현양탑 우측에 있는 순례확인 스탬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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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현양탑 맞은편 북쪽의 좌측의 레지오마리애 벡실리움 가운데 성모상, 우측에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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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일어나 가자"(요한 14.31) 기념비가 세워졌다.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김기량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가 2001년에 대량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영세 날짜와 순교 행적을 보다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특히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중 세례 날짜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2001년 5월 28일 교구청에서 첫 전체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김기량 순교자의 행적 등을 담은 서한 등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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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 광장 맞은편에 있는 휴식처.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 성당에도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의 함덕 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6년 9월 10일 김기량 순교 1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열었고, 그해 10월에는 순교 140주년 기념 가톨릭 합창 페스티벌을 열었다.
또한 2007년 11월 그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순교자 김기량(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67세손) 펠릭스 베드로 종친 기도회’ 창립총회가 종친 후손 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처럼 제주교구는 ‘제주의 사도’로서 제주에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본받고 현양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첫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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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현양탑을 둘러보고 함덕 서우봉 해변길로 내려가 해물뚝배기로 점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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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함덕 서우봉 해변을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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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길을 달려서 제주항일기념관을 잠시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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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 만세동산에는 애국선열 추모탑, 애국열사기념비, 창열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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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동로에 다시 진입하여 달리다 조천에 있는 조천성당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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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성당 우측 언덕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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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조천 성당 마당에 건립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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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성당 현관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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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자비의 특별희년 자비의 문 지정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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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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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제대 좌측에 파티마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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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동양적인 모습의 파티마성모상이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가까이 촬영해 본다.
조천성당을 뒤로 하고 다시 일주동로를 따라가다 연삼로를 타고 황사평을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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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안길-도련6길-도련남5길-영평길-영평서길을 통하여 기와7길-기와1길로 접어들어 황사평 주차장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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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주차장 입구에서 바라본 순교자 묘역의 황사평 전경. 이 황사평은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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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끝이 났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 사건들이 빈발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 박해를 능가할 정도의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우를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 된 때였다.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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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초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후임으로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했다.
김원영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해 새 본당을 설립하고 전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교안 발발 직전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교우 241명, 예비신자 620명으로 늘어났다.
신축교안이 벌어진 직후인 1901년 5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제주에는 봉세관(封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봉세관이란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민초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온갖 잡세를 거두어들여 지방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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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막식을 가진 제주도 출신 첫 신자인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복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된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인 이 바울리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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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되어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해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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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순교자 묘역에는 제주 신축교안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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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 전교회, 성 골롬방 외방 선교회의 공덕비.
 

황사평은 총 면적이 약 18,000평으로 현재 신축교안 당시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1980년 황사평 교회묘지를 공원묘지로 공사하면서 울타리 석축공사와 성상들을 건립하고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또한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여 초대 교구장인 현 헤롤드 대주교와 서귀포 본당 주임신부였던 나 토마스 신부의 유해를 성직자 묘지에 이장했다.
 
1998년 9월 20일 황사평 순교자 묘역 한편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 내에 그동안 이역만리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을 씨앗을 뿌리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파리 외방전교회 및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1899년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파견된 이후 100여 년 동안 제주도에는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들어와 사목했다. 그중에서 이미 선종한 16명의 명단이 공덕비에 새겨졌다.
 
1998년 9월 27일 우천으로 한 주 연기되어 황사평에서 거행된 순교자 현양대회 중 제주도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 제막식이 있었다. 제주교구는 그동안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최양업 신부 서한 등 사료들을 토대로 병인박해 중에 체포되어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에 순교한 김기량의 시복시성 운동에 불을 지펴왔었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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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순교자 묘역 기념비 오른쪽으로 제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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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순교자 묘역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에 성가정상이 세워져 있고 좌우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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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평 추모공원 사무실 입구에는 애국지사 세 분의 안내판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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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5일, 제주도 남쪽의 대정 지역에서는 '상무사'(商務社) 회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난행하기 시작하였다.
상무사는 지역민들이 설립한 사설 단체로 천주교 세력이 퍼져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터에 부당한 세금, 지방민과 교인들의 알력, 서양과 일본 세력의 제주도 진출 등이 문제가 되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제주의 신축 교안(辛丑敎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박해 이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제주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8년 4월 22일 '제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Peynet, 배)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네 신부는 육지로 전임되고 라크루 신부가 새로 부임하였으며, 김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함으로써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원영 신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그의 전교 덕택에 교안 발발 직전까지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신자 수 241명, 예비신자 수 62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안은 5월 5일부터 6월 초까지 20여 일 계속되었다.
처음 상무 사원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피정차 육지에 나와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피정 중에 인사 이동을 결정하여 김원영 신부를 육지에 남기는 대신 무세(Mousset, 문) 신부를 한논 본당에 임명하였다.
5월 10일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제주에 들어가 제주성에 갇혀 있는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하였으며, 5월 28일에는 제주성이 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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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신축교안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추모공원 사무실 왼쪽 벽옆에 부착된 성지순례 스템프를 찍는다.

폭도들은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수형에 처했다.
여자 교우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과 화재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왔다.
김원영 신부의 회장인 박 고스마는 묶인 채 매를 맞고 쓰러졌다. 그 곳에 저의 복사 아우구스티노가 있다가 도망쳐 왔다.  

동헌 마당으로부터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고, '천주교 아이 놈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도 들렸다. 벽장에 숨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혔다.
아, 하느님, 제 아이가 잡혔다. 그는 고문을 당했고, 폭도들은 그 아이의 빰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했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여 살해되었다.(라크루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1년 6월 11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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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 한편에 납골당을 조성하여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다. 


신축교안의 결과로 천주교 신자와 예비신자 중에서 약 3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미비로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라크루 신부의 다음 기록을 빌리면,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경우에는 신앙 증거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8세의 젊은이로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였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위의 서한 참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뒤 교안 희생자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에 모아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연고가 없는 시신들은 5월 말에 일단 사라봉(제주시 화북동) 아래에 묻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 4월에 매장지가 황사평(당시 화북 2동의 황새왓)으로 결정되면서 모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주 신자들은 황사평을 순교자 묘역으로 생각하여 해마다 현양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1995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은 합장묘를 조성하면서 묘역을 새로 단장하여 순교 사적지로 가꾸었다.
 

1997년 ‘신축교안’을 재조명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제주교구는 2008년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앞에 납골당 건설 작업에 착수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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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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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지를 잠시 둘러보고 제주 주교좌 중앙성당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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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주교좌 중앙성당은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페네 가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제주도로 피난온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서였다.
이후 풍랑으로 홍콩에서 구조되어 천주교에 입교한 1858년 제주 출신의 김기량(金耆良)이 귀국하여 이웃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병인박해(炳寅迫害) 때 체포되어 통영에서 순교하였다. 1898년 조선 대목구장 뮈텔(G. Mutel) 주교가 부임하여 제주도 본당 설립을 추진되었고 이듬해 제주 본당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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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으로 현관 우측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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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십자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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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있는 성전의 역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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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대성전 계단 옆에 있는 성지순례 확인 스템프, 여기에서 관덕정 순례확인 스템프까지 찍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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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대성전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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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 도착하니 때 마침 파티마 국제순례 성모상 제주방문 이틀 째로 미사가 진행중이다. 여기에서 파티마성모상을 만나서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강론 시간이 끝나자마자 마지막 순례지 관덕정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제주교구에서는 중앙성당 (지하강당)에서 파티마 성모님 뮤지컬 공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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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국제순례 성모상 전국순회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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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은 겹겹이 시신들로 쌓였던 신축교안의 현장이다.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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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이래 1백여 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이를 없었던 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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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했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長淵), 강원도의 이천(伊川)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은 제주에서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교안으로 신자 수백 명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민군(民軍)에 의해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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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안내판.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새로운 조세 정책, 즉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어 가는 것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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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 2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덕정(觀德亭)은 본래 조선 초 세종 30년(1448년)에 목사 신숙청(申淑晴)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亭子)이다.  관덕정의 편액(扁額)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치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었고, 현존하는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이다. 
그런데 제주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이 정자를 처참한 사형장으로 만들었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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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신축교안 당시 처참한 사형장으로 변한 제주목 관아의 관덕정 앞마당.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1997년 ‘신축교안’을 재조명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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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공식적인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던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빈발해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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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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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순례를 마치고 근처 중앙로에 있는 인당 13,000원 저렴한 가격에 무한리필 생고기제작소(북성로 4/삼도2동14-5/ 064-722-5552)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북성로 모텔을 숙소로 정하고 원정순례 이틀 째 여장을 푼다.
오늘도 큰 비가 오지 않도록 하여 순례길을 안전하게 돌보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이틀 동안 함께 제주 순례를 잘 마치고 저녁식사 까지 협찬을 해주고 내일 10시 비행기로 서울로 복귀하는 유도로테아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상단 첨부 : 49차_김기량현양탑_조천성당_황사평_중앙성당_관덕정_20170927.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0447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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