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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차 강진 다산초당, 백련사, 강진성당

20170929(금) 원정 순례 3박4일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순례코스는 송곡선착장-상정선착장-신지대교-고금대교-마량항-청자박물관-가우도-다산초당-다산기념관-백련사-강진성당-영랑생가(시문학파기념관)-사의제-강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센트럴시티터미널행 버스로 상경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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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모텔에서 기상 후, 근처 식당에서 백반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07:20에 최경주 광장을 지나 장보고대로에 진입하여 신지대교에서 청해진 쪽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 건너편 멀리 장보고 동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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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맵 중 완도~강진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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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앞 바다와 신지도 앞 바다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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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 선착장에 도착 하자마자 상정으로 떠나는 배가 있다.  

서둘러 매표를 하고 승선하니 버스와 차량 몇 대와 함께 상정 선차장으로 기수를 돌려 달린다. 상정-송곡을 오가는 이 배도 곧 운행이 중단 될 예정이다. 고금도와 신지도를 연결하는 대교가 11월 중에 완공되어 개통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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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기념 샷을 하는 정발렌티노, 어제 보다는 표정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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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건너왔던 신지대교가 보이고 우측으로 청해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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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마을 쪽을 보면서 샷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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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이는 다리가 새로 개통 예정인 연륙교인데 ...  

연륙교 이름을 완도군은 '장보고대교'로 명명했다고 한다.

03f18ba35b3ab9075a9701979a6ba37a_1507011187_3605.jpg고금도-신지

장보고대교 앞으로 고깃배가 지나간다.

‘장보고대교(張保皐大橋)’는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와 고금면 상정리를 잇는 교량으로 연륙교가 설치되는 해역은 완도군 장좌리 장도를 중심으로 당과 왜의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일본과 교통무역을 하면서 해상무역을 완전 장악한 해역이다.
완도에 있는 장보고대사 동상(31.7m)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으로 해상왕 ‘장보고’의 위대한 업적을 재조명하고 장보고 대사가 활약했던 해역임을 알리기 위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을 통해 교량이름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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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착공하여 2017년 11월 준공을 앞두고 있는 장보고대교는 총사업비 824억원, 총연장 4297m, 해상교량 1305m, 주탑높이 91.5m 폭11.5~13.5m, 2차선 도로의 강합성 사장교로 현재 교량 가설을 위한 상부교각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으며 상판거치가 끝나고 개통식을 눈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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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사가 진행중이거나 앞으로 연결 예정인 전라남도 완도~고흥~여수 해상한려 연륙교 예상 맵을 그려본다.
 

완도군수는 “해상영웅 장보고대사의 진취적 기상을 담은 돛 형상의 웅장한 주탑을 비롯해 화려한 야간 경관은 새로운 완도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며 장보고대교 사업을 최대한 앞당겨 조기 준공하고 신지~약산~금일~금당~고흥 구간을 국도로 승격하여 남해안 관광도로를 개설해 대도시와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권을 단일화해 군민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등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확충하여 찬란했던 청해진의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완도군은 1999년 ‘약산대교’를 시작으로 ‘신지대교’(2005년), 금일 ‘소랑대교’(2006년), ‘고금대교’(2007년), ‘보길대교’(2008년), ‘신완도대교’(2012)를 건설해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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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면 소재지 하나로마트에서 이온 음료로 잠시 휴식을 하고 고금로로 다시 진입하니 삼거리에 고금성당 건물이 보인다. 성지는 아니지만 잠시 둘러본다. 사무장인지 선교사인지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한 분이 나와서 인사를 나누고 신자 숫자 등을 물어 본 후 성당 내부로 들어가 성체조배를 한다.

 

약왕수(藥王樹)라고 불리는 비파 열매의 고장 고금도에 새 성당이 세워졌다.
1987년 김서규 신부가 고금도 연동 이진영(프란치스코)씨의 집에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공소 공동체가 만들어진 지 27년 만에 2014년에 축성된 공소다. 광주대교구 강진본당 관할 고금공소(담당 김용호 신부)는 2014년 5월17일 완도군 고금면 덕암리 655-1 신축 성당에서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전임 교구장 최창무 대주교와 교구 총대리 옥현진 주교, 김정현(강진본당 주임) 신부 등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새 성전을 봉헌하고 성전 봉헌의 기쁨을 나눴다. 이로써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고금도와 마량, 신지, 약산 지역에 대한 선교는 물론 공동체 활성화도 기대되고 있다. 다만 현재 혼인 이주여성이 늘어나며 이주민사목센터 건립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이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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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2월 착공, 5개월 만에 완공된 고금공소는 대지 3347㎡(112평)에 건축연면적 204.78㎡(62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졌다.
성당을 비롯해 나눔방과 주방, 화장실 등으로 이뤄진 다목적홀, 사제관 등이 들어섰으며, 공사비는 대지구입 및 건축비로 3억 5000만원이 들어갔다.
전남대ㆍ전북대 병원장과 보훈병원장을 지낸 황인담(아우구스티노, 89, 전주교구 화산동본당)씨와 고 서영자(베로니카)씨, 가족의 성전 부지 및 건축비 봉헌으로 고금공소 공동체가 오랫동안 기도해온 성당 건립의 꿈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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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마당에 있는 성모상, 몽돌로 성모상 주변을 아름답게 쌓아올렸다.  


지난 1987년에 첫미사를 봉헌하며 시작된 고금공소는 1994년 약산공소 설립으로 힘을 얻었으며, 지난해 8월 첫 선교사로 조광현(그라시아노) 평신도 선교사가 파견된 데 이어 올 1월 광주대교구와 말씀의 선교수도회(신언회, 한국지부장 김종일 신부)가 계약을 맺어 김용호 신부를 파견하면서 복음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현재 강진 마량과 완도군 고금면, 약산면, 금일읍, 생일면 일대를 관할하고 있으며, 신자 수는 고금 15명, 금일 12명 등 총 2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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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내부가 아기자기 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다.03f18ba35b3ab9075a9701979a6ba37a_1507015908_386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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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와 미사 시간은 참조 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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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 교차로 장가마골 언덕길을 올라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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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고금대교를 지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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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항으로 내려가 토요 음악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량항 놀토 수산시장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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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왔던 고금대교가 동쪽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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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쪽 바다 건너에 대오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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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단장이 미완성인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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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항의 전경이 아침 햇살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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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렌티노도 마량 면 소재지를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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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마량 앞바다에 가두리 양식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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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항에서 언덕길을 올라 청자박물관 입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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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박물관 외관. 우측에는 신축한 디지털관이 별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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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입구 좌측에 있는 물레질을 하는 도예 장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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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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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건평 2,109㎡, 소장유물 3만 여점. 1997년 9월 3일 개관하였으며, 고려청자 생산지에 세워진 고려청자 테마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기획전시장·세미나실·도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진은 통일신라 후반기부터 고려말까지 청자를 굽던 곳으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널리 알리고 고려청자의 연구와 교육을 위하여 박물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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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앞 마당에는 지붕의 기와를 청자로 만들어 올린 계룡정이 운치를 더해준다.
고려 의종 때 왕실정원을 만들면서 양이정이라는 정자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남아있는데 그 양이정을 모델로 2004년에 지은 정자다.
보통은 문이 닫혀있는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정자 문을 개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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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앞에 있는 정자와 연못에 수련이 어우러져 운치가 있다.

박물관 소장유물로 고려청자 완품 100점과 청자 가마터에서 수습한 청자편 3만 여 점이 있다.  

특히 청자편은 1991년에 강진군내에 있는 188기의 청자 도요지에서 모은 것으로 도요지별로 청자를 굽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박물관이 들어선 대구면 사당리는 12세기에 청자를 굽던 도요지가 있는 지역이다.
박물관 바로 옆에 기존에 발굴된 고려청자 도요지 2기와 현재 청자를 만드는 작업장이 나란히 있어 청자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길건너 맞은편에는 여러 도예명장들이 운영하는 전시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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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전라남도 공예명장, 강진청자명인1호가 운영 중인 강진탐진청자 전시장 내부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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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의 아름다운 빛깔은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 선조들의 예술이요 미학적 기술의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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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간이라 다른 곳은 아직 오픈 전이고, 제한된 시간 때문에 자세히 둘러보지 못하고 청자박물관을 뒤로 하고 가우도 입구로 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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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로에서 드뎌 가우도가 보인다. 오토바이나 자동차는 들어갈 수 없는 곳, 자전거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를 즐겨볼량으로 가우도 출렁다리 입구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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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저두 출렁다리 입구에 패트병들을 모아 만든 조형물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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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는 강진만 8개의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로 바다와 해안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가우도라는 이름이 독특하죠. 바로 가우도의 생김새가 소(牛)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가우도"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가우도는 옛날에는 배를 이용해 섬을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동.서에 2개의 다리가 가우도를 잇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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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저두 출렁 다리와 서쪽의 망호 출렁다리 2개의 다리가 있는데~
차량으로 와서 걷는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이색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도대체 ‘어떤 다리길래’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가우도를 찾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접근이 너무 불편하기에 가우도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오느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자전거로 건너는 시간이 일러서인지 우리 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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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출렁 다리 438m를 건너 가우도로 들어가 본다. 망호 출렁 다리는 716m로 가우도와 도암면 망호를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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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 다리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출렁 다리가 아니고 다리가 실제로 출렁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바람과 하중에 따라 주탑 간 경간이 흔들리고 있으니 출렁 다리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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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를 건너 가우도에 도착했다. 자전거로 우회전하여 돌아보기에는 계단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좌회전 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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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온 저두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샷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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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데크길을 따라 영랑나루 쉼터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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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영랑 김윤식 동상과 그의 시들이 있는 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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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쪽 출렁다리와 해상복합 낚시공원 방향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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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쪽의 망호 출렁다리 716m를 건너간다. 출렁다리 좌측 아래 바다에는 해상복합낚시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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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가 갖는 기능은 아무래도 교통을 위한 가치 보다는 관광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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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호 출렁다리 북쪽 방향의 전경도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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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호 출렁다리를 거너서 도암면 월곶로-해안관광로를 진입하면 자전거도로가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03f18ba35b3ab9075a9701979a6ba37a_1507021022_9753.jpg
도로 우측에는 바다가, 좌측에는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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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찾아가는 곳이 오늘의 순례지인 다산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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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목 좌우에는 한옥 음식점과 민박집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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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입구에 있는 안내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이 태어나서 살다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의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농경 사회에서 그 나름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진 철학 체계로 사상적 지주가 되었던 성리학은 시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상공업 사회에 부응하는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의 관심을 제고하는 북학 사상이 새로운 시대 사상으로 18세기 중반에 태동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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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능선 초입 중턱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거칠다.

빗물에 싯기어 돌뿌가 그대로 드러나고 나무뿌리들 조차 앙상하게 들어나 잠시도 클릿슈즈를 신은 발길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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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옛 초당이 무너진 자리에 다산유적보존회가 새로 건립한 현 다산초당.

 

현재의 다산 초당은 옛 초당이 무너져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다산유적'(丁茶山遺蹟)이란 명칭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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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서편 마루 한쪽에 순례확인 인장이 놓여 있다.

국토의 끝, 강진은 남도 문화의 일번지이다. 월출산 아래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남단으로 자리 잡은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서러운 유배 생활을 하곤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됐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수 많은 명저(名著)를 저술했기에 강진은 정약전.약종.양용 형제의 고향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인 마재 못지않은 중요한 사적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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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요한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한다.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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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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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부끄러워했던 다산의 초상화가 다산초당 방안에 있다.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와 “성교요지”(聖敎要旨)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배교한 뒤 말년을 회개와 참회로 참된 진리에 자신을 바친 다산은 죽기 직전 중국인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다산의 체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다산초당은 유배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초당 입구에는 그의 유적비가 외롭게 서 있고 초당 앞에는 차를 갈았던 돌이 놓여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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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면 그런 머뭇거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도해를 바라보며 적적하게 선 강진의 외딴 초당에서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心書) 등을 저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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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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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의 유배가 풀려 초당을 떠나며 바위 석변에 친히 음각한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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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나주 정(丁)자를 새긴 정석....정으로 쪼아 정석(丁石)이라는 글을 새겨 놓은 초당 옆의 바위는 그의 뉘우침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에 대한 회환과 뉘우침, 순교한 동료들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우리는 “만천유고” 발문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요한(Johan) 정약용은 산천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쓸쓸하게 지내고 난 뒤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다. 유배 중이던 1811년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2, 3년 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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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초당 앞에 있는 다조(茶竈).

약천 석간수를 손수 떠다 앞뜰 마당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널따란 청석(靑石), 10살이나 어렸던 백련사 혜장선사와의 교우로 다도를 익히게 되었고, 이후 차를 무척이나 좋아 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햇차를 정성것 준비해 다산에게 전달 했다고 한다.
청석에 앉아 차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처 자식과 헤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적 고뇌와 아픔이 뼈에 사무쳤던 다산에게는 그저 지나친 사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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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바닷가 돌을 주어다 손수 쌓았다는 연못의 돌탑, 유배가 풀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그를 찾아온 제자에게 연못의 금붕어와 탑에 대해 묻곤 했다고 한다.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죽음은 모면하여 급기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구나.

30여 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없건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 다 어디로 가버렸기에

하나도 볼 수 없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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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서암.

다산초당 옆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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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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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

2001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사료조사단은 강진을 답사한 후 강진에서 발굴된 다수의 정약용 인장에서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사실과 다산이 강진에서 가르친 다신계(茶信契) 18명의 제자들 중 이승훈(베드로)의 아들 이택규(다산이 그의 외삼촌이 됨. 다산의 누이가 이승훈의 처)와 순교자 윤지충(바오로)의 양자 윤종영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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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에서 바라다 본 강진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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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유물전시관.
  

1999년 8월 7일에는 다산 초당에서 남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한 다산 유물전시관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강진 다산 수련원에서 구림마을까지 이어지는 남도 유배길 61.5km는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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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물전시관을 나와 다시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는 붉은 동백꽃으로 유명한데 오른는 길목 좌우에 가로수도 동백이고, 대웅전이 있는 본찰로 오르는 급경사 언덕에도 고목의 동백나무숲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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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丹靑)이 잘되어 있는 다포(多包)집 건물이다.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컷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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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를 뒤로하고 강진읍으로 들어간다. 비록 성지나 사적지는 아니지만 길목에 있는 강진성당 정문에 이르러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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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강진 공소를 설립하여 1961년 해남 본당에서 독립하며 그해 9월 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현재의 성당은 1971년 미국의 실업가 존 리챠드 형제와 골롬바노회등의 도움으로 새로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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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성당 현관문.
 

1961년 1월 25일 해남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리처드 다윗 신부이다.  

1955년 해남 본당의 김병준 신부는 신자들의 요청으로 강진 공소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강진 지역의 전교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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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성당 내부 모습.

1961년 4월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그해 7월 20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으나, 완공된 성당이 너무 작아 신자들을 모두 들일 수가 없었다.
노아의 방주 모습을 한 현대식 성당은 제3대 주임 신부 쉬한 신부 때에 미국인 실업가 리처드의 도움으로 1971년 4월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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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의 십자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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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성당 입구 우측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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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터미널에서 가까운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을 찾았다. 건물 초입 우측에 있는 사진 담벼락. 


시문학파란 1930년에 창간된 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시인들을 말하며,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 정지용, 위당 정인보, 수주 변영로, 김현구, 연포 이하윤, 신석정, 허보 등 9명이 동인으로 참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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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파기념관 건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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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좌측에 시문학파 3인상과 동인 9명의 얼굴 동판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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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들어가는 왼쪽에 세워진 시문학파 3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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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에 개관하여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전시실, 20세기 시문학도서관 세미나실, 학예연구실, 북 카페, 소공원 등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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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의 북카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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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파'는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의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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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미적 성취 추구 시문학파, 인생과 사회에 대한 거창한 주제가 가능한 배제되었고, 모국어의 세련미에 몰두하여 한국시의 예술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던 게 시문학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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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의 친구 정택영 화백(재불예총 초대 회장)의 할아버지 지용선생을 만나니 더욱 반갑고 기록들에 관심이 깊어진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직 납북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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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있는 영랑생가로 발길을 돌려 살펴 본다. 시인 김윤식(1903∼1950)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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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지붕이다. 본채에서 10여 m 떨어진 왼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지붕이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져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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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 영랑 김윤식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장흥으로 통하는 영랑사거리에 선 그의 동상에도, 읍내 곳곳에서 눈에 뜨이는 모란슈퍼, 모란미용실, 영랑화랑 등 가게 이름에도 강진 사람들의 영랑 사랑은 드러난다. 강진 사람이 아니라도 영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우리 시에 보탠 윤기 나는 서정의 물줄기를 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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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튼튼한 시비가 하나, 그리고 사랑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화단과 연못이 있다.
초여름이 되면 그를 상기시키듯 시비 주변과 마당 구석에서 모란도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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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대지주 집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그의 선배로 홍사용·안석주·박종화가 있었고 또 후배로는 정지용·이태준 등이 있었다.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용아 박용철 시인과 사귀었다.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이 나자 그만두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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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박용철·정지용·이하윤·정인보·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그 지면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시를 발표하면서 영랑은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1935년에 『영랑시집』이 나왔다. 그후에도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영랑의 시 세계는 주로 1930년대의 작품들로 대변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광복 후에는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강진의 자연처럼 따사로운 시를 통해서만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 서울로 이사했고 이듬해에는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9·28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튿날 운명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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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사의제이다.

사의제(四宜齊)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1801.11.23)되어 처음 머문 주막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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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제(四宜齊)라는 현판이 붙은 방이 다산이 기거한 토담방이다.

그는 주막집 아주머니와 딸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4년간(1801-1805) 이곳에서 지냈다.
사의제는 자신에게 다짐한 4가지 경계를 말한다.
유배를 당해 낙담해 있는 그를 향해 주막집 주인이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책하자
마음을 추스리고 사의(四宜) “4가지 마땅히 지켜할 덕목” 즉 생각/용모/언어/행동에 대한 것인데,
"생각을 맑게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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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면서 최초로 제자 황진 등 강진읍 6제자를 가르치게 된다.
강진에는 다산 실학의 4대 성지가 있다.
사의제를 비롯해 1년간 머문 강진 고성사 보은산방, 강진 이학래 집, 도암 귤동마을의 다산초당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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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산방은 1805년 가을 부터 1년간 머문 곳으로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생각하며 흑산도를 바라볼수 있는 산중턱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6제자 교육과 52편의 시를 쓰고 "주역사전, 상계사전" 등의 집필에 몰두 했다.
보은산방에서 1년간 머물다 강진 6제자중 막내인 이학래의 집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2년 가까이 머물렀다. 이학래는 다산의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에 중심적으로 참여한 제자였다.
다산은 1808년 봄, 이학래의 집에서 도암 굴동마을 초당으로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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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원래 해남 윤씨인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후손들을 위해 1천여권의 장서를 갖춘 문중의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가 끝나는 1818년 까지 10년간 기거하면서 불휴의 명저인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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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대한 저술을 할수 있었던 것은 강진읍 24제자(강진읍 6제자와 초당 18제자)들의 공동 연구.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뛰어난 실학자이자 대학자인 정약용의 업적 속에는 강진 24제자의 헌신과 공동 연구 지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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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제 뒤 마당에는 4년간 다산 수발을 들었던 주모상이 있고, 주모상 뒤쪽으로는 한옥 객사가 새로 지어져 있어서 강진을 찾는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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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제를마지막으로 둘러보고 강진 버스시외버스터미널로 내려와서 오늘 51차 순례를 마무리 한다.

15:30분 버스에 탑승하여 3박4일 원정 순례길을 안전하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동행하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또한 순교 성인들의 전구에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깜박 잠에 빠졌다가 여산 휴게소에서 간식을 하고, 버스전용 차선으로 밀리지 않고 달려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정발렌티노는 3호선으로 나는 7호선을 타고 각각 귀가하여 길고도 짧은 마지막 자전거 순례여정을 마무리 한다.

동행한 정발레티노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 상단 첨부 : 51차_완도_가우도_다산초당_백련사_영랑생가_사제의_20170929.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connect.garmin.com/modern/activity/2015018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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